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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08:33

이순신의 두 얼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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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8. 18)가 100여 년간 계속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을 평정한 후 남아도는 많은 군인과 자신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1592년 4월 14일 30만 7천 명의 병력 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장으로 700여 척의 배와 1만 8천 7백 명의 왜군은 부산에 상륙 1598년 11월 19일까지 장장 7년 동안 조선을 유린하게 되는데 이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일본군은 정예군으로, 그 수는 총 40만 명이 넘으며, 그중 30여 만 명은 조총으로 무장되어 있는 상태이며, 함선 또한 1,300여 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을 침범하기위해서 5년이라는 시간을 더 훈련하고 준비해왔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조선은 적어도 1,000여척의 함선과 5년 정도 훈련한 병사가 50만 명 정도 있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군사 수는 약 5만 명이고, 정예부대는 8천명으로 평소에는 2천명이 근무를 했다. 함선은 100척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총은 단 한 자루도 보유 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천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천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장으로 하는 제 1군이 5월 2일 한양을 함락한다.

  한편 해상에서는 첫 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1540∼1597)의 대패로 일본군이 상륙할 수 있었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1592년 5월 7일 오포해전에서 첫승리를 하고, 7월 7일 한산도대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군의 해상활동이 차단되고 보급로가 끊어졌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으로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왜군이 총퇴각하는데 11월 19일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참패하면서 7년 동안의 왜란이 완전히 끝났다.

  그런데 이런 압도적인 우세로 열세인 조선을 일본이 무려 7년 동안 정복하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결국에는 섬 하나 가지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이전쟁의 실패 원인은 바로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장군은 절대적인 열세에 몰린 상황에서 단 1년 정도의 훈련과 5천명도 안되는 군사와 50척 정도의 함대로 어떻게 막강한 일본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이순신장군이 권력을 잡지 않고 충(忠). 의(義). 효(孝). 신(信). 애(愛). 정(正)의 유교정신을 지킨게 승리의 요인 이였다.

명나라의 참전
  명나라는 1592년 6월 15일로 조승훈(祖承訓)이 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의 임시정부 경비가 임무였지만 공을 세울 욕심으로 평양성전투를 시도했다. 조선은 김명원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함께 전투에 참가토록 하였다. 1592년 7월 17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평양성에 입성했지만 매복에 걸려 참패를 당했다.

  이어 8월 1일 평안도순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賓)의 군사 5,000여 명, 순변사 이일의 군사 5,000여 명, 조방장(助防將)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1만 여명 등 조선군 2만여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탈환하지 못했다.

  1593년 1월 6일 도원수 김명원, 우방어사 김응서, 좌방어사 정희현,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조선군 1만여 명과 이여송(李如松 ?∼1598)의 명나라 군사 4만 명 등 조명연합군은 고니시의 1만 5,000여 명이 지키는 평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1월 9일 평양성을 탈환했다.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해야 함에도 이여송은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왜군은 평양이북의 군사를 철수시키고 재정비할 수 있었다. 1월 27일 이여송, 김명원이 이끄는 조명연합군 2만 명과 고바야가와[早川隆景)의 왜군 4만 1,000명이 벽제관(碧蹄館)에서 전투가 벌어져 조명연합군이 패했다.

  싸움에서 패한 이여송이 개성으로 철수하려 하자 조선은 강하게 반대를 했다. 평양성 수복을 한 이여송으로써는 더 이상 위험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명의 일개 장수가 조선의 순변사 이빈을 발로 차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명나라는 구원병이 아닌 점령군 행세를 했다. 조선은 작전권도 없었다. 심지어 전시총사령관인 체찰사 유성룡이 말을 타고 가던중 명나라의 일개 군졸 3명에게 영문도 모르는체 끌려가기도 했다.

  명나라군사가 임진강을 건너 철수하지 못하도록 배를 없앴다는 이유로 이여송이 곤장 40대를 치기 위해서였는데 허위로 들어나 도중에서“돌아가도 좋다”는 말 한마디 듣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약탈을 일삼자 이순신은 군중에 명령을 내려 가옥들을 모조리 헐게 하고, 이순신의 옷과 이부자리를 배로 옮기게 하였다. 진린이 곳곳에서 집을 헐어내는 것을 이상히 여겨 부하를 보내 물어왔다.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들이 행패를 부리고 약탈을 일삼아 견딜 도리가 없어 모두 달아나니 나도 대장의 몸으로 혼자 남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같이 가려는 것이라 하니 진린이 헐레벌떡 달려와 간절히 만류하자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들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이를 다스릴 수 있도록 권한을 받는 조건을 관철시켜 피해를 방지했다.

  일개 장수도 이렇게 백성을 위해 노력했는데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명나라군사들에 의해 피해가 엄청나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나라는 참빗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왜군의 손실
  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밀물처럼 조선땅을 쓸고 지나가 왜군의 피해가 별로 없는 것처럼 비쳐지지만 이듬해 2월경에는 고니시의 제1군 1만 8,700명은 부산진성전투, 동래성전투, 신립의 충주전투로 병력의 수가 줄다가 평양성전투에서 결정타를 맞아 7,000명만이 살아남았다.

  함경도에 진출한 가토의 2군도 1593년 2월 29일 한양으로 철수했는데 철수하다 굶주림과 추위에 인마가 죽어 당초 2만 2,000명에서 1만 3천 명만 살아 돌아왔다. 한양에 주둔하면서 독산성전투와 행주산성전투를 치른 우키다 히데이에의 제8군, 황해도 연안성전투를 치른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 전라도 진격에 실패하고 벽제관전투를 치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제6군도 같은 실정이었다.

  당초 15만 8,700명을 출동시킨 왜군은 4만 명을 증파 총 20만 명이었는데, 이때까지 왜군은 7만 5,000여 명이 사망하여 12만 3,700여 명이었고, 한양에 주둔한 왜군은 대략 5만 명으로 이미 한양을 지킬 힘이 없었다. 이에 명나라 심유경과의 강화교섭을 거쳐 도요토미가 철군허가를 내려 1593년 4월 18일부터 왜군은 한양에서 철수를 하여 5월 13일 밀양에 도착했다.

진주성 함락
  1592년(선조25) 10월 5일 하시바 히데카스(羽柴秀勝)를 대장으로 한 3만 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불과 3,800명의 군사로서 10월 11일까지 싸워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이때 철수한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 의한 패전을 복수하고 지리상의 요충지인 진주를 확보하기 위해 가토, 고니시, 구로다 등이 이끈 9만 2,700여 명으로 1593년 6월 22일부터 6,000명이 지키는 진주성을 공격하여 6월 29일 오후 2시경 성을 함락시키고 군인과 민간인 6만여 명을 학살하고 심지어 닭, 개, 짐승까지도 모조리 죽였다.

  이때 3천 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한 김천일(金千鎰)이 도절제(都節制)의 임무를 띄고 장윤(張允)으로 하여금 서예원(徐禮元)을 대신하여 가목사(假牧使)의 직책을 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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