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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쉰 흔적, 마디!

 

사노라면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슬픈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강도가 심한 경우를 시련이라 부른다. 시련이라고 부를 정도면 보통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흉터를 남긴다.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부스럼이 많이 생기는 체질이었다.

그 때의 흉터 십 수 개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특히 머리에는 선친께서 이태리 타월로 직접 시술하여 남긴 100원 동전 크기의 흉터가 남아 있다.

아직은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 있지만 정말 노인이 되면 더 이상은 숨기기 곤란하지 싶다. 내 머리의 흉터처럼 시련이 남긴 제대로 된 흉터는 어디엔가 숨어서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다.

 

나에게는 이 물리적 흉터를 빼면 달리 뚜렷한 다른 흉터는 없지 싶다.

얼마 전 25살 아들에게 내가 살아온 이력 중 아주 잦은 이사 – 태어나서부터 27살에 독립된 가정을 가질 때까지 기억하는 것만 15회다 – 의배경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의 눈가가 약간 젖어 드는 걸 보았지만 정작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에게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을 따름이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지나 간 것은 지난 간 대로 의미’만 있다.

 

처음 백수가 되었을 때 오대산 월정사에서 경험한 죽음보다 무거운 새벽의 적막이나, 영하 20도를 밑도는 시카고 시가지의 살을 찌르는 추위와 아침 식사 비용 5달러를 아끼기 위해 냉장고와 전자오븐이 있어 3달러를 더 주고 2주 넘게 머물렀던 35달러짜리 모텔에서 혼자 지낸 주말의 그 긴 낮 시간, 시카고에서 양로원 할머니에게 꽃을 배달하고 받은 팁 1달러 지폐를 손에 들고 계단에 걸터앉아 깊이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던 일. 이 것들 역시 이제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을 따름이다. 자랑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냥 그런 일!

 

속이 텅 빈 대나무가 곧게 높이 자랄 수 있는 건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그렇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이런 마디들이

없다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티어 내겠는가? 그래서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 늘 웃음을 앗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다음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기도 하고 또 지나치게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마취효과도 있다.

 

지리산 둘레길이 언제 어떻게 나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2011년 STX복지재단에 근무하면서 경상남도 내 보육시설 - 보통 고아원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다. – 에서 생활하는 중고등학생 여름캠프 후원 조건으로 지리산 둘레길 1개 코스를 걷는 것을 제시했으니 아마 그 즈음 정보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 싶다. 2012년에야 전체 구간이 완성되었으니 전체 구간이 채 완성되기도 전의 일이다. 그 때는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에서 조직생활 20 여 년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정작 내가 2015년 3월 이 길을 걷겠다고 나선 것은 어쩌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수준의 생산활동을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던 시점이었으니 이것도 묘한 대비다.

 

다른 측면에서 이 여행길이 일종의 도피가 아니었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렵다. 2016년 2월 사실상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에게 당분간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가장(家長)으로서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중학교 입학 전년인 2003년 10월 처음 직장을 잃었고 그 때 초등 6학년이었던 아들은 어느 중학교에 배정되었는지도 조차 무작정 이민을 꿈꾸던 아비에게 끌려 온 미국에서 전화로 확인해야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2007년 4월에 세 번째 실직을 했다.

이후 만 365일을 쉬었으니 나를 닮아 늦은 사춘기를 겪은 그에게 적잖은 고통이었지 싶다. 2013년 대학 입학 후 바로 군에 입대했으니 2016년이 사실상 입학이라 이런 맞물림도 징크스라면 징크스다.

그러니 대학원은 말려야겠다.

 

삼 세 번을 넘어 네 번이나 겪었으면 웬만큼 익숙해졌으련만 가장으로서의 무게는 늘 다르지 않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고지서가 날아온다. 자격과 기준이 바뀌었고 납입연기 가능하단다. 건강보험료 고지서도 날아온다. 집사람은 월급 받을 때보다 많다고 한 마디 거든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인터넷에 등록하고 온라인 강의를 듣는데 돈을 준다는데도 이런 짜증이 없다. 이렇듯 신분이 변했다는 신호는 도처에서 무시로 날라 온다. 한 달 정도 경과하면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지난 세 번의 경험을 통해 잘 안다.

그래서 이 때쯤 새로운 정신무장이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설계,

지나간 시간의 반추, 자연 속에서의 깨달음. 사실 이런 거창한 의도보다는 잠시 현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세상이 나에게 보내는 성가시면서도 명확한 신호의 강도를 좀 줄여 줄 무엇이 필요했다. 육체를 혹사시키면 다른 감각은 둔해진다. 그러면서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고 육체는 건강해지니 이보다 나은 선택은 없다.

니체의 산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애플의 창업자도 걸으면서 담소 나누기를 즐겼다고 한다. 2006년 30년을 피운 담배를 끊으면서 뛰기 시작해 1년 반 정도 뛰었다. 지리산을 두 번 종주해 봤지만 그건 등산이라 한다. 그래 걸어 보자. 뛰지 말고, 오르지 말고 걸어 보자.

 

나에게 몸과 정신을 주신 선친께서 1983년 군 입대 대기 중이던 나를 말없이 이끌었던 곳. 1986년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해 난생 처음 주먹을 휘두르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스스로에게 내린 벌을 짊어지고 혼자 일주일을 헤맸던 곳, 2014년 첫 종주 후 1달 반 만에 일자리를 얻은 효험이 있는 곳. 지리산을 걸어 보자. 지칠 때까지 미련하게. 그러다 보면 50여 년 모르는 사이 몸과 마음에 쌓인 노폐물을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겠다 싶었다. 모르는 채 외면하고 덮어 둔 것들이 썩어 악취를 풍기기 전에 처리하자 싶었다.

 

이 이야기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조금 백수 경험이 많은 어느 중년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다만 가급적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겉으로나마 아무 일 아닌 것처럼 태연한 척 살고자 했던 평범한 한 중년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지금 비슷한 상황에 있거나 아니면 향후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작으나마 용기나 위안이 된다면 더 없는 영광이겠다. 또 그런 시각으로 읽어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유명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사진이 포함된 원고는 페이스 북 '백수라서 다행이다'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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