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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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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30 09:33

그때 그곳으로 (1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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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직선으로 이어져
영주동시장으로 내려서는 부근까지 왔다.
참 크고 번성한 시장이었는데
이젠 이곳이 시장인가 싶을 정도다.


(위 사진) 영주동시장으로 내려서며


(위 사진) 봉래국민학교와 영주동 집으로 가는 큰 길에서

시장 입구에서 왼편으로 돌면
봉래국민학교와 영주동 집으로 가는 큰 길로 들어선다.

여기서 한참 떨어진 영도다리 앞 4거리엔
자그마한 극장이 하나 있었다.
그 극장엔 주로 형들이랑 영화 보러 자주 갔었다.

어스름이 드는 시각에
형들 손 꼭 잡고 이 길을 걸어가
영화 보고
깜깜해진 밤을 걸어
전봇대에 노란 백열등 하나 달랑 걸려 있던
컴컴한 이 길로 다시 들어서면,
그 긴 시간 내 작은 손 붙잡고 있느라
땀 흥건한 형들 손 뿌리치고
마음껏 이 길을 뛰어 올라갔었다.

그러면 깜깜한 주변은 다시 영화관 되고
별들 빛나던 하늘엔
조금 전 보았던 영화가
다시 상영되고 있었다.


(위 사진) 큰 길에서 봉래국민학교로 들어가는 좁은 길


(위 사진) 봉래국민학교, 옛 고풍스런 본관은 어딜 가고…

잠시 다녔던
역사가 115년이나 된 봉래국민학교를 들러 본다.
넓은 운동장은 그대로 인데
역시나 고풍스럽던 본관 건물은 사라지고
어디나 같은 모양의 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어느 날 동네 친구들과 같이 놀고 있는데
이제 모두 학교를 간다고 하였다.
외톨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학교 보내 달라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어머니를 졸랐다.

그러고 내 양력 생일인 3월 6일인가... 그 날
어찌 되었는지 나도
하얀 칼라 달린 검은 교복에
가슴엔 옷핀으로 하얀 광목 손수건 붙이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 입학식에 서 있었다.

그리해서 난 1년 먼저 학교를 들어가게 되고
그 뒤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줄줄이
반 친구들이 심심하면
생년월일 늦은 날 동생 취급하는 통에
그때 먼저 입학한 것이
또 그런 결과를 초래한 욕심 많고 급한 성격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어쩌랴,
형들 누나들 층층시하에서
그런 성격마저 없었다면
내 손바닥엔 늘 스치는 바람 밖엔 없었을 것이다. ㅎㅎㅎ


(위 사진) 영주동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엔 검은 빌딩이 서고


(위 사진) 뒷집 터엔 무슨 사연인지

학교를 거쳐 우리 집이 있던 동네로 건너온다.
집 터엔 검은 빌딩이 들어서고
거기엔 상점들이 여럿 입주해 있다.
앞집이었던 약국집은 도로가 넓혀지면서 헐렸나 보다.
연탄공장 하던 연탄집네가 살던 뒷집은
무슨 사연인지
빈 공터로만 덩그러니 남았다.


(위 사진) 돌아 오르는 계단 집이 있던 자리

동광동 살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다.
예전 살던 동네,
돌아 오르는 계단 집에
뭘 갖다 주라는 것이었다.

그 집은 대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특이하게 돌아올라가는 형태여서
그리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무엇을 광목 천 안에 넣으시곤 둘둘 말아
내 웃옷 걷고 그걸 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곤 절대 다른 데 들르지도 말고
누가 좀 와 보라 해도 응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동광동 집을 출발한 난
쉬지 않고 뛰었었다.
그것이 어머니 당부 대로 하는
나로선 유일하고 완벽한 방법이었다.

그리 뛰어 마침내 이마엔 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무사히 그 집에 당도하였다.
계단을 돌아올라 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순간,
난 그만 얼어 버리고 말았다.

날 맞이해 준 사람이
동광동 집 2층에 세 들어 살던
그 차가워진 아줌마였기 때문이다.

아줌만 땀에 흠뻑 젖은 날 보시곤
밝은 미소로 수고했다며 어깰 다독거려 주셨다.
누나들 둘은 마당 안 현관 앞에서 아는 체하며 바라보고 있었고,
막내도 어느새 훌쩍 커
아줌마 뒤에 붙어 얼굴 내밀곤
방긋 웃고 있었다.

이젠 돌아 오르는 계단 집은 없어지고
연두색 담으로 선명한 뒷집 비스듬히 내려선 축대만이
그 앞 계단 집의 존재를 유추하게 해 줄 뿐이다.


(위 사진) 계단 집 쪽에서 예전 우리 집 쪽으로 연결된 골목길

계단 집 앞에서 뒤돌아
예전 우리 집 쪽으로 곧게 뻗은 골목길을 바라본다.

저녁 무렵에나 여기에 당도할 거라 예정한
이 여정이,
아직 이리 훤한 시각에 끝나고 만다.

잠시 쉬며 긴 호흡 들이마신다.
동네 아이들로 먼지 잘 날 없던 저 골목길...
오늘은
이리도 태연스럽게 한가하다.

- 끝 -

  • ?
    선경 2011.05.04 12:35
    유년의 추억으로 봄볕의 햇빛만큼이나
    꿈이 가득했던 그시절~~아름다운 추억여행으로~~~
    금방이라도 골목에서 그옛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듯하여
    자꾸 뒤돌아보는 허허바다님의 모습을 오버랩해봅니다
  • ?
    하해 2011.05.09 12:56
    그때 그곳을 따라 가보니
    저 또한 아련한 유년의 추억과 마주합니다^^
  • ?
    섬호정 2011.06.24 07:29
    이름도 정겨운 동광동 영주동, 봉래학교...
    유년의 추억에 인생이 화려해지는 기분입니다
    번잡한 도시지만 좋은 곳에서 자라며 사셨네요 허허바다님!
  • ?
    김명환 2014.05.26 16:49
    어릴쩍 뛰어놀던날들이 생각이 나네요.
    아직도 있을지 모를 청호탕~~ 친구들과 다니던 수영장이였던..ㅜ.ㅠ
    목욕후 앞쪽에 있던 로얄 오락실에서 한판하던...
    저에겐 추억이 가득한 곳... 좋은 사진 글 마니보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요즘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얀집이란 떡볶이 집두 마니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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