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주 중앙로타리 옆 버스 차부에서 ‘원지 함양 산청 안의 거창 감니더’ 지리산 밑 동네 이름들 명태 코다리 엮듯 단숨에 줄줄이 엮어대는 신명나는 한 사내 목소릴 기억한다.진중 다닌 때가 50년대 말이니 한 50년 전 이야기다.
당시 덕산 유덕골은 대한민국 산수갑산 대표 오지였고,함양 둥구마천도 비슷한 곳이었다.
그 함양에서 이번에 멋진 선배님 한 분 만났다.진주중학 2년 선배인 천사령 군수님이다.그 분이 멋진 것은,과거 그 분이 경찰청 고위층이었기 때문도 아니고,군수에 내리 두 번 당선 된 때문도 아니고,100억 장학금 만들어 함양고등학생을 한 해에 서울대 4명 입학시킨 업적 때문도 아니고,황매산 찾아간 우리 동기부부 20여명을 함양으로 점심 초대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50 넘어 학력 자랑할 거 없고,60 넘어 돈자랑 할 거 없소.건강이 최고요.’서두부터 구수한 입담으로 시작된 인사말과 청산유수 읊어내는 함양 예찬에 묻어나는 따뜻한 향토애 때문이었다.그 분 향토애는 그냥 향토애가 아니었다.
함양 상림숲을 조성한 태수 최치원이나 <열하일기>를 함양에서 집필한 안의 현감 박지원,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함양 선비 유호인을 그분처럼 감칠맛 나게 소개할 사람이 함양에 누가 또 있을까 싶었다.
군수라면 옛날로 치면 고을 원이요 태수다.함양은 지금 최치원이나 박지원같은 선배 군수 이후로 가장 좋은 고을 원님 만났다 싶었다.
내가 서울서 박충훈 신현확씨같은 거인을 뵙고 말씀도 나눠봤고,이희승 서정주 양주동 같은 어른들 인터뷰도 해봤으나 첩첩산골에 이렇게 정 뚝뚝 묻어나고,아무 준비 없이 즉석 인터뷰 멋지게 유식하게 해내는 분 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다.바지런하고 서글서글한 그 분은 대바구니에 담아내온 함양의 기장밥 별미나,쫄깃쫄깃한 흙돼지구이
맛깔처럼 좋은 인상을 주었다.
식사 후 그 분 안내로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을 산책하였다.상림 가는 길 가로수는 서울서 그 귀하다는 목백일홍과 이팝나무를 심어놓았다.숲속에 1억주 이상이나 꽃무릇도 심었다고 한다.꽃무릇 붉게 피어나면 고창 선운사 저리 가라할 것이다.곁의 넓은 연못에는 백련 홍련이 막 피어나고,숲 한곳에서 그 분은 서로 수종이 다른 서나무 느티나무
연리목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장관들에게 연리목이 뭔지 물어보라.그런거 모르는 분 태반일 것이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그 산간벽지 함양에 평양과 함께 조선팔도 중에서 유서깊다고 소문난 도시 진주 촉석루처럼 많은 비석을 수집해 모아놓은 것이다.골골에 있던 비석을 옮기려면 민원도 많았을 터이다.그중에 누가 오함마로 철퇴를 가한 이조말 가렴주구 제1인자 고창 조병갑 비석까지 보존해놓았다.
나는 함양 거쳐간 수십명 거유들 흉상들 살펴보다가 유호인 흉상을 보고 무척 기뻤다.지리산을 찾은 최치원 김종직 김일손 조식 등 수많은 시인묵객 중에서 점필재 김종직이 유호인과 함께 의탄마을에 들어서자,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대와 결의를 맺고 여기 은거해 사는 것이 어떠리요?’라고 물었다는 그 유호인이다.
‘아니 이 흉상은 유호인 흉상이군요?’내가 묻자 천군수님 신이 나셨다.성종이 총애하던 유호인이 조정을 떠날 때 만류하신 시는 이렇다.
‘있으려무나 부디 가야만 하겠느냐?까닭도 없이 벼슬살이가 싫더란 말이냐?남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이냐?그래도 너무 애닳고 서운하구나.가야만 하는 너의 뜻을 말하여라.’
이 시를 수십장 될만치 커다란 마천서 캔 오석에다 새기고 세운 분이 누구겠는가?과연 고장의 자랑이 아니겠는가?같이 시비 앞에 가서 기념촬영하고 천사령 선배님과 아쉽게 헤어졌다.거기서 오도재 智得亭에 올라가 천왕봉 상봉 중봉 하봉을 한눈에 조망하기 위해서 였다.오도재 오르는 길은 미시령 한계령 같은 구절양장 길이었다.
관민의 힘을 모아 그 험준한 고개길을 뚫은 것이다.이 어찌 지리산골의 아름다운 리더쉽이라 칭송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덕산 유덕골은 대한민국 산수갑산 대표 오지였고,함양 둥구마천도 비슷한 곳이었다.
그 함양에서 이번에 멋진 선배님 한 분 만났다.진주중학 2년 선배인 천사령 군수님이다.그 분이 멋진 것은,과거 그 분이 경찰청 고위층이었기 때문도 아니고,군수에 내리 두 번 당선 된 때문도 아니고,100억 장학금 만들어 함양고등학생을 한 해에 서울대 4명 입학시킨 업적 때문도 아니고,황매산 찾아간 우리 동기부부 20여명을 함양으로 점심 초대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50 넘어 학력 자랑할 거 없고,60 넘어 돈자랑 할 거 없소.건강이 최고요.’서두부터 구수한 입담으로 시작된 인사말과 청산유수 읊어내는 함양 예찬에 묻어나는 따뜻한 향토애 때문이었다.그 분 향토애는 그냥 향토애가 아니었다.
함양 상림숲을 조성한 태수 최치원이나 <열하일기>를 함양에서 집필한 안의 현감 박지원,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함양 선비 유호인을 그분처럼 감칠맛 나게 소개할 사람이 함양에 누가 또 있을까 싶었다.
군수라면 옛날로 치면 고을 원이요 태수다.함양은 지금 최치원이나 박지원같은 선배 군수 이후로 가장 좋은 고을 원님 만났다 싶었다.
내가 서울서 박충훈 신현확씨같은 거인을 뵙고 말씀도 나눠봤고,이희승 서정주 양주동 같은 어른들 인터뷰도 해봤으나 첩첩산골에 이렇게 정 뚝뚝 묻어나고,아무 준비 없이 즉석 인터뷰 멋지게 유식하게 해내는 분 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다.바지런하고 서글서글한 그 분은 대바구니에 담아내온 함양의 기장밥 별미나,쫄깃쫄깃한 흙돼지구이
맛깔처럼 좋은 인상을 주었다.
식사 후 그 분 안내로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을 산책하였다.상림 가는 길 가로수는 서울서 그 귀하다는 목백일홍과 이팝나무를 심어놓았다.숲속에 1억주 이상이나 꽃무릇도 심었다고 한다.꽃무릇 붉게 피어나면 고창 선운사 저리 가라할 것이다.곁의 넓은 연못에는 백련 홍련이 막 피어나고,숲 한곳에서 그 분은 서로 수종이 다른 서나무 느티나무
연리목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장관들에게 연리목이 뭔지 물어보라.그런거 모르는 분 태반일 것이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그 산간벽지 함양에 평양과 함께 조선팔도 중에서 유서깊다고 소문난 도시 진주 촉석루처럼 많은 비석을 수집해 모아놓은 것이다.골골에 있던 비석을 옮기려면 민원도 많았을 터이다.그중에 누가 오함마로 철퇴를 가한 이조말 가렴주구 제1인자 고창 조병갑 비석까지 보존해놓았다.
나는 함양 거쳐간 수십명 거유들 흉상들 살펴보다가 유호인 흉상을 보고 무척 기뻤다.지리산을 찾은 최치원 김종직 김일손 조식 등 수많은 시인묵객 중에서 점필재 김종직이 유호인과 함께 의탄마을에 들어서자,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대와 결의를 맺고 여기 은거해 사는 것이 어떠리요?’라고 물었다는 그 유호인이다.
‘아니 이 흉상은 유호인 흉상이군요?’내가 묻자 천군수님 신이 나셨다.성종이 총애하던 유호인이 조정을 떠날 때 만류하신 시는 이렇다.
‘있으려무나 부디 가야만 하겠느냐?까닭도 없이 벼슬살이가 싫더란 말이냐?남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이냐?그래도 너무 애닳고 서운하구나.가야만 하는 너의 뜻을 말하여라.’
이 시를 수십장 될만치 커다란 마천서 캔 오석에다 새기고 세운 분이 누구겠는가?과연 고장의 자랑이 아니겠는가?같이 시비 앞에 가서 기념촬영하고 천사령 선배님과 아쉽게 헤어졌다.거기서 오도재 智得亭에 올라가 천왕봉 상봉 중봉 하봉을 한눈에 조망하기 위해서 였다.오도재 오르는 길은 미시령 한계령 같은 구절양장 길이었다.
관민의 힘을 모아 그 험준한 고개길을 뚫은 것이다.이 어찌 지리산골의 아름다운 리더쉽이라 칭송 않을 수 있겠는가?
만들어 주십니다.
상림숲은 칠선계곡 다녀올 때 들린 곳인데 잠시 걸어보아도
부러운 장소였습니다.
역대 내노라는 문객들의 이름을 거론하셨는데..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공부를 덜한 제가 아쉽습니다.
역사공부 잘 하였습니다. 건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