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에 고향을 다녀와서
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여보소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스랴.
갖 괴여 익은 술을 갈건으로 받아놓고,
꽃나무 가지 꺽어 수 놓고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
정극인이 '상춘곡'(賞春曲)에서 읊은 그대로다.
하얀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4월,한강을 건너가니 물결은 동에서 흘러와서 하얀 안개 속에 금빛 아침놀 띄었다.
잠실 롯데호텔 너구리상 앞에 가니,진주행 대절버스가 우릴 기다린다.천지를 수놓던 화려한 벚꽃은 낙화되어 발 밑에 분분히 날리지만,라이락은 다시 향기롭게 피어나고 풀라타나스 수양버들은 연초록 잎이고,붉은 진달래 노란 개나리 한창이다.
고향 떠난지 40년.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어느새 60이다.야시도 죽을 때는 고향 쪽을 보고 운다던가?환갑 기념으로 전춘식 사장이 버스 식사 보험 등 여행경비 일체 부담 자청하여 뜻깊은 고향 방문은 이뤄졌다.뻐스 앞쪽에는 젊을 때 꽃보다 아름답던 미인들이 앉고,뒷쪽에는 은백의 영감들이 앉았다.
계룡산 돌아드니 덕유산이요,인삼랜드서 잠시 쉬고 남한에서 두번째 길다는 육십령터널 통과하니 지리산이다.산도 낮익은 고향산이요,물도 낮익은 고향물이다.
함양을 지나가니 강 옆에 민순식군 처갓집 양조장 보이고,곧이어 하륜대감 후손인 하종보군 고가(古家),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권재상군,최준석군 수십칸 고가(古家)가 곁에 있고,남명선생 후손인 조동석군 동네 지나니 경호강변 권순탁군 고가(古家)가 고풍찬란하다.
'우리 이제 서울 별볼일 없으니,여기 고가(古家)로 내려와 살까?'
'조오치!지리산 약초나 캐면서 초부(樵夫)가 되어...'
'자네 지게 질 줄 아나?'
'지게는 자네가 져라.군불은 내가 땔거마.'
천왕봉 밑 천석꾼 만석꾼 후손이 우리 동창이다.왜정 때 경남 도청(道廳)이 있던 진주는 경남의 중심지였다.경상우도 양반 법도(法度)가 우리 대에서 끝나가고 있다.
고교시절 우리는 '태양'이니,'파도'니 '알프스'니 하는 패거리가 있었다.누구는 '파도'였고,누구는 '태양'이었다고 그때 그 친구들 회상하며 그리워도 하고,대학시절 기차로 열두시간 걸리던 상경길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왜 입석(立席) 차표로 통일호 타면,의자 밑에 퍼질고 앉아서도 가고 선반에 올라가 자면서도 안갔나?'
'글세 말이야,우리 해방둥이 세대가 그 고생하며 지금처럼 편한 세상 만들었는데 요즘 젊은 것들 노인 대접 이래서 되것서?'
정동영이 꺼집어내고 씹는 새 진양호 상류 푸른 물결이 보인다.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간 곳 없다마는
내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해라.
유랑천리 십년만에 고향 찾아왔노라
마음을 재촉하며 달려왔노라.
남인수의 이 노래를 어릴 때 즐겨 불렀지만,정작 우리는 유랑천리 40년에 고향 찾아왔으니,촉석루는 의구(依舊)하고 남강 대숲은 아직도 푸르건만,그 강에서 물장난하고.대 베어 낚싯대 포구총 만들어 놀던 우리는 늙었다.
사천톨게이트에 가니,고려식품 구자연사장이 딸기쨈 등 자사 식품 한보따리를 직원편에 보냈고,부산서 공기업 사장하는 손부일군 부부가 합류하려고 차 세워놓고 손흔들고 있다.
진주 김영두 사장이 점심 준비해놓은 삼천포로 가니,180만평 규모의 공단이 들어서는 사천은 남해도를 잇는 연육교에 이어 다시 곤양 바다 위로 다리가 놓이고 있다.와룡산 아래 떡 버티고 선 큰 공장은 김영두군 타일공장이고,우측 용남 중고등학교 이사장은 최대림군이다.'공 자치기장'만들려고 40여만 평 사놓은 전춘식군 땅은 진주만 바다 건너 곤양 쪽이다.세월 많이 변했다.
삼천포 '장어탕'집에는 영두 종수 상욱이 종명이 대운이 등 그리운 진주 친구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서로 늙은 얼굴에 감회를 느끼며 반갑게 악수하고 모처럼 먹어보는 고향 소주맛이 좋다.
섬과 섬을 연결한 다리를 세개 지나가는 사천남해연육교는 그 자체가 장관이다.푸른 옥같은 물결 위에 작은 섬들도 많다.그 섬 하나 사서 사슴이나 키우며 살고싶은 생각은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이화웅사장이 년전에 섬 하나를 흥정하다 말았다고 한다.
남해도는 신록의 계절이다.동백 가로수는 꽃이 다 졌지만,산야를 온통 덮은 것은 하얀 조팝나무 꽃이다.조문래군이 그림같은 하얀 목조주택 지어놓고 민박집 하는 앵강만 물빛은 초록의 마노(瑪瑙)빛이다.서포 김만중이 귀양와서 '구운몽(九雲夢)'을 쓴 노도(櫓島)는 지척이다.
보리암 올라가는 주차장 아래 복곡지(福谷池) 면경같이 푸른 물에 비친 신록 속 활짝 핀 산벚꽃 희고붉은 자태는 한폭 수채화다.
경상도 할매 발음으로 '사타리버스' 타고 '보지암' 올라가니,눈앞에 일망무제로 펼쳐진 바다 속에 섬은 좌청룡 우백호 풍수 이루고 뻗었고,바다 가운데 안산(案山) 거북섬은 터억 놓여 상주해수욕장 백사장을 마주보고 있다.이태조가 여기서 기도했다는 기돗빨 센 이곳을 노치겠는가?함께 온 미인들이 다투어 불전함에 돈넣고 백팔배 올린다.
제약회사 사장하던 박홍식군 제의로 상주해수욕장 백사장에 가서 '나 잡아봐라!' 하기로 했는데,막상 백사장에 가니 영감들이 싱급게 웃기만 한다.그러나 진주 사람 누군들 왕년에 여기서 데이트 한번 안한 사람 있던가?솔밭에서 추억담 나누었다.
미조에서 삼동면 돌아가는 코스를 '동양의 나포리'라 부른다.같은 바다건만 유독 이 바다는 왜 이리 맑고 푸른가?여기 바다와 섬 보느라니 어느새 마음도 맑고 푸러러진다.이 중에 물건은 '물건리' 방조림(防潮林)이다.오직 바다 풍광 좋았으면 파독 광부 간호원들이 귀국하여 별장촌 만들었을까.산 위에는 하얀 목조주택 많다.여기 어디 북에서 내려온 김만철씨가 산다고 한다.탄소동위원소로 년대를 추정하여 천년 전이라는 판결 나온 지족의 멸치잡이 죽방렴을 구경하고,삼천포로 나와 여행 끝을 푸짐한 회맛으로 마무리 지었다
물맛도 고향 물맛은 다르다 하지않았던가?삼천포 우렁쉥이 개불 해삼맛은 어떻던가?우럭 도다리 도미 등 본격 회(膾) 나오기 전에 우리 모두 이 삼천포 음식에 삐용! 가버렸다.어릴 때 입맛이 한없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여보소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스랴.
갖 괴여 익은 술을 갈건으로 받아놓고,
꽃나무 가지 꺽어 수 놓고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
정극인이 '상춘곡'(賞春曲)에서 읊은 그대로다.
하얀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4월,한강을 건너가니 물결은 동에서 흘러와서 하얀 안개 속에 금빛 아침놀 띄었다.
잠실 롯데호텔 너구리상 앞에 가니,진주행 대절버스가 우릴 기다린다.천지를 수놓던 화려한 벚꽃은 낙화되어 발 밑에 분분히 날리지만,라이락은 다시 향기롭게 피어나고 풀라타나스 수양버들은 연초록 잎이고,붉은 진달래 노란 개나리 한창이다.
고향 떠난지 40년.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어느새 60이다.야시도 죽을 때는 고향 쪽을 보고 운다던가?환갑 기념으로 전춘식 사장이 버스 식사 보험 등 여행경비 일체 부담 자청하여 뜻깊은 고향 방문은 이뤄졌다.뻐스 앞쪽에는 젊을 때 꽃보다 아름답던 미인들이 앉고,뒷쪽에는 은백의 영감들이 앉았다.
계룡산 돌아드니 덕유산이요,인삼랜드서 잠시 쉬고 남한에서 두번째 길다는 육십령터널 통과하니 지리산이다.산도 낮익은 고향산이요,물도 낮익은 고향물이다.
함양을 지나가니 강 옆에 민순식군 처갓집 양조장 보이고,곧이어 하륜대감 후손인 하종보군 고가(古家),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권재상군,최준석군 수십칸 고가(古家)가 곁에 있고,남명선생 후손인 조동석군 동네 지나니 경호강변 권순탁군 고가(古家)가 고풍찬란하다.
'우리 이제 서울 별볼일 없으니,여기 고가(古家)로 내려와 살까?'
'조오치!지리산 약초나 캐면서 초부(樵夫)가 되어...'
'자네 지게 질 줄 아나?'
'지게는 자네가 져라.군불은 내가 땔거마.'
천왕봉 밑 천석꾼 만석꾼 후손이 우리 동창이다.왜정 때 경남 도청(道廳)이 있던 진주는 경남의 중심지였다.경상우도 양반 법도(法度)가 우리 대에서 끝나가고 있다.
고교시절 우리는 '태양'이니,'파도'니 '알프스'니 하는 패거리가 있었다.누구는 '파도'였고,누구는 '태양'이었다고 그때 그 친구들 회상하며 그리워도 하고,대학시절 기차로 열두시간 걸리던 상경길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왜 입석(立席) 차표로 통일호 타면,의자 밑에 퍼질고 앉아서도 가고 선반에 올라가 자면서도 안갔나?'
'글세 말이야,우리 해방둥이 세대가 그 고생하며 지금처럼 편한 세상 만들었는데 요즘 젊은 것들 노인 대접 이래서 되것서?'
정동영이 꺼집어내고 씹는 새 진양호 상류 푸른 물결이 보인다.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간 곳 없다마는
내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해라.
유랑천리 십년만에 고향 찾아왔노라
마음을 재촉하며 달려왔노라.
남인수의 이 노래를 어릴 때 즐겨 불렀지만,정작 우리는 유랑천리 40년에 고향 찾아왔으니,촉석루는 의구(依舊)하고 남강 대숲은 아직도 푸르건만,그 강에서 물장난하고.대 베어 낚싯대 포구총 만들어 놀던 우리는 늙었다.
사천톨게이트에 가니,고려식품 구자연사장이 딸기쨈 등 자사 식품 한보따리를 직원편에 보냈고,부산서 공기업 사장하는 손부일군 부부가 합류하려고 차 세워놓고 손흔들고 있다.
진주 김영두 사장이 점심 준비해놓은 삼천포로 가니,180만평 규모의 공단이 들어서는 사천은 남해도를 잇는 연육교에 이어 다시 곤양 바다 위로 다리가 놓이고 있다.와룡산 아래 떡 버티고 선 큰 공장은 김영두군 타일공장이고,우측 용남 중고등학교 이사장은 최대림군이다.'공 자치기장'만들려고 40여만 평 사놓은 전춘식군 땅은 진주만 바다 건너 곤양 쪽이다.세월 많이 변했다.
삼천포 '장어탕'집에는 영두 종수 상욱이 종명이 대운이 등 그리운 진주 친구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서로 늙은 얼굴에 감회를 느끼며 반갑게 악수하고 모처럼 먹어보는 고향 소주맛이 좋다.
섬과 섬을 연결한 다리를 세개 지나가는 사천남해연육교는 그 자체가 장관이다.푸른 옥같은 물결 위에 작은 섬들도 많다.그 섬 하나 사서 사슴이나 키우며 살고싶은 생각은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이화웅사장이 년전에 섬 하나를 흥정하다 말았다고 한다.
남해도는 신록의 계절이다.동백 가로수는 꽃이 다 졌지만,산야를 온통 덮은 것은 하얀 조팝나무 꽃이다.조문래군이 그림같은 하얀 목조주택 지어놓고 민박집 하는 앵강만 물빛은 초록의 마노(瑪瑙)빛이다.서포 김만중이 귀양와서 '구운몽(九雲夢)'을 쓴 노도(櫓島)는 지척이다.
보리암 올라가는 주차장 아래 복곡지(福谷池) 면경같이 푸른 물에 비친 신록 속 활짝 핀 산벚꽃 희고붉은 자태는 한폭 수채화다.
경상도 할매 발음으로 '사타리버스' 타고 '보지암' 올라가니,눈앞에 일망무제로 펼쳐진 바다 속에 섬은 좌청룡 우백호 풍수 이루고 뻗었고,바다 가운데 안산(案山) 거북섬은 터억 놓여 상주해수욕장 백사장을 마주보고 있다.이태조가 여기서 기도했다는 기돗빨 센 이곳을 노치겠는가?함께 온 미인들이 다투어 불전함에 돈넣고 백팔배 올린다.
제약회사 사장하던 박홍식군 제의로 상주해수욕장 백사장에 가서 '나 잡아봐라!' 하기로 했는데,막상 백사장에 가니 영감들이 싱급게 웃기만 한다.그러나 진주 사람 누군들 왕년에 여기서 데이트 한번 안한 사람 있던가?솔밭에서 추억담 나누었다.
미조에서 삼동면 돌아가는 코스를 '동양의 나포리'라 부른다.같은 바다건만 유독 이 바다는 왜 이리 맑고 푸른가?여기 바다와 섬 보느라니 어느새 마음도 맑고 푸러러진다.이 중에 물건은 '물건리' 방조림(防潮林)이다.오직 바다 풍광 좋았으면 파독 광부 간호원들이 귀국하여 별장촌 만들었을까.산 위에는 하얀 목조주택 많다.여기 어디 북에서 내려온 김만철씨가 산다고 한다.탄소동위원소로 년대를 추정하여 천년 전이라는 판결 나온 지족의 멸치잡이 죽방렴을 구경하고,삼천포로 나와 여행 끝을 푸짐한 회맛으로 마무리 지었다
물맛도 고향 물맛은 다르다 하지않았던가?삼천포 우렁쉥이 개불 해삼맛은 어떻던가?우럭 도다리 도미 등 본격 회(膾) 나오기 전에 우리 모두 이 삼천포 음식에 삐용! 가버렸다.어릴 때 입맛이 한없이 살아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