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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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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 21:47

그때 그곳으로 (8)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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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을 빠져 나와 40계단 윗길로 나온다.
이 길은 남북으로 곧게 뻗은 길인데
항구와 나란히 간다.




(위 사진) 북쪽으로 난 윗길


(위 사진) 예전 문방구였던 가게

윗길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지금 디지털인쇄라는 간판이 걸린 가게는 그땐 문방구점이었다.
그곳에서 신기한 연필들을 구경하는 것은 내 즐거움이었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연필이었는데
모두 일제여서 매우 비쌌다.
내 용돈으론 감당이 안 되어
매번 만지작거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문방구점 앞에서 40계단과 마주치고
또 길이 정북 방향으로 휘어지면서
길엔 다소 넓은 공간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골목 골목에서 쏟아져 나와
놀이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늘 이곳에서 모여 있었다.

놀이는 주로 편 나누어 벌이는 전쟁놀이였다.
좀 무게 있게 평가하자면 도심 게릴라전이었다.
좁은 골목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그 골목들 안에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 집들의 대문이 들쑥날쑥 하고
그 길 또한 휘어지고 꺾이고 서로 이어져 있어
매복하거나 유인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거꾸로 돌리는 영상처럼
편 나눈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던 그 골목으로
다시 순식간에 빨려 들듯이 사라지면
놀이는 시작된 것이었다.

골목 한 지점 주변,
친구들 집 대문 안쪽에 매복하다
다른 편이 그 골목을 지나는 순간 모두 뛰쳐나가
순식간에 포위를 하는 수법이
우리 편의 주된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다른 편들도 바로 모방하였고
때문에 놀이가 시작되면
갑자기 동네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지나는 어깨짐 행상들의 방울 소리만
가끔씩 그 정적을 깰 뿐이었다.


(위 사진) 40계단과 그 아래의 정경

놀이가 끝나면 아이들은 40계단에 앉아
우리 편이 이기거나 진 이유를 이야기 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해가 지면서 서서히 펼쳐지는 계단 아래에 화려함과
저녁이 가까워지며 40계단 올라 집으로 가는 사람들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끔은 40계단으로 이어져 쭉 뻗은 아랫길 끝에서
바다 수증기에 한껏 부풀은
노오란 둥근 달 떠오르면
입 다물지 못하고 그 광경에 풍덩 빠져들곤 했다.

이 계단 아래로 난 길을 쭉 가면 항구에 다다른다.
한동안 우리는 파병되어 떠나는 국군 환송 식에
작은 태극기 들고 항구로 여러 번 초대되었다.
우리 큰형도 그 항구에서 월남에 갔었고,
그 항구로 월남에서 돌아왔다.

처음엔 금지구역인 항구에 들어간다는 것과
큰 배 보는 즐거움, 모여 재잘거리는 재미에
태극기 흔들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
그리 싫진 않았지만,
자꾸 동원되면서는 짜증은 서서히 커져만 갔다.

또 태극기 흔들어야 하는 어느 맑은 날,
계단 길 정면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덜 뜨여진 눈을 마구 헤집고 파고들 땐
세상에 그보다 더 귀찮은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1년 뒤 큰형이 월남에서 돌아온 시각은
깊은 밤이었던 것 같다.
자다 집이 어수선하여 일어나니 큰형은 돌아와 있었다.

포탄이 날아와 타고 있던 수송선에 박혔는데
다행히 터지지 않아 살았고,
타는 더위, 습한 공기, 입에 맞지 않은 식사, 더러운 물에
죽다 살았다는 등등의 긴 얘기에
아이고! 살아 돌아온 기 다 부처님 덕이데이, 고생했다, 하며
놀라고 또 안도하는 짧은 맞장구가 오가는 그 공간에는
너무 어려 낄 순 없었지만,
다들 거기 정신 팔려 있는 사이
난 큰형이 가져온 선물들을
먼저 꺼내 보는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침대튜브, 포탄 껍질로 만든 칼, 재떨이, 이상한 검은 돌 안에 박힌 수정,
화약 뺀 소총 탄환, 미군 전투식량, 등등 그리고 누런 금...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려 애써 봤지만
허망하게도 대부분 어머니에게 빼앗겼다.
다만, 셋째 형과 내가 침 흘리며 눈독 들인
침대튜브, 소총 탄환은
어머니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무사히 빠져 나와
그날 밤 바로 우리들 품에 안겼다.

40계단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가
그 표식과 함께
계단 중앙에 아코디언 키는 젊은 신사 모습을 한
낭만적인 동상도 앉혀지고
보도는 깔끔한 타일로 깔리는 등
이렇게 치장된 관광명소로 변해져 있다.

모처럼 옛 시절을 기억할 수 있도록
여기나마 허물지 않고 이 정도라도 보존된 것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로 인해 생긴 속 쓰림이
그나마 조금 가라앉는다.

그러나 이 계단 길,
계단 길만 이리 치장해 길만 뚜렷하게 만들었지만
그 아래와 특히 그 위는 아무렇게나 방치함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그래서 계단 옆 오랜 이발소 간판처럼
또 다시 세월과 함께 바래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원래 길이란 두 지점이 살아 움직여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이 길에서도
사람의 생로병사와 같은
순환의 과정이 존재한다니. 참...


(위 사진) 아직도 그대로인 축대와 건물, 그리고 골목


(위 사진) 아랫길과 연결이 뜸해진 계단

길은 계속 이어진다.
길 양 옆은
낡고, 무너지고, 떨어져 나가
많이 퇴락해 버렸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그 시절 애틋한 향내를
아직도 간직하며 버텨 내고 있다.

저 오래된 주택이
그 어떤 추억들과 분명 관련되어 있겠지만
내 기억은 그것을 찾지 못한다.

이곳 저곳의 쇠락한 모습들도
기억 찾기를 위해 줄 지어 서 있지만
또한 마찬가지다.


(위 사진) 길 아래 국제극장은 사라지고


(위 사진) 계단 길 대신 나선형 길이 들어서고

국제극장이 있던 자리는 오피스빌딩이 들어서고
예전 모습에 대한 그 어떤 흔적이나 표식도 남아 있지 않다.
윗길과 아랫길을 연결해 주던 계단 길은
언덕이 너무 가팔라 길 양쪽에서 계단으로 내려가다
중간쯤에서 양쪽이 합쳐져 앞 방향으로 뻗은 계단이었는데
지금은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가는 길로 변해져 있다.

가끔 아버지께서 국제극장의 난방설비를 점검하셨다.
그땐 나를 함께 데려가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는데,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동안 난 신나게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나면 난 저 아래 광장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실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 생각에 잠기어
나선형 길 난간에 기대
한참 광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나 보다.

난간에 기댄 내 모습이 불안해 보이는지
지나는 행인들,
자꾸 눈치를 준다.



  • ?
    선경 2011.04.25 12:23
    시네마천국의 한장면을 연상케하는 추억여행~~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선율과함께 옛길을 저도 모르게
    따라가 봅니다~~^^*~
  • ?
    섬호정 2011.06.24 08:03
    여중 등교길에 40계단 위 오른쪽 끝집에 사는 친구를 부르러
    땀 흘리며 올라가던 그 40 계단 그립네요
    남인수의 노래로 '40계단 층층대에..' 따라 흥얼대며
    좌천동 경여고 담장 끼고 걸어서 영주동 고갯길 걸어와
    동광동으로 빠져 남일교 지나 구덕산 까지 등교길은
    아침 1시간이 넘는 도보로 도시등교길.
    매달려 가던 전차통학보다는 정서적이고 즐거운 길입니다
  • ?
    섬호정 2011.06.24 08:07
    70년대 후반의 월남장병 이야기를 새롭게 들으니
    어머님의 부처님전 기도에 가피로 살아온 아드님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지를, 그 마음이 감지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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