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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04 09:40

'아나벨 리'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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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벨 리'

지금 남해 미조리는 맑은 바닷가 돌담 둘러친 집 몇채만 있던 그런 한가한 옛날 어촌이 아니다.
2층자리 빌딍들과 다방 식당이 있으며,주차장 넓직한 수협 공판장 앞 물결 위에 멸치나 도미 우럭을 잡아온 배가 가득하고,버스 타고와서 생선을 사가는 관관객 밀려다닌다.

그러나 1966년 6월,제대 후에 영문성경 한권과 원고지만 들고 찾아갔던 미조리는 흰구름 아래 파도만 밀려오는 저 먼 남쪽 바닷가 한 외로운 어촌이었다.

외로운 곳에 피는 꽃이라 더욱 아름다웠던지 모른다.
말동무 귀한 어촌 아이라 그랬던지 모른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 달고와 도시 아저씨가 자기집에 있는 것을 자랑하던 꼬마 숙녀는 하숙집 외동딸 금순이었다.
남편을 바다에 빼앗긴 젊은 과수댁은 내외하느라 밥상과 물그릇 들이는 심부럼을 초등학교 일학년 금순이를 시켰는데,금순이는 그일 뿐 아니라 항상 내 산책길에 자랑스럽게 따라나서곤 했다.

등대 우측에 가면 해풍에 잘 자란 푸른 풀밭이 있고.반월형 아담한 만(灣)이 있다.물가에 그럴싸한 바위들이 있어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고,흰구름 아래 비취빛 파도는 끝없이 백사장에 밀려오는 곳이다.

인적 드문 그곳에서 금순이와 바위 사이로 잽싸게 도망가는 게를 잡기도 하고,모래 속에서 우툴두툴한 껍질이 보석처럼 색깔 신비로운 조개를 잡기도 했다.

금순이는 허연 광목 저고리에 아래는 까만 홑치마 입은 시골 아이지만,들어난 통통한 팔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윤끼있고 부드럽다.하느님은 소녀에게 가난과 함께 충분한 건강미를 동시에 부여한 것이다.

게나 조개를 잡다가 수영도 했다.섬에 수영복이 없는지라,속 빤스가 수영복이다.섬아이들은 걷기 전에 수영부터 할 줄 안다.금순이는 시원하게 나가는 크롤 헤엄이고 나는 두팔로 헤우는 개구리 헤엄이다.

두 사람은 파도 속에서 입술이 파래지도록 놀았다.물속의 가리비조개와 조약돌도 주웠다.아버지가 없어서 그랬을까?수줍어하면서도 금순이는 나를 몹시 따랐다.푸른 파도 속에서 예쁜 인어와 논 셈이었다.물에서 나오면 우리는 발을 통통 굴러 귀에 들어간 물을 털고,바위 뒤로 가서 빤스를 벗어 물을 짜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초등학생 금순이는 지금 어디 갔는가?
40년 뒤에 미조리 가서 그곳에서 제일 오래된 갈치횟집에서 금순이 소식을 물었지만,이름도 기억 못한다.

에드가 알란 포우의 '아나벨 리'처럼,금순이는 추억 속 바닷가 왕국으로 가버린 것 같다.






  • ?
    산유화 2004.08.04 10:12
    [옛날 옛날 한 옛날
    바닷가 한 왕국에
    애나밸리라는 한 소녀가 살았답니다]
    젊은 시절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명시지요.
    김현거사님 사모님 두 분 건강한 여름 되세요.
  • ?
    박용희 2004.08.04 10:15
    가끔은 더 옛날에 태어나서 여행을 했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추억속으로 사라진 아름다운 풍경이 그립네요.
    "미조항"... 이름이 참 예뻐죠..
    저도 두어번 밖에 안가봤지만 변하는 모습이 싫기도 하면서
    너무 먼곳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이름만 들어도 설레입니다.
  • ?
    허허바다 2004.08.04 10:36
    그 기억들 다시 그리워 남해에 드셨나요...

    저도 고향에 내려가면 한가한 시간 만들어
    꼭 동광동 언덕 골목길 천천히... 천천히... 왔다갔다 걸어 다닙니다...

    그 조그만 영역에 아름다운 그들과 저가 함께 있었다는
    그 미세한 느낌도 이젠...
    마지막일 것이다며 아깝고 아쉬워 남김없이 챙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괜히 그 골목에서 헛기침이라도 하면
    어스름한 해질녘 조용한 그곳에선
    재잘거리는 소리들 다시 깨어나는 듯하여이다...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예...
    이번 여름에도 그 추억의 무덤에
    다시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솔메 2004.08.04 11:04
    아름답던 미조의 추억이군요.
    지금도 아름다운 천혜의 그 포구는
    물질문명의 때가 거의 묻지않았던 그시절에는
    얼마나 좋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 ?
    오 해 봉 2004.08.04 12:39
    가슴이 찡한글을 읽었습니다,
    무더위에 강녕 하신지요.
  • ?
    김현거사 2004.08.04 13:35
    산유화님 박용희님 허허바다님 솔메거사님 오해봉님 어쩌면 지리산 가족들 다 그리 좋은 분들인지...지난번 달빛초당 이후 집사람도 인품들이 너무 곱고 좋다고 항시 호감을 보이더군요.
  • ?
    섬호정 2004.08.04 14:11
    아름다운 어촌의 추억을 싣고
    시원한 미조리 바람이 옵니다
    금순이 어딘가에서
    그 어린 꿈을 안고 행복하게
    잘 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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