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다시 들리는 지리산 신음소리 ....... 收耕
지리산 실상사에도 눈이 내렸다. 폭설이다. 사흘 내리 퍼붓는 눈 속에 갇혀 내내 고뿔을 앓았다. 이른 아침 좌선을 풀고 극락전을 나와 올려다 보니 천왕봉이 환하게 웃는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극락인데 내 마음은 여전히 무간지옥(無間地獄)이다. 지금쯤 폭설의 솔밭에 웅크려 있을 춥고 배고픈 산토끼를 생각한다. 내가 산토끼인지, 산토끼가 나인지, 폭설의 들녘에 하나 둘 발자국을 찍으며 지금 여기까지 걸어온 내 인생의 모든 길을 생각하며 경전을 왼다.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니….”
30년이 넘도록 선방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해 왔지만, 내가‘진짜 공부’를 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어디 선방에만 선이 있겠는가. 내 발길이 가 닿는‘지금 바로 여기’가 모두 선방이 아니겠는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에 따라 그동안 나의 화두는‘지리산 댐’이자‘새만금’이었고 ‘북한산 관통도로’였다. 내가 선택한‘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길,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구제해 보려는 길은 바로‘환경 보살’의 길이었다.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며 실신을 해도 끝끝내 가야 할 길이었고, 멀기만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면 이미‘오래된 미래’의 길이었다.
그런데 다시 지리산의 신음 소리가 들려 온다. 곡소리인 듯, 죽비를 내려치는 참회의 소리인 듯 지리산이 쩌렁쩌렁 울고 있다. 지리산 댐의 재추진 소식 때문이다. 그동안 지리산 댐 계획을 백지화하기 위해 낙동강 1300리를 걸었고, 위령제를 지내며 지리산 주변 850리 길을 걸었다. 지리산 사람들과 종교인, 그리고 지리산을 사랑하는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몸 한 목소리가 되어 지리산 댐 계획을 백지화시켰었다. 이것은 동강 댐과는 달리 주민들 간의 상처없이 이끌어낸‘무혈(無血) 혁명’이었다.
그러나 한 군수가 지리산 댐 유치를 공언하면서 불꺼진 지리산에 다시 휘발유를 들이부었다. 몇 백억원의 지원금 때문에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볼모로 잡은 것이다. 문제는 간단치 않다. 건설교통부와 수자원공사의 이중적인 태도가 가세해 지리산 주민들이 찬·반 양론의 대결 국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일생을 살아오던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는, 또 하나의 전쟁이 다가온 것이다.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가 돼야 할 국책 사업이 또 다시 논란거리가 되는 현실이 한심 할 뿐이다. 이제 21세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다고 한다. 비로소 우리에게도 국민주권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이는 환경문제도 밀어붙이기식 개발독재가 가능할 수도, 가능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설교통부나 수자원공사도 뼈아픈 참회와 함께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
북한산 관통도로가 그러하고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러하다. 시화호의 뼈아픈 교훈을 잊는다면 대한민국의 생태문화적 자존심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촛불시위는 미국 문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난개발에 죽어가는 뭇 생명들의 촛불시위까지 잘 새겨보는 직관의 눈이 필요하다.
바야흐로 생태적인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것만이 상생(相生)과 평화의 길이기 때문이다. 생태적으로 바라보면 풀리지 않을 일이 없다. 북핵 문제가 그러하고, 정치와 경제 문제가 그러하다. 지리산 실상사 앞눈쌓인 들녘을 맨발로 걸어 새로운 발자국을 찍으며 동체대비의 시대를 예감한다. ‘심청정(心淸淨) 국토청정(國土淸淨)’이라 마음이 맑으면 온 나라가 맑아진다.
(收耕스님·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2003. 1. 7 디지털 조선 게재]
지리산 실상사에도 눈이 내렸다. 폭설이다. 사흘 내리 퍼붓는 눈 속에 갇혀 내내 고뿔을 앓았다. 이른 아침 좌선을 풀고 극락전을 나와 올려다 보니 천왕봉이 환하게 웃는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극락인데 내 마음은 여전히 무간지옥(無間地獄)이다. 지금쯤 폭설의 솔밭에 웅크려 있을 춥고 배고픈 산토끼를 생각한다. 내가 산토끼인지, 산토끼가 나인지, 폭설의 들녘에 하나 둘 발자국을 찍으며 지금 여기까지 걸어온 내 인생의 모든 길을 생각하며 경전을 왼다.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니….”
30년이 넘도록 선방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해 왔지만, 내가‘진짜 공부’를 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어디 선방에만 선이 있겠는가. 내 발길이 가 닿는‘지금 바로 여기’가 모두 선방이 아니겠는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에 따라 그동안 나의 화두는‘지리산 댐’이자‘새만금’이었고 ‘북한산 관통도로’였다. 내가 선택한‘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길,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구제해 보려는 길은 바로‘환경 보살’의 길이었다.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며 실신을 해도 끝끝내 가야 할 길이었고, 멀기만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면 이미‘오래된 미래’의 길이었다.
그런데 다시 지리산의 신음 소리가 들려 온다. 곡소리인 듯, 죽비를 내려치는 참회의 소리인 듯 지리산이 쩌렁쩌렁 울고 있다. 지리산 댐의 재추진 소식 때문이다. 그동안 지리산 댐 계획을 백지화하기 위해 낙동강 1300리를 걸었고, 위령제를 지내며 지리산 주변 850리 길을 걸었다. 지리산 사람들과 종교인, 그리고 지리산을 사랑하는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몸 한 목소리가 되어 지리산 댐 계획을 백지화시켰었다. 이것은 동강 댐과는 달리 주민들 간의 상처없이 이끌어낸‘무혈(無血) 혁명’이었다.
그러나 한 군수가 지리산 댐 유치를 공언하면서 불꺼진 지리산에 다시 휘발유를 들이부었다. 몇 백억원의 지원금 때문에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볼모로 잡은 것이다. 문제는 간단치 않다. 건설교통부와 수자원공사의 이중적인 태도가 가세해 지리산 주민들이 찬·반 양론의 대결 국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일생을 살아오던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는, 또 하나의 전쟁이 다가온 것이다.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가 돼야 할 국책 사업이 또 다시 논란거리가 되는 현실이 한심 할 뿐이다. 이제 21세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다고 한다. 비로소 우리에게도 국민주권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이는 환경문제도 밀어붙이기식 개발독재가 가능할 수도, 가능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설교통부나 수자원공사도 뼈아픈 참회와 함께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
북한산 관통도로가 그러하고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러하다. 시화호의 뼈아픈 교훈을 잊는다면 대한민국의 생태문화적 자존심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촛불시위는 미국 문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난개발에 죽어가는 뭇 생명들의 촛불시위까지 잘 새겨보는 직관의 눈이 필요하다.
바야흐로 생태적인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것만이 상생(相生)과 평화의 길이기 때문이다. 생태적으로 바라보면 풀리지 않을 일이 없다. 북핵 문제가 그러하고, 정치와 경제 문제가 그러하다. 지리산 실상사 앞눈쌓인 들녘을 맨발로 걸어 새로운 발자국을 찍으며 동체대비의 시대를 예감한다. ‘심청정(心淸淨) 국토청정(國土淸淨)’이라 마음이 맑으면 온 나라가 맑아진다.
(收耕스님·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2003. 1. 7 디지털 조선 게재]
길을 뚫으면 반드시 환경파괴가 되나요?
지금 한국 환경론자들의 변 증명 가능한 명제인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진주 남강댐은 만들고 나니,(댐 만들기 전에 나도 진주에 살았는데) 더 좋아졌고,외국도 스위스같은데 산정까지 철도를 놓으니 더 아름답고,미서부 지역도 록키산맥과 태평양 사이 곳곳에 하이웨이가 자연과 멋있게 조화되어 뻗어있고,하와이도 가보면 사람 손이 가꾼 지역과 안 가꾼 지역이 있는데 당연히 꽃의 천국으로 가꾼 지역이 더 아름다워요.
손대는 것이 나쁜게 아니라 마구 손질하는 점이 나쁜 것이지요.
토목공사 시점 몇년만 보지말고(우리나라 공사들이 너무 거칠어 공사 현장을 보면 자연파괴라는 기분이 들긴합니다만,그건 고쳐야 하고) 길게 보며 물을 관리하고 자연을 관리하는 안목에서 공사관리 되도록 노력하도록 관점을 바꾸는 것이 더 필요한 환경관리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