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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길의 텃세

제2절 묘지 옆에 쪼그려 앉아 먹는 화려한 오찬

 

모전 마을에 도착해서부터는 임천을 따라 뻗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걷

는다. 양지바른 곳에는 매화나 산생강, 산수유가 소녀의 첫 화장처럼 수

줍은 색조를 띠는 곳도 있다. 중앙선도 없고 그렇다고 일방통행도 아닌

길을 걷는데 하천방향 안전벽 아래 개구리들의 사체가 적잖이 눈에 띈

다. 성급한 놈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복 중의 복

은 시복(時福)이라고. 때를 잘 타고나야 한다. 우리도 철 모르고 땅을 박

차고 나온 저 개구리 신세 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한다.

 

고갯마루를 바로 넘어서니 구시락재. 뭐라고 잔뜩 주석을 단 간판이 서

있는데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정자가 있고 수도꼭지도 있는데 물은

나오지 않지만 여름에는 제법 한 몫하지 싶다. 오늘은 연습이다. 발생 가

능한 모든 상황을 가급적 초기에 미리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 아침에 식

당 앞 가게에서 준비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다. 아침밥을 먹은 돼지국

밥 집에서 웃돈 2천원을 주고 얻어(?) 온 밥과 김치. 오늘의 점심 메뉴다.

기온은 낮고, 바람은 세차고 물은 도대체 끓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딱

히 바람을 피할 장소도 보이지 않고. 배낭 세 개와 작지 않은 덩치 셋이

쪼그려 앉아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생각보다 코펠이 크다. 짜게 먹지 않

으려고 스프는 두 개만 넣었는데 화력이 부족하니 면은 불어 터지고 싱겁

기까지 하니 영 아니다. 집에서 이렇게 끓였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보통

남이 만든 음식은 왠만하면 안 먹고, 내가 만든 음식은 왠만하면 군말 없

이 먹는다. 철칙이다. L한테 양지바르고 바람 없는 곳을 찾으라니 길 건

너 묘지가 제격이란다. 50대 초반의 남자 셋이서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

아 라면을 먹는 모습을 지금 상상해 보면 천생 상거지 꼴이었지 싶다.

 

길을 재촉해 오늘 시작한 제 4구간의 종점인 동강을 지나 6.25 당시 국

방군의 손에 학살된 산청 함양 지역의 양민 희생자 추모공원까지 간다.

피아(彼我)의 구분이 어려웠던 아니 구분하기 싫었거나 아니면 그런 세

심함이 무시되었던 상황이 빚은 한국 근대사의 큰 흉터다. 예의 이곳에

도 유홍준이 “뽈대”라 묘사한 웅장한 조형물이 있고 경내는 비교적 잘 관

리되어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모두 같은 모양, 크기의 평장묘다.

그런데 오른쪽 중턱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봉분이 하나 보인다. ‘이런

곳에서도 차별이 있단 말이야. 도대체 어떤 고관대작이 누워 있길래…’

흥분된 걸음으로 도착하니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분들의 유골을 한곳에

다 모셨단다. 훌륭한 발상이다. 이런 노력과 배려가 이 땅에 건전한 시

민을 만들어 낸다.

 

예약한 민박에 전화를 건다. 이후 계속 반복되는 행동이다. 전날 밤 또

는 당일 점심 전까지 당일 숙소를 예약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전화를 걸

어 위치를 확인한다. 총 12박 중 친구 부모님께서 기거하시던 곳과 친구

외삼촌댁을 이용한 이틀을 빼더라도 열 곳의 민박은 확연히 다른 모습

이다. 신기할 정도로 다르다. 규모, 분위기, 시설 등등. 이곳은 상당히

넓은 부지에 세 채의 독립된 펜션과 5~6개의 방과 공동 화장실, 샤워장

이 있는 민박동 그리고 별도의 식당 건물이 있다.

 

약간의 안주와 막걸리를 청하니 따로 안줏거리는 준비된 게 없고 저녁

을 빨리 준비하시겠단다. 방에 들어가니 바닥이 얼음장이다. 아마 우리

가 금년 첫 손님이 아닌가 싶다. 여행 전 정보 수집 차 이곳저곳에 문의

했을 때 한 이틀은 불을 때야 하니 난방비로 7만원을 추가로 달라고 하

는 집도 있었다. 돼지고기를 잔뜩 넣은 김치찌개와 손수 만드셨다는 도

토리묵 그리고 산채 나물들로 차린 저녁 밥상에서 막걸리 서너 통을 비

우고 등은 뜨겁고 얼굴은 시린 방 - 피리 부는 사나이 - 에서 지리산 둘

레길 도보 여행 첫날 밤을 보냈다.

 

얼떨결에 후다닥 나선 길. 매서운 날씨에 숙취마저 남은 상태로 몰아 붙

여 그것도 긴 우회로를 자처하는 바람에 비록 길을 잃은 맹인처럼 안내

견 - 지원 센터 -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럭저럭 대과 없이 하루를 마쳤

다. 첫날은 가볍지도 그렇다고 그리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경험을 했다.

필요한 수준의 긴장과 이완. 첫날의 이런 경험이 결국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큰 기초가 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니 큰 행운이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이 일을 도모했을 때 몇몇 친구들이 그런 농담을 했다. 동행하는 두 친

구는 완전히 낚였다고. 이 추운 날씨에 별 준비도 없이 나한테 넘어가

얼떨결에 끌려가니 고생바가지라고. 그 때 나의 답. “그래 나는 피리 부

는 사나이다. 쥐가 따라오는지 아이들이 따라오는지 나는 모른다. 그냥

피리만 분다.”

 

그림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쥐 떼를 몰고 간 피리 부는 사나이에 빗대서

한 말이다. 그런데 첫 날을 보낸 방의 이름이 묘하게도 ‘피리 부는 사나

이’다. 대단한 우연이다. 다른 방 이름 중에는 ‘긴 머리 소녀’도 있었다.

이 책은 유명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사진이 포함된 원고는 페이스 북 '백수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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