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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산의 추억

조회 수 2863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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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로운 마음을 달랠길 없어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들오온 여기 오브넷.잘은 모르지만 만드신 분의 정성이 한껏 느껴집니다. 물론 글 주신 모든 분들의 산에 대한 사랑도 포함해서요. 이것 저것 살펴보다가 옛 생각에 사로잡혀 이렇게 글을 올려 봅니다. 글 재주도 별루 없고  이렇게 글 올려보는것 자체가 첨이라 좀 긴장도 되네요.더구나 독수리라서 더 힘이 듭니다. 혹시 오타같은거 나와도 이해 바라겟습니다.

벌써 10년 넘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학에 들어와 동아리 생활을 해 보는게 좋다하여 무심코 그러면서 웬지 나도 모르게 산악부에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왜 들어갔는지 모르겟습니다. 3월초에 첫산행을 시작으로 5월 축제때 말로만 듣던 지리산에 가게 되었지요. 요 산행의 정식 명칭은 하중훈련이었고요 덧붙여 금수훈련이기도 했습니다. 명칭에서 나타나는 것 같이 정말 무시무시한 산행이엇습니다.(ㅎ)
하지만 출발 할때가지만 해도 실감 못했었지요. 형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저희 1학년들을 많이 데려가고자 온갖 협박(좀 완곡하게 엄포라고 할까요)과 당근으로 저희를 구슬렸습니다. 엄청난 의미가 깃들여 있어서 무조건 하중훈련은 가야한다는 거지요.훨씬 후에 느낀 사실입니다만 사실 그러햇습니다.구슬린 얘기중에 지금도 도저히 잊을수 없는 얘기를 하나 한다면(아마 이걸 보시면 다들 배꼽잡고 웃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그때 당시 저희가 갈 코스가 칠선골을 올라 천왕봉을 거쳐 주능선을 종주하여 화엄사 코스로 내려올 계획이었는데 칠선골을 오르다 보면 청춘홀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근데 거기 가며는 요정같은 곳이 있다는 겁니다. 황진이는 아닐말정 그에 버금가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이 곳을 찾는 산꾼들을 맞이하고 있다는 거지요.덧붙여 거기는 풍류를 아는 사람들만 제대루 손님으로 대접한다고 하며 최소 시조 3편은 외우고 가야한다 했습니다.그리고 연이 닿아 정말 맘에 들면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건 물론이와 다음 날 산행도 쉬게 해준다 하더군요. 세월이 지나 생각해 봤을때 정말 어처구니 없는 말이긴 했습니다만 당시 저희의 사고론 (무지 단순하고,좋게 말해 순수했지요 그리고 대학산악부의 특성상 형들의 말은 진리였습니다) 그런갑다 했습니다.그 바람에 국어책을 뒤적이며 시조를 외우기도 했고요.
그리고 하중훈련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배낭을 묵직하게 꾸렸습니다. 지금은 대학산악부에서도 거의 사라진 `키스링` 이라는 사각형 형태의 옆으로 퍼진.(인체공학을 무시한 배낭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부실의 온갖 장비는 물론, 보도 블럭까지 집어넣고 드뎌 새벽에 남원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부실에서 출발했습니다.남자 동기 여섯에 여자 동기 셋 저희 1학년만 아홉에 형들 포함해서 15명 남짓했던거 같네요. 출발하는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 키스링을 맨순간 이건 아니였습니다. 바로 서는건 고사하고 숨쉬는것 자체가 힘들었으니까요.( 좀 부연 설명을 드린다면요 배낭의 크기가 양 옆에 달린 사이드 주머니까지 약 140리터 정도의 부피고요 온갖 잡동사니를 다 채워놓은 이유로 동기들이 분배해서 졋다고는 하지만 근 쌀 한가마 무게였습니다.) 이런 무지막지한 것을 산행경험도 끽해야 5-6번의 초짜가, 그렇다고 특별히 무슨 운동을 한것도 아니고요, 부실에서 역까지 3키로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가면서 퍼져버렷습니다.아무 생각도 없고 오직 암담한 현실만이 앞에 있었던 거지요.어찌어찌 역에 도착해서 남원가는 비둘기호에 몸을 싣고 새우잠을 자다 남원역에 도착해 내리고는 진정한 산행 출발지인 추성리(지금은 추성동이겠네요)를 향했습니다.드뎌 추성리.마니들 아시겠지만 칠선골은 우리나라 3대 계곡의 하나로 알아줄만큼 그 심원함을 자랑하는곳이지요. 그리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잘 안다니는곳이라 원시림이 자뭇 무성한곳이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대장형의 출발 구호와 함께 출발하긴 햇는데 몸이 안따라 주는거였습니다. 이미 역까지 가면서 모든 힘을 써버린 결과지요. 맞기도 하고 기합도 받고 욕은 기본이고요 어찌어찌 몇시간 갔습니다만 그게 한계였습니다.결국 그로기 상태가 되버렸지요.의식은 가물가물 말 소리도 안들리고 멀 해야겟다는 생각도 안들고 소위 말하는 맛이 간 상태가 되었습니다. 별수없이 전 맨 후미로 빠지고 고학년 형중 한분이 남았습니다. 나머지 일행은 일단 먼저 출발하고요. 거기서 난생처음 우황청심환을 먹어봅니다. 형이 안되겠던지 비상용으로 가져온 우황청심환 반알을 먹인거지요. 그거 참 놀라왔습니다.그걸 먹으니 갑자기 정신이 팍 들더군요.아마 제가 평소에 약을 안먹고 그 약을 먹어야할 시점에 정확히 먹어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효과는 즉시 나타났습니다.겨우 정신이 들자 다시 뇌리를 파고 드는건 가야할 현실이었습니다.생각하기 무섭게 힘이 쪽 빠졋습니다. 그럴 시점에 형이 파격적인 제안(지시라고 할까요)을 햇습니다.배낭(키슬링)에서 보도블럭을 빼라는겁니다. 키슬링은 지금의 어택형 륙색과 달라서 헤드도 없고 한번씩 짐을 넣다 뺐다 하는게 여간 성가스러운게 아니
었습니다만 그건 둘째문제였지요. 보도 블럭 뺀다는 자체가 중요햇으니까요.일말의 희망을 갖고 다시 짐을 꾸리고 출발합니다마는 이게 웬일.분명 무게가 덜해진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무게는 나를 짓눌러 옵니다.여차여차 겨우 걸음을 옮겨 일행을 만났습니다.분명 저는 다른 동기들보단 행복했다고 봐야죠(특별 휴식에 간식에 보도 블럭도 버렸으니가요) 동기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문득 `선배는 하늘이다,동기는 생명이다`는 구호가 생각납니다(당시 저희는 산에 다니면서 그리 교육 받앗습니다) 다들 죽을상으로 기다시피하며 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도저히 안되겠던지 대장형이 고학년 형들하고 상의를 하더만 점심 먹는 곳에서 저희가 지고온 보도블럭을 버리게 합니다(ㅎ 저는 물론 그전에 버렸지요) 하지만 한번 진이 빠져버린 체력은 돌아올줄 모릅니다. 가다가 쓰러지길 수십차례. 무지하게 욕 얻어먹고 맞고 기합받으며 그야말로 비몽사몽간에 정신력으로 갑니다. 더구나 날은 왜 이리 좋던지요. 인간의 땀이 이리 많을수도 있나 봅니다. 부제로 붙어잇는 금수훈련 답게 물 또한 통제를 하니 계곡길 옆에 소를 지날때면 그냥 빠지고 싶습니다.몇미터가 될지도 모를 그 시퍼런 소를 보면서도 겁은 안나고 오직 물 생각뿐인 거지요. 그런 충동을 수없이 참으며 우여곡절끝에 하루 일정을 마쳣습니다.다들 아무 생각 없지요.다만 본능적으로 야영및 취사준비를 할뿐입니다.그렇게 소에 빠지고도 싶고 차라리 죽고 싶엇습니다마는 일단 하루 운행이 끝나고 나니 청춘홀 생각이 납니다.나중에 안 즉 저희가 비몽사몽간에 땅만 보며 가는통에 이미 지나쳤더군요.덧붙이면 청춘홀이라는게 바위에 글자를 그리 적어 놓은 거였습니다. 참으로 어이 없는일이긴 했습니다만 이미 지나버린거지요. 아리따운 기생과 주악은 어디가고 암담한 현실만이 있다니.... 기가막히지만 별수 없었습니다(실제로 제가 고참이 되서도 그걸 써 먹었습니다 ㅎㅎ)
술에 취해 어떻게 잔건지도 모르게 날이 샜습니다.밥을 먹고 짐을 꾸리는데 다시 악몽이 되살아 납니다.대장형의 출발 구호와 함께 출발합니다만 몸은 역시 말을 안듣습니다. 무지하게 욕 얻어먹구 맞으면서 기어기어 갑니다.그러다가 천왕봉 얼마 안남긴 지점이엇던거 같습니다.고학년 형들이 저희 배낭과 바꿔서 가게 합니다.놀랍긴 합니다만 이게 웬떡이냐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엇죠.날렵한 형들의 배낭이 얼마나 무거우랴하는건 저희의 오판이엇습니다.저희 딱걸이들(흔히 1학년들을 이리 표현합니다.아마 뒷치닥거리라는 말과 관계가 있어보입니다) 키스링에 비한다면 가볍긴 했습니다만 이 무게는 분명 상상 이엇던거지요. 그리 한시간 정도(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만 보통 50분 운행에 10분정도 휴식이 기본입니다)가다가 다시 배낭을 바꿔메고 갑니다. 형들의 깊은 정과 산악부에 내려오는 전통이라는걸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엇습니다. 그리 얼마 안되어 드디어 민족의 기상이 발원되는곳-천왕봉-에 도착햇습니다. 장하다면 장하고 감격스럽다면 감격스러운 일이겠지요. 난생 처음 속된말로 `똥짐`을 메고 수십수백대를 맞으며 수십번 소로 빠지고자하는 맘을 참으며 남한에서 두번째로 높은 곳에 올랏으니가요(근데 사실 제 맘속엔 지리산이 남한 최고의 산으로 인식되어잇습니다.높이나  크기 장중함  기타등등으로요.물론 다른 산을 폄하하는건 당연히 아닙니다.산은 그자체로 좋으니까요) 당시 기억으론 무지하게 추워서 떨은 기억과 하도 목이 말라서 정상부근 바위에 누군가가 버린 사과 껍데기를 허겁지겁 주워먹은게 생각납니다(음 좀 비참하긴 합니다만 지나고 나니 것두 추억입니다.너무 열악한 환경이었고 너무 극한 상황에 달해서인거죠) 정상에서 답사식을 마치고 다시 배낭을 메고 능선 종주를 합니다. 분명 배낭은 가벼워졌고(보도블럭.부식 등) 또 계속해서 오르막이 아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과정입니다만 힘든건 여전합니다.키스링만 매면 아무 생각없어지는 거였죠.그냥 땅만 보고 가는 과정에 어느덧 2박을 맞이합니다. 선비샘이었던걸루 기억납니다. 참 운치가 엿보이는 이름 같습니다. 일단 운행만 멈추면 좋았습니다만 형들은 그게 아이엇나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려 저희가 운행을 너무 못한 관계로 총 3박4일 일정의 운행계획에 차질이 온거지요.형들은 심각합니다만 저흰 일단 좋습니다.그렇게 둘째날이 갓습니다.
셋째날, 몸은 여전히 무겁습니다.하지만 가야하지요.키스링을 맨 순간 다시 땅만 보며 아무생각없이 걸어갑니다.이미 체력은 바닥난지 오래고 형들의 꾸지람에  웬지 모를 가야함에 기계처럼 갑니다.경사가 조금만차이 나는 돌만 봐도 덜커덕 합니다.저길 딛기위해 한쪽 발을 떼는순간 하중을 못 이겨 넘어지는건 아닌가, 실제로 그렇게 넘어지기도 합니다.우스운건(물론 당시는 괴로웠지요) 그리 넘어지면 혼자는 못일어 나서 동기들이 거들어 줘야 일어났었습니다.쉴때도 계단형으로 경사진곳에 키스링을 벗어놔야 혼자 일어설수가 있었지요. 엎어지며 기며 (도저히 못간다 싶어지면 차라리 걍 엎어졋습니다. 그 과정에 좀이라도 쉴수 있으니가요. 한데 문제는 내가 그러면 그럴 사이에 다른 동기들은 키스링을 맨 체로 서 있어야 합니다.죽을 맛이죠) 그리저리 조금 적응된다 싶을 무렵 오늘의 야영지에 도착합니다. 연하천 산장으로 기억나는군요. 연하천 산장은 예나 지금이나 개인에게 위탁해 관리하는 곳이라 다른 직영산장에 비해 운치가 좋지요. 또 술에 엄청 취해서 잠이 듭니다.항상 재벽 2시 이전엔 못잔거 같습니다. 몸은 피곤해 죽겟는데 어떻게든 술자리를 지속시키며 정신력의 한계에 도전하게 하는게 형들의 일인가 봅니다( 그리 보면 형들은 거의 슈퍼맨 이었습니다. 인간이 어찌 저렇게 할수가 있는지.후후 훗날 제가 고참이 되서야 알게됩니다)  
넷째날, 드뎌 운명의 날입니다.3박 4일 예정의 마지막 날로 이 무시무시한 하중훈련이 끝나는 거지요.인제 좀 몸이 풀리는거 같다 하다가 긴장이 조금 풀려서인지 역시 힘듭니다.제일 괴로운건 물을 거의 못 먹는거 하고 발의 통증입니다.신기한건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배낭무게는 전혀 준것같지를 안습니다.간다고 갑니다마는 도저히 처음 계획대로는 안될거 같습니다.결국 형들의 우려대로 화엄사 길로 하산하지 못하고 뱀사골 코스로 내려가게 됩니다. 당시에는 물론 좀이라도 시간이 덜 걸리는 곳으로 가게 되서 좋앗었지요. 나중에는  아쉬움이 남앗습니다.
예정보다 짧은 코스로 내려가게 되었지마는 저희가 부실에 도착한건 한밤중이엇습니다.실감이 안납니다마는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였지요. 그리하기까지 우리 몸에 난 상처는 화려(글쎄 화려라고 해야할른지...) 햇습니다. 전원 등이 까진것은 기본이고 발톱이 몇개 나가고 심한경우 제 동기중 한명은 산행 도중에 한쪽 손에 마비까지 와서 몇달을 고생한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친 하중훈련, 나중에 제가 아이들을 이끌고도 수차례 가봤습니다만 이 1학년때의 하중훈련 만큼 생각나는 산행은 드물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2학년이 되고 군대 갔다와서 복학 하구 다시 산에 다니고 나서야) 그 진정한 의미가 이해 되었지요. 삶에 지치고 힘들때 한번씩 아련히 생각나기도 햇고요( 산에 별로 안다니신 분들도 그리 힘을주고 용기를 주는 먼가는 다들 있으시겠지요)                 요즘같이 힘든 시기에 문득 옛추억이 생각나 한번 글을 올려 봅니다. 참고로 그 시절 그 동기들은 이제 대부분 가장이 되어서 열심히 현실 삶을 살고 있고요. 물론 지금도 한번씩 만나지요. 예전처럼 산에 다니진 못합니다만 술 한잔 하며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지리보단 설악이 좀더 생각나긴 합니다.
장이불수(莊而不秀), 수이불장(秀而不莊) 서산대사님 말씀으로 기억합니다만, 지리는 장중한면에선 진정한 대장부같고 포근하게 감싸는 측면에선 어머니 같지요.설악은 화려한 측면에선 세련된 도시 캐리어우먼이랄까요, 산세의 험준함과 거침으로 보면 길들여지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청년 이라고도 할수 있을거 같습니다.
이거 산을 감히 평가한다는게 어불성설이겟습니다만 전에 좀 산에 다녔었던 한 사람으로서 그 동안의 느낌을 적은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글을 마치려 하는데 생각나는게 잇어 하나 덧붙이려 합니다. 흔히 저희가 쓰는 표현중에 무슨 산을 정복했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좀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불쾌하기까지한 표현입니다. 사람마다 다들 가치관과 생각이 다릅니다만 적어도 동양적 세계관에 잇어서 산이란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니지요. 대자연으로 대표되는 산은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동화되어야할 존재입니다.우리 옛표현에도 보면 등산이라 하지않고 입산이라 햇지요. 정복이라는건 지극히 서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표현입니다( 물론 여기서 동서를 구분해서 머가 우월하다 얘기하자는건 아닙니다.다만 논리 전개에 있어서 필요하기에 이렇게 얘기하는겁니다) 이 얘기를 더 하자면 근대 알피니즘 얘기부터 해서 상당히 길어질거 같습니다만(나중에 혹 기회가 닿으면 그럴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겟습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이정도만 말할려고 합니다. 분명한건 우리가 산에 오를수 있었던건 그 산이 우리를 받아줬기때문에 가능했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입니다.

휴, 어찌어찌 글을 다 적엇습니다. 너무 길어서 지루한감이 있을것도 같고요 혹 산행기에 올렷어야 맞을지도 모르겟습니다만 그냥 추억이라는거에 보다 의미를 둬서 이렇게여기 올립니다.끝으로 어디선가 봣던 글로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모쪼록 하시는 일 잘 되시고요 산에도 열심히들 다니시길 빕니다. 그럼 다음에 뵐수 잇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겟습니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자연으로 대표되는 산은 세상에서 가장 큰 캠퍼스요,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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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lu 2004.01.17 10:02
    ^^안녕하세요,지리1915님.글 잘 읽었습니다.빽빽한 긴장감이 글 읽는 내내 느껴졌답니다...지리1915님,화이팅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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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바다 2004.01.17 18:29
    글을 다 읽었는데도 아직도 님의 무겁다는 하소연과 힘들어 죽겠다는 아우성이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ㅎㅎㅎ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예전 젊었을 때 저의 모습도 떠올려가며 글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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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옹 2004.01.17 21:30
    ㅎㅎ 키슬링....
    첫 지리산 산행이 힘들어서 그랬는지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지리산을 좋아하게 된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인 듯합니다. ^^*
    유익한 글 종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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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거사 2004.01.18 08:05
    목말라 사과껍데기까지 주워먹었다는 말 정말 심감나는군요.글을 읽으면서 대학 산악부 출신으로 4년 내내 산만 찾다가 요즘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설악산 소장 역임하면서 신선노름 하는 권모라는 친구 생각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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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연 2004.01.18 11:08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덩달아 저도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네모난 키슬링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새일까... 궁금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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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1915 2004.01.18 15:16
    글 재미잇게 잘 봐주셔서 감사하고요. 하나 정정해야될거 같아서 적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 당시 사진을 찾아봤더니 저희 동기가 10명이었더군요.글 중간에 남자동기 여섯 여자동기 셋으로 기록되어 잇는데요 제 착각이엇고 남자동기 일곱에 여자동기 셋이었습니다.정정합니다.
    그라고 해연님이 궁금하시다길래 덧붙인다면요 물론 키슬링에 대해섭니다. 키슬링이란건 예전 우리나라 근대 등반 초창기 당시에 쓰던 배낭으로, 모양은 거의 정사각형 꼴의 본체에, 사이드 주머니가 각각 좌우측에 ( 높이는 키슬링 세로의 절반정도 됩니다) 달린 형탭니다.요즘 어택형 륙색같은 헤드도 없고요 다만 키스링 여기저기에 끈이 달려잇어서 짐을 다 꾸리고 나서 마무리시 구형 텐트 폴대 같은걸 위에 얹어서 배낭쌓기를 마무리 합니다.부피는 임의대로 만들수 잇고요.지금의 배낭같은 어깨나 허리에 충격을 분산시켜주는 장치같은건 전혀 없고요 어깨끈이라고해봤자 본체 만든 천을 약간 두껍게 대 놓은 정돕니다.한마디로 인체공학이 무시된 배낭입니다(ㅎㅎ) 하지만 이 키슬링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크죠(음 과거형으로 컸다고 하는게 더 정확하겠군요.아무래도 시대 흐름에 따라 좀 퇴색하는 감이 있으니까요) 대학산악부라는 곳의 초창기 시절엔 당연 변변한 배낭이 있을리 없고 우리나라 근대 등산사 초창기 모델인 요 키슬링이 도입되는건 당연한 일이엇을테고요 그런것이 주욱 전통이라는 형태로 내려왔던 거지요. 물론 가난해서그럽니다(ㅎㅎ 학생들 주머니 사정이 뻔하자나요)
    요런것들을 겪어서인지 제가 1학년때 큰맘먹고 구입했던 80리터 써미트 배낭을 지금도 갖고 있어요 아니 그거 밖에 없네요 배낭으론요.물론 아직도 쓸만합니다. 요정도로 궁금증이 풀리셨는지 모르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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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1915 2004.01.18 20:15
    에고, 이런 실수를....송구스럽습니다.
    보충설명 한다고 떡허니 올려놓고 봤더니 `키슬링`에 대한 설명중 중간쯤 대목이 잘못되었네요.끈은 어깨끈 박음질한 부분에 두개가 길게 달려있고요(그러니까 대략 봤을때, 중앙 상단 정도되는 위치겠지요)고리가 사각 모서리 부근에 달려있어서 교차시켜가며 배낭을 꾸립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이 `키스링`은 `가오(이런 표현 쓰면 혼날려나요)가 중요해서 본체 전면과 사이드 전면에 각각 판자를 데서 각을 잡습니다.후후, 왜 군대에선 무조건 각이라고 하잖습니까? 흠, 요정도면 거의 완벽할거라고 위안삼아 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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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연 2004.01.18 23:28
    아. 그렇군요. 한밤에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며 읽는 고통(?)이 큽니다.^^ 참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 산은 수풀이 울창해서 세로로 긴 배낭이 알맞다... 는 글을 어디서 주워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도 배낭은 써미트 45랑 65 두개로 다 해결한답니다. 배낭을 무겁게 안갖고 다니다보니 저한테는 그걸로도 충분하더군요. 덕분에 공부 잘했습니다. 무엇이든 변천사를 안다는 것 흥미있는 일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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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해 2004.01.19 03:11






    정말 흥미진진한 옛이야기 구수하게 들었습니다. 하중훈련을 하필 칠선골에서 시작하다니 하늘이 노랗군요^^. 보통 칠선골 오름이 초행인 산객들은 된통 고생하기 마련인데 그 거나한 등짐 메고 막막한 대장정을 시작하다니 앞이 안보입니다. 지금이야 그리운 추억이라 웃으시겠지요^^ 청춘홀에 얽힌 에피소드가 참 재미있고요. 가끔이라도 산행장비를 비롯하여 옛시절 이야기 잘근잘근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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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pp 2004.02.23 15:12
    그것이 키슬링이었군요. 두해 전 주능선 오름에 경상대 산악부를 만났습니다. 뙤약볕에 쌀가마니 두개는 족히 넘을 무게를 지고 가는 학생들이 모두들 동생같아 얼마나 불쌍하든지요. 거의 비슷한 거리를 운행하다 보니 먹는 것도 부실해 보여 내내 마음쓰였답니다. 저희 일행들은 하나같이 나중에 애들 산악부엔 발도 들여놓지 말게 하자구 합의했습니다. 말동무도 하며 간식도 건네며 함께 지리산을 오른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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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몽사몽 2004.03.04 17:29
    늦깍이에 암벽빙벽 배우느라 요샌 지리에 예전만 못가는데 옛추억이 생각나네요. 그래도 작년 지리에 4번 정도 들었는데 칠선골 입구 주차장에 차 주차 해놓고 몰래 칠선계곡으로 올라 와운골로 하산에 차 가질러 갔다가 공익에게 과태료 물뻔 했네요. 정부는 언제 칠선계곡을 우리에게 돌려 줄련지... 그놈의 하중훈련 하얀산을 꿈꾸는 산악인이라면 지긋지긋 한 훈련이죠. 저는 대학산악부도 아닌 일반산악회인데 40대50대가 되도 그놈의 하중훈련은 연 2-3회는 하더군요. 벽돌넣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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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점점 가물가물해져 가는 추억들 7 허수무 2003.12.13 2379
55 아!... 그립습니다. 3 신용섭 2003.12.06 2481
54 [re] 아!... 그립습니다. 신용섭 2003.12.25 1803
53 억새바다에서 만난 지리산 10 해연 2003.10.29 2861
52 그녀와 세번째 만남,그리고 마지막... 8 소성 2003.10.16 3823
51 [re] 그녀와 세번째 만남에 부쳐 허허바다 2003.10.18 2335
50 그녀와의 만남 두번째 8 소성 2003.10.14 2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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