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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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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산행일시:2006년 09월 24일
ㅇ산있는곳:경남 함양
ㅇ산행코스:추성주차장-선녀탕-청춘홀-칠선폭포-대륙폭포-마폭포-천왕봉-제석봉-장터목산장-한신지곡(장군바위-내림폭포-천령폭포)-가내소-백무동
ㅇ산행시간:Am 05:00시 ~ Pm19:20시

<주요시간기록>
ㅇ05:00시-추성주차장에서 산행시작
ㅇ06:15시-선녀탕, 옥녀탕
ㅇ07:30시-청춘홀
ㅇ07:50시-대륙폭포
ㅇ10:50시-마폭포
ㅇ12:00시-칠성8,7km, 천왕봉1,0km표지목
ㅇ13:40시-천왕봉
ㅇ15:30시-장터목산장
ㅇ15:45시-한신지곡으로 듦
ㅇ16:10시-장군바위
ㅇ16:40시-내림폭포
ㅇ17:10시-천령폭포
ㅇ18:10시-가내소
ㅇ19:20시-백무동에서 산행마침, 택시로 추성주차장.

"참, 별이 많으니 별 볼일 많네요"
88도로의 지리산휴게소에서 너무나 이른 아침을 먹기 위해 차에서 내리며 **에서 오신 * **님이 건네는 말씀에 하늘을 올려다 본다. 어쩜 저리도 별이 많고도 많은지.
새벽 네시쯤의 밤하늘에는 온통 별들이 넘쳐난다. 별들은 그 많음도 그러하려니와 어찌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 영롱함에 한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하게 만든다. 게 눈감추듯 후다닥 아침을 떼우고 한 참을 더 달려 추성의 주차장에서 산행준비를 마치고 걸음을 시작할 때도 별들은 하늘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아직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산골동네는 적막하기만 한데 우리 일행 네명의 발소리에 부지런한 개 한 마리가 몇 번인가를 짖어대더니 이내 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고요한 새벽이 이어진다. 휭 하니 소슬한 가을바람이 찾아오니 싸늘함이 느껴지고 민가 사이로 이어지는 동네길을 돌아 사릅재에 올라서니 땀방울이 이마에서 송글거린다.


(칠선폭포...사진은 지난 6월 17일에 촬영한 것임)

부지런한 두지동의 어느 민가에는 훤하게 밝혀진 백열등이 가을 바람에 흔들거리고 그 불빛에 호두나무의 그림자도 덩달아 춤을 춘다. 마른 호두나무 잎사귀 하나가 발등 위로 살포시 내려 앉음을 보며 빠르게 찾아온 산골의 가을에서 멀어져간 여름의 뒤꽁무니를 돌아다 본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고 철다리의 중간 쯤에 서서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흘러가는 칠선골의 거친 숨소리를 듣는다. 어느 때보다 계곡에는 풍부한 물이 흐르고 있음을 랜턴의 불빛은 보여 주고 있었다.

이마에 매달려 있던 헤드랜턴 불빛을 죽인 곳은 선녀탕이었다. 물가의 암반에 앉아 투영되는 계곡의 바닥을 내려다 보며 잠시 숨고르기를 한다. 이런 새벽의 산골짜기 계곡은 참으로 여유로우며 도대체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케 한다. 계곡의 우측으로 나무계단 길은 계속되고 예전의 오솔길 같은 산길은 이제 추억으로나 떠올릴 일이다.

칠선폭포에 내려서며 20분간의 휴식을 생각했었지만 슬며시 찾아드는 오한 때문에 10분 여만에 자리를 털 수밖에 없었지만 칠선폭포는 어느 때보다도 멋진 모습과 우렁찬 포말음으로 새벽 걸음을 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이제 또다시 이 칠선에 발을 들여밀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를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며 아쉬움으로 뒤돌아 본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칠선폭는 한치의 변함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줄기찬 흐름짓을 계속하고 있다.

10시 50분인데도 마폭포에는 햇빛이 들지 않는다.
하여 물보라는 더욱 차게 느껴지고 물병을 채우는 손가락은 금새 아려오니 본디 차거운 계곡수가 깊어가는 계절의 탓으로 그 강도를 더욱 높였음이리라. 마폭포의 표지판을 밀어내고 부터 걸음은 터벅거리고 속도는 자꾸만 느려지니 스스로의 위안을 삼고자 한마디 던지듯 건넨다. 일찍 간다고 누가 상 주는 것도 아니고...
천왕봉을 1km 남겨둔 표지목에서 배낭을 내려 놓고 제법 긴 시간을 보낸다. 건너 중봉에는 가을 빛이 내려서며 한껏 고혹적인 단풍의 빛 잔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 정말 이제는 가을이구나!
가을은 이렇듯 무심으로 다가서는 듯한데 무슨 연유로 마음 가득 풍랑을 이르키게 하는 것인지...저 빛깔이 더욱 붉어지고 검붉어진 잎사귀가 늦가을의 쌀쌀함을 견디다 못해 온 밤을 인고하다가 이른 새벽녘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잎사귀에 떡가루 같은 하얀 소리가 지천으로 내려 앉을텐데...


(단풍 빛깔이 고와지고 있는 중봉...칠선골의 막바지인
19번 표지목을 지나 철계단에서 바라본 모습)

올라선 천왕봉!
오랜만에 빈 공간이 많아 표지석도 담아본다.
이만큼 산행객이 적은 것도 천왕봉에서는 흔치않는 일이니 지리산을 제대로 보호하려면 비지정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탐방객의 효율적인 운영부터 검토해 보라 말하고 싶다. 지금 지리의 주능선에 올라보라. 과연 산길인지 고속도로인지...정녕 보호하고 휴식을 필요로 하는 곳은 주능선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니...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하늘로 또 한가닥의 수평선이 길다랗게 펼쳐져 있다. 신비스런 모습의 구름 띠가 아스라한 하늘금 위로 또하나의 선을 그리며 하늘을 가르고 있다.
하늘은 푸르다.
바람결은 시원했고 코끝을 파고드는 상큼한 산 향기는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막바지의 산오이풀, 구절초, 쑥부쟁이, 그리고 용담은 푸른 가을 하늘 아래서 제 모습 빛내기에 여념이 없으니 이 가을은, 지리의 가을은 그저 황홀하기만 할 뿐이다.
그대, 잠 깨여 오라. 이 황홀한 지리로...


(구름 띠가 신비롭게 펼쳐진 모습을 보여 주었던
천왕봉에서 산객들을 삐집고 담았다)


(가을이 물들어 가고 있는 기암의 천왕봉 주변 모습)

올라선 칠선골을 내려다 보는 나의 곁에서 사십은 넘겼으리라 짐작되는 한 사내가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한마디 건넨다. 저곳이 칠선계곡인데 저기 잘못 들면 죽는다. 어찌나 계곡이 길고 험하던지 하루종일이 걸린다고. 그렇지만 지리산에서는 최고로 좋은 곳이다 라고.
"그럼 가 봤어?"  "......"

내려다 뵈는 칠선골짜기는 유순하게만 보이는데 저 골짜기에는 걸려있는 폭포만 하드라도 헤아릴 수가 없도록 많다. 칠선폭포, 삼단폭포, 대륙폭포, 마폭포,...어쩌다 운 좋게 이름하나 얻었을 이 폭포들은 그야말로 칠선골짜기에서는 무명의 폭포들과 견주어 돋보임이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더하여 은근한 멋을 안겨주는 그 많고 많은 소(沼)들은 또 어떻고...


(천왕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올라온 칠선골 모습, 유순하게만
보이는 저 골짜기에 온갖 것들이 들어차 있다)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지리산이라는 그 인연으로...지리산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두고도 이름 석자마저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단지 지리를 좋아했다는 연유만으로...산이 좋아, 산에 다니다가,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지리산에서...

지난 해의 10월 9일!
사람들이 밤을 보내는 산 아래 마을이야 한창 가을 속이었던 그 날의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는 서서히 가을은 떠나가고 있었다. 찾아오던 때 아무런 기별없이 다가섰던 것처럼 가을은 그렇게 이별을 하고 있었었다.
그 날, 헐떡거리며 올라섰던 통신골에는 자욱한 안개와 개스 때문에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었지만 마지막 로프를 잡고 올라섰던 통신골의 상단 암릉 위에서 그 아름다움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산이 그토록 아름다울수 있다는 것도, 가을이라는 계절이 그처럼 잊혀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통신골의 만추는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주체 할 수 없는 황홀함으로...
그 날처럼 또 가을이 다가서고 그 통신골을 다시 내려다 본다.가을은 속절도 없이 깊어만 가는데 저 통신골은 또 언제나 가볼 수있을 것인지...


(통신골의 상단부에도 가을빛은 역력하다)


(지난 6월 17일의 모습)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암릉위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은채 일출봉능선을 바라보는 어느 산꾼에게서 시선이 멈춘다.  그의 머리위로 가을 날의 햇볕은 쏟아져 내리고 그 온기 넘치는 햇볕에 가을은 무르 익는다. 무엇을 생각하는지...아니면 또다른 그 무엇을 그리워 하고 있는지...


(어느 산꾼)


(황금능선과 구름 띠)

이제 내려 가야할 시간, 이미 세명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걸음을 재촉하지만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 가을 산에서...건너 보이는 제석봉의 확연한 가을 빛깔이 발걸음을 붙잡고 만다. 아직 만산홍엽은 못 되었지만 제석봉에는 이미 가을은 깊숙히 들어와 머물고 있었다. 불이 붙은 듯 산은 붉은 색으로 덧칠해 가고 그 붉음 속에서 구상나무, 가문비나무의 푸르름은 한층 더 푸르러 보이니 이 빛깔의 어우러짐에서 신명나는 계절의 잔치를 엿보는 달콤함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통천문의 바위에서 바라본 제석봉의 가을빛)


(통천문에서...피빛이었다)

통천문을 내려서고 그늘을 찾아 자리를 펴 늦은 점심을 챙긴다. 금새 그늘은 사라지고 9월의 따끔거리는 햇빛이 심술을 부려도 즐거울 뿐이다 우리는...지나가는 산객에게 점심을 권하는 *선배님에게 짖궂은 농담을 건네는 맛도 또다른 즐거움이니 "선배님!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정말로 먹겠다고 자리 꿰차고 들면 어떡합니까?"
9월의 하루는 그렇게 익어가고 나누는 정담 속에서 가을은 토실토실 영글어 간다. 당초 들기로 했던 초암릉은 타의해 의하여 포기되어 지고 **의 젊은 산꾼인 ***님과 의기투합하여 한신지곡을 목적으로 배낭을 꾸린다.
단풍 속을 걷는다.
온 세상이 붉게 보인다. 모두가...심지어 푸른 나뭇잎사귀 마저도 붉게 보이니 참 환장할 지경이다.


(물들어 가는 단풍 사이로 제석봉을 오르는 사람들)

어찌 단풍 뿐이랴!
때늦은 구절초도, 보랏빛 색깔고운 용담도 지천으로 만발하여 꽃향기를 바람에 휘날린다.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려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 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 높이에서 핀다
(복효근/당신이 슬플때 나는 사랑한다 중 용담꽃)


(용담(龍膽)꽃---용의 쓸개라는 꽃이다.
"새벽으로 깨어나는/산 모퉁이/ 시간이 비껴간
故死木 그림자에/슬쩍 기대어 하품하듯
잎새를/쳐드는 용담꽃/작은 꽃술/사이로
툭, 툭/떨어지는 진보랏 빛 흰 이슬방울
아침이/그만 멈추어 선다")

바람 심한 제석봉에는 들풀들이 눕는다.
벌써 누렇게 퇴색한 들풀들은 한껏 키를 낮추고 몰아칠 시린 바람을 대비한다. 한 겨울 눈보라와 몰아치는 제석봉의 강풍은 송곳 같아서 참으로 좋다. 멀리 소백산의 겨울 바람이 좋은 것은 매섭기 때문이니 이 제석봉의 바람 또한 소백산의 그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메말라 버린 고사목의 잔해 사이로 가을꽃이 한들거리고 이제 한창 성장에 채찍을 가하는 어린 나무에서 훗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진한 숲속을 그려본다. 그때 쯤 어느 가을 날, 오늘 우리들 처럼 제석봉을 지나는 산꾼들에게 들풀들이 키를 낮추는 이야기는 전설같은 이야기로나 전해지길 바라면서...


(제석봉에는...이미 여름 빛깔이 퇴색하고 성큼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이제 올해의 겨울에도 어김없이
드센 바람이 찾아오겠지)


(쑥부쟁이가 누렇게 변한 들풀들의 사이를 헤집으며
가을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제석단에도 들르지 못하고 도리없이 장터목으로 간다.
캔커피로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훌쩍 울타리를 넘는다. 뒤따르던 등산객 두어명이 우리를 따른다. 어, 이게 아닌데...적당한 구실로 이들을 밀어내고 보드랍고 푹신거리는 내림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숲은 우거져 한치의 햇빛도 들지 않지만 마음 바쁜 탓이지 배낭에 매달린 땀 수건은 홍건하게 젖어 마를 틈이 없다.

그러니까 기억을 떠올려 보니 아마도 20년도 훨씬 더 지난것 같다. 처음으로 한신지곡에 발걸음을 이은 것은...
그 때도 가을이었는데 장터목산장에서 이 곳의 한신지곡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지금이야 한신지곡은 발길을 묶어 놓은 곳이지만 그 때에는 여늬 산길처럼 무시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다니기 좋을 만큼의 산길이 열려있었고 지금도 기억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수북히 쌓인 신갈나무 잎사귀였다. 따스한 햇빛에 적당히 달구어진 나무잎사귀는 바삭거리며 부서졌고 그 소리에 얼마나 정감이 끌리던지 일부러 낙엽쌓인 곳을 찾아서 걸었었다.


(한신지곡은 짙은 숲 길로 시작되어 수많은 폭포들의
향연을 펼친다)

천령폭포의 상단 바위에 앉아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를 바라보며 알 수없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면서 한신지곡에 나의 족적을 남겼었던게 엊그제의 일처럼 새록새록 떠오름을 느끼며 장군바위에 도착한다.
장군바위의 드넓은 바위 광장에 앉아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저멀리 서북능선을 바라보며 마음은 또 서북능선을 걷고 있다. 벌써 시간은 4시가 넘었고 산행을 마치려면 아직도 세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니 발걸음을 재촉 할 수밖에 없다. 갑시다 라고 던지는 한마디에 모두들 배낭을 걸머매고 장군바위를 내려 계곡 속으로 빨려든다.


(장군바위에서 바라본 지리의 서북능선,
햇살이 참으로 화려했다)

이제 부터는 계곡의 멋진 모습이 차례로 펼쳐진다.
이름을 못 얻어서 그렇지 다른 계곡의 이름난 폭포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무명의 폭포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옥수는 계곡을 휘돌며 아름답고 영롱한 소리를 토해낸다. 숲은 짙어 하늘을 감추고 이따금씩의 햇빛은 한줄기 섬광이 되어 계곡의 이곳저곳을 훑으니 그 빛을 받은 계곡은 반짝거리며 가을 날의 오후를 즐기고 있다. 때때로, 곳곳에서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는 깊은 숲속의 삼라만상에 미안함 마음이 드는 것은 이어지는 고요를 깨뜨리는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 때문이다.

시원스레 쏟아져 흐르는 내림폭포의 물줄기에서 시간의 촉박함을 탓하며 도리없이 신발의 끈을 조여맨다.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폭포도 스쳐 지나가고 새하얀 물보라는 쌉쌀한 생맥주의 거품처럼 상큼하게 계곡으로 피어 오른다.


(한신지곡의 내림폭포)

17시 10분!
이제 한신지곡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천령폭포에 도착했다. 직벽의 거대한 폭포는 수직으로 낙하하는 폭포수로 굉음을 토해내고 폭포 아래의 돌덩이에 주저앉은 산객에게 알싸한 냉기를 아낌없이 퍼부어 준다. 햇볕이 작열하는 어느 여름 날, 텐트 하나 걸머지고 이 폭포 아래 편한 곳에서 한 열흘 쯤 푹 머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고 아직은 분에 넘치는 호사도 그려 본다.

천왕봉에서 대할 수 있었던 고와지는 단풍 빛깔은 이 곳에서는 소식도 없다. 대신 우거진 진한 녹음이 늘어지고 그 푸른 빛깔은 흐르는 물에 투영되어 한 폭의 수채화를 펼쳐 놓는다.다시 차마 옮기기 힘든 발길을 어쩔 수없이 떼어 놓는 것은 아직도 두 시간여를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시 새벽녘 밝히고 올랐던 헤드랜턴을 또다시 켜야 할 것이므로...


(어찌 한신지곡에 내림폭포, 천령폭포 뿐이랴?
운 좋게 이름을 얻었을 뿐...)

지리, 도대체 어느 한 곳이 수월하거나 만만한 곳이 없음을 그동안의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이 곳 한신지곡의 내림길도 만만치 않은 곳이다. 행여 한신주곡의 등산로가 아닐까 하는 숱한 기다림을 오래동안 외면하며 지곡의 계곡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뉘엿거리는 가을날의 햇살에 반짝이는 조릿대 숲길도 몇 번인가를 스쳐지나고 아름드리 구상나무 터널을 지나면서 바람소리도 듣는다.

그리고, 가내소의 나무계단을 내려서며 두 시간 반동안 빠져있던 한신지곡에서 시원함과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며 표지판 앞의 바위 위에서 잠깐의 휴식을 갖는다.


(가을 그림자 하나)

느릿느릿 기어오던 땅거미가 어느새 사방을 에워싸고 산길에 깔린 돌덩이가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긴 시간 다시 랜턴을 이마에 얹는다. 다시 이 세상은 랜턴의 불빛 만큼이나 작아지고 둥근 모습으로 변했다.
오늘은 9월의 24일이고 높은 봉우리 중봉, 천왕봉에는 점차 단풍의 빛깔이 고와지고 있다. 이제 가을은 더욱 빠르게 내달릴 것이고 머잖아 장당골 골짜기에는 낙엽이 수북히 깔릴 것이다.단지 산이 좋은 까닭만으로 만난 오늘의 인연은 접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추성까지 가는 택시 속에서 때늦은 저녁식사를 이야기 하지만 **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고와지고 짙어지는 단풍 빛깔, 깊어지는 가을, 못다만든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
그러나 이 구월이 멀어져 가고 시월이 다가와 있을 때 우리는 오늘처럼 또다시 하루의 인연을 접는 뜨거운 악수를 나누기로 마음을 나누었다.  그 깊고 깊은 골짜기, 너무나 아름다운 단풍의 그 골짜기에서 또다른 가을의 전설을 만들 것을 기약하면서...(가을바람)
  • ?
    슬기난 2006.09.28 19:40
    힘들게 오르며 쳐다본 천왕 단풍에 가슴이 벌렁거려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가을바람과 함께 오랫만에 접하는 산행기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시 뵈니 더욱 더 반갑습니다.
  • ?
    오 해 봉 2006.09.28 22:50
    주요 시간기록을 보고는 깜짝 놀랐드랍니다,
    우리팀보다 먼저 올라간분이쓴 산행기인줄 알았답니다,
    자세히 읽으며보니 미소가 지어드군요,
    전주에서 22:30분에 출발한 버스는 01:30분에 인천에도착 하드군요,
    송동선이네 수정엄마덕에 20분도 안되어 편안히 집에 왔답니다,
    저녁은 전주에서 뛰어다니는 놈으로 둘이만 잘먹고 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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