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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09:03

이순신의 두 얼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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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마다 시에서 추천한 책 1권씩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도록하여 김태훈저 "이순신의 두 얼굴"을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내용이 길어 몇차례에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분명 인간으로서 한계를 극복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도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순신은 결코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고난을 묵묵히 정면 돌파했다. 시련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무인의 강골로 일관된 길을 걸었다. 이순신은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간 진정한 영웅이었다.-본문 중에서

  우리에게서 잊혀져 있던 이순신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그로서는 우상이 필요했고 잊혀져있던 이순신은 거기에 꼭 맞는 인물이었다. 그 후 교육을 통해 이순신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낸 성웅으로 국민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순신의 두 얼굴'을 읽으면서 나는 이순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순신은 절대로 지는 전투는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순신은 자만에 빠지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전투에 임했다. 해전에서 그는 준비된 상태에서 의도한 대로 적을 맞았다.

  이순신은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했고, 유리한 시점과 지형을 택하였으며 무엇보다 자만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철저한 준비와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전략가이고 경영자였다.

  이순신은 한양 건천동(乾川洞;지금의 中區 仁峴洞) 출생하였다.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 1589년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1591년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그는 왜침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었으며, 특히 거북선을 제조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23번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는 충남 아산(牙山)에 있고, 충무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현충사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건물 아래쪽 옆에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금송 한 그루가 있는데 왜 하필 일본특산 금송을 거기에 심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순신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사건
  
  선조 20년(1587) 10월 10일 북병사(北兵使)가 장계를 올렸다. "적호(賊胡)가 녹둔도(鹿屯島)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녹둔도 사건으로, 녹둔도는 두만강 가운데 있는 섬이다. 함경도에 주둔중인 병력의 병량 조달을 목적으로 선조 때 정언신(鄭彦信)의 건의로 토성을 쌓고 둔전을 설치해 주민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오가며 농사를 짓게 했었다.

  경흥부사 이경록과 인근의 조산포 만호 이순신이 추수를 하러 녹둔도에 들어간 사이 여진이 침입해 오는 바람에 적잖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43세의 이순신이 조산만호로 가게 된 데는 녹둔도가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기에 그만한 역량이 되는 이를 보내야 한다고 하여 가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부임하자마자 녹둔도의 방비가 허술한 것을 걱정하여 몇 차례나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에게 보고했었는데 매번 묵살하여 들어주지 않았었다. 그런 상황에 숫적인 열세로 여진의 침입을 맞았고, 나중에는 반격하여 포로로 잡힌 60여 명을 구해내기까지 했었다.

  당시 이일은 그렇게 이순신의 건의를 매번 묵살한 것으로 인해 자신에게 화가 돌아올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경록과 이순신을 죽이려 장계를 올린 것 이었다. 사실상 실록에서 이순신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다.

  선조 20년(1587) 10월 16일 선조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이일의 장계에도 불구하고 녹둔도 사건은 이경록과 이순신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해서 책임을 묻지 않고 근신의 뜻으로 백의종군을 명령한 것이었다.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은 1588년 1월 여진족을 급습 공을 세워 4월 다시 관직을 회복하였고 그로 인하여 이후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이순신 전라좌수사가 되다

  선조 22년(1589) 1월 21일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채용(不次採用-차례를 무시함)한다고 하자,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과 우의정 이산해(李山海) 두 사람이 이순신을 천거하고 있다. 당시 조정에서 정언신과 이산해의 위치가 어떠했던가를 감안할 때 이순신은 결코 미관말직의 이름 없는 무장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조 22년(1589) 7월 28일 선조가 이경록,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천거하라 하였다. 이것은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왜의 침략에 대한 대비였다. 이미 1587년부터 대마도주로부터 왜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여러 차례 있어 그에 대해 조선 나름으로 여러 가지 대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조선이 아무런 방비 없이 외침을 맞았다고 하는 오해의 빌미가 되는 통신사 역시 그러한 대비의 일환으로 일본에 대한 정보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고 보면 조선이 대비가 없어 초전에 그리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임진왜란이 있던 무렵에도 일본의 영토나 인구는 조선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정작 조선이 아는 일본이란 조선에 비해 한참 작은 변방의 섬나라에 불과했다. 물론 이것은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역시 조선을 자신들보다 더 큰 나라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고작 1만에서 2만 정도 쳐들어 올 것이라 예상한 것이 13만 7,200명이 밀려오고 있으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어쨌거나 흥미로운 것이 선조(宣祖) 자신이 이경록과 이순신을 채용하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언신과 이산해도 이순신을 천거하고 있었고 이경록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녹둔도 사건 때부터 그를 눈여겨보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좌의정 류성룡(柳成龍)도 적극적인 천거가 있었다.

  선조 24년(1591) 이순신을 크게 쓰기 위해 남쪽의 요해지로 보내 경력을 쌓게 하려고 했는데, 1590년 일본으로 갔던 통신사(정사-황윤길, 부사-김성일)가 돌아옴에 따라 사정이 급박해지면서 이순신을 바로 승차시켜 요해처의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선조 24년(1591) 2월 13일 선조는 진도 군수 이순신은 초자(超資-단계를 뛰어넘음)하여 전라도 좌수사(左水使)에 제수하라."고 명한다. 진도군수로 올렸다가 채 정읍현감에서 진도로 부임도 하기 전에 전라좌수사로 제수하게 되니,

  그야말로 정6품 현감에서 종4품 군수로, 다시 정3품 수군절도사로 6단계나 뛰어 넘은 파격승진을 하게 된 것이다. 선조 24년(1591) 2월 16일과 2월 18일 사간원에서 관직과 작위의 남용이라고 반대 했지만 선조는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이순신의 파격 승진은 유성룡 등의 천거보다는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과 강직한 인품에 있었다. 47살의 나이에 비록 종6품 현감이었지만 파직과 백의종군의 시련속에서도 무인의 올바른 강골로 일관한 삶이 있어 가능했다.


선조와 이순신의 갈등

  그러면 선조와 이순신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무얼까? 그것은 선조 자신이 왕이기 때문이었다.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지 않던가, 당장 조선만 하더라도 일개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지지자들을 끌어 모아 창업한 왕조이고 보면 한양을 버리고 도주한 선조 자신과 변변한 지원 없이 혼자의 힘으로 전란에서 나라를 지탱하고 있던 이순신은 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선조(宣祖)는 왕으로서 정통성이 취약했다. 원래 선조는 명종(明宗)의 아들이 아니었다.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이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로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6월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방계로서 왕위를 잇게 된 경우였다.

  이순신이 평생을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아무 일 없이 물러난다면 그 이상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가만히 있는다고 주위에서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는데다 그렇지 않아도 명성마저 왕의 권위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선조는 간첩 요시라에게 속아 1597년 2월 6일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잡아오게 했다. 이순신의 죄목은 1597년 3월 13일 “선조실록”에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하여 임금을 무시한 죄요, 적을 놓아주어 잡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요, 심지어 남의 공로를 가로채 남을 모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이다.

  이처럼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서 용서할수 없는 것이니 율을 상고하여 사형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였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이 선조의 말에 동조하지 않고 적극 구명하였다. 특히 우의정 정탁(鄭琢)이 명장을 이대로 죽일 수는 없다고 선조에게 신구차(伸救箚)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목숨을 건져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괴롭힌 악당 역을 맡게 되기는 했지만 사실 원래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수사의 자리에까지 올린 것은 선조 자신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라고 하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이순신을 앉힌 것도 선조 자신이었고, 그러면서도 또한 왕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위험한 정적이기도 했던 이순신을 잡아들여 죽이려 했던 것도 선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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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생마 2008.03.26 16:51
    장군님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입니다.
    어디서 이런 깊은 역사이야기를 담고 계신지
    참 대단하십니다.
    장군님의 이야기 계속 기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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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8.03.29 08:17
    백의종군으로 수차례 인내의 삶을 겪으며 나라를 구한 성웅의 이야기는 읽을 수록 가슴이 훈훈합니다 좋은 자료로 올려주시는 열정에 감사,계속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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