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사랑방>삶의추억

2005.02.02 13:36

설악에 얽힌 추억

조회 수 1872 댓글 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970년 여름 - 친구 2명과 설악에 가기로 했는데, 이 녀석들 굳이 여자를 하나씩 데리고 가잔다. 난 같이 갈 여자가 없으니 반대했지만 중과부적이라 어쩔 수 없이 지고 말았다.
각자의 준비물을 할당하면서 아무리 여름이라도 산 속에서는 무척 춥다는 걸 강조하며, 여자들도 자기가 덮을 담요 2장씩은 꼭 가지고 오라고 했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난 버스는 점심 때가 지나 용대리에 도착했고 이어서 왁작지껄 수다 속에 백담사를 지나 계곡 옆 풀밭에 텐트 2개를 나란히 쳤다.

** 이때의 모습을 담은 마땅한 사진이 없어 글로 대신 설명합니다.
ㅇ 배낭 - 한 겹의 데님 천으로 만든 원통형 자루, 양 옆에 커다란 포켓이 달린 키슬링 타입. 양 옆의 포켓에는  휘발유(버너용 연료)통, 소주 1.8리터 유리병(통칭 막소주 됫병), 손도끼(방범용), 텐트 폴대 등을 넣는다. 패킹은 맨 밑에 텐트나 담요를 넣고 등받침 부분에 옷가지를 수직으로 세워 넣은 다음, 나머지 공간에 취사도구와 먹거리들을 넣는다.(꺼내 쓰는 순서를 고려하고, 프레임이 없어서 등이 배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
ㅇ 텐트 - 군용(軍用) "A텐트". 2인용. 일단 무지 무겁다. 바닥이 없으므로 판초 우의를 깔면 그 틈 사이로 바람과 물의 출입이 자유롭다.
ㅇ 담요 - 국방색 군용 담요. 역시 무겁다.

***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취침시간. 당연히 텐트 하나는 여자용, 다른 하나는 남자용(3명)이다. 그런데, 배낭을 풀어 보니 이 여자들 담요라고 가져온 게 가슴에서 발끝 정도에 이르는 타월- 그것도 한 장씩이다. 아니, 산에 간다고 했지 누가 해수욕장에 간다고 했나? 40리터쯤 되는 배낭엔 몽땅 옷가지(여름용)와 엄청난 양의 화장품만이 들어있었다.(이후로 나는 산에 화장품 갖고 오는 여자를 무지하게 싫어한다)
할 수 없이 남자들이 가져온 담요 6장을 각기 3장씩 나누어 한 장은 깔고 두 장은 덮고 자기로 했다. 피로에 약간의 술기운이 겹쳐서 쉽게 잠은 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한데 온몸이 싸늘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잠이 깨었다. 분명히 배를 덮고 있어야 할 담요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놈들이 추우니까 담요를 둘둘 말고 돌아 누웠겠지.'
옆 자리를 더듬어 봤으나 어느 쪽에도 담요는 없다.
'아차, 말로만 듣던 텐트 도둑이 왔다 간 모양이구나!'
나는 일단 도끼를 찾아 들고 나머지 녀석들을 깨웠다. 후다닥 텐트 밖으로 튀어나온 나는 다른 물건들이 없어진 건 없는지 후렛쉬로 재빠르게 살펴보고는 얘기했다.
"야, 텐트하고 다른 건 다 있는 거 같은데, 담요만 없어졌다. 여자들 텐트는 어떤지 물어 봐라."
아직도 잠이 덜 깬 한 녀석(예의 그 청량산에 같이 갔던 녀석이다) 왈,
"으응, 그거? 아까 여자들이 춥다고 그래서 내가 줬다."
아, 이럴 수가! 이 녀석은 여자 때문에 친구를 팔아먹는 놈이로구나! 이런 배신감은 일찍이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추워서 잠은 더 이상 잘 수가 없고 동이 틀 때까지 우리 둘은 배신자를 절반쯤 죽여놨다.

***
봉정암에서 이틀째를 따뜻하게 보낸 다음 우리는 대청봉을 지나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천당폭포라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서는 "찍사"인 그 친구(배신자)가 카메라 삼각대를 거두어 챙기느라 조금 지체하는 사이에 우리는 무심코 앞서 나갔다. 그 지점은 암벽에 인공으로 다리처럼 안전시설물을 만들어 붙인 곳이라 좁아서 사진 찍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멈춰 서도록 양해를 구해야 했기 때문에 일행이라고 기다렸다가 뭉쳐서 갈 수가 없었다.
다리를 벗어나 한참 갔는데도 이 "찍사"가 오질 않길래 우리는 기다리기 지루해서 계속 가다가 노점상 같은 데에서 한 잔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이상은 족히 지나서 나타난 녀석의 얼굴은 어제 새벽에 담요 때문에 분노했던 내 얼굴보다 아마도 열 배는 더 치를 떨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당시 세상에 존재하던 욕이란 욕은 몽땅 등장했던 것 같다. 침을 튀겨가며 뱉어놓는 얘기를 정리해 보니까 카메라를 정리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비켜주다가 난간 너머 계곡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하필이면 천당폭포에서!) 높이도 꽤 됐는데 배낭이 원체 무거워서 그랬는지 착지하는 순간 배낭이 먼저 닿아서 다행히도 몸에는 그다지 큰 충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천당으로 갈 뻔 했는데 네 놈들은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냐? 이 죽일 놈들아!"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여자 때문에 친구 담요를 훔쳐 간 놈하고 친구 떨어져 죽을 뻔 했는데 히히덕거리며 술 마신 놈하고 누가 더 나쁜 놈인가 하는 문제로 핏대를 세웠다.
30년이 지난 요즘에도 가끔 이 얘기를 하면서 서로 네가 더 나쁜 놈이라고 싸우곤 하는데, 그 친구의 부인이 그 때의 여자가 아니라는 점은 내가 그 친구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아주 좋은 무기가 되고 있다.


     <그 당시의 봉정암과 일행들>


     <최근의 봉정암 전경(한상철님 사진)>
  • ?
    부도옹 2005.02.02 20:42
    항상 왼편에 서서(바라볼 때) 사진에 찍히십니다. ^^
    함께 간 여성들이 미인이시라
    담요를 건네 준 친구의 마음을 이해합니다만
    담요는 곧 자일과 같을진데.... ^^*
  • ?
    섬호정 2005.02.04 17:36
    친구와 핏대올린 상황? 재미있고 궁금...
    오브넷의 도덕선생님, 김수훈님께선
    어찌 결론내리셨는지요??? 하~
  • ?
    오 해 봉 2005.02.05 00:56
    참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이네요,
    천당폭포에서 떨어졌는데도 자기발로 걸어왔다니 그양반은
    천당에 다녀왔네요,
    그당시 봉정암사진 보물이네요,
    지금 봉정암은 저사진에 안보이는 건물이 몇동더있고 계속 공사를
    하고 있답니다.
  • ?
    김현거사 2005.02.08 20:40
    판정=담요 빌려준 자가 잘못임.여자에게 담요 빌려주면서 제 혼자 엉큼하게 인심 쓴 것.동료에게 상의 안한 것.
    판정=술 마신 것은 전혀 잘못 없음.천당폭포에 떨어질 것을 사전에 전혀 안 것이 아니므로.
  • ?
    박용희 2005.03.13 07:43
    ^^
    김현거사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김선생님의 유머스러움이 가득하네요.
    30년이 지난 지금도 티격태격(표현이 좀 거시기 하지만^^)
    싸우시는 모습에 진한 우정이 느껴져 또한 부럽습니다
  • ?
    김현거사 2021.02.26 10:34
    그 참 글을 재미있게도 쓰셨구나

  1. 삶의 추억

    Date2004.07.21 By운영자 Reply0 Views3578
    read more
  2. 삶, 덴버의 추억 일바시기

    Date2005.02.04 By섬호정 Reply3 Views1940
    Read More
  3. 설악에 얽힌 추억

    Date2005.02.02 By김수훈 Reply6 Views1872
    Read More
  4. 청량산의 추억

    Date2005.01.17 By김수훈 Reply5 Views2034 file
    Read More
  5. 추억의 교정 가을 운동회

    Date2005.01.09 By섬호정 Reply8 Views2249
    Read More
  6. 옛동산에 올라

    Date2004.12.31 By섬호정 Reply5 Views2050
    Read More
  7. 청담스님

    Date2004.12.09 By김현거사 Reply5 Views2310
    Read More
  8. [re] 청담스님 법향...

    Date2004.12.30 By섬호정 Reply0 Views1296
    Read More
  9. 백석현 이야기

    Date2004.12.06 By김현거사 Reply4 Views1596
    Read More
  10. 덴버 레드락 파크의 '적색 크라운 스톤'

    Date2004.12.02 By섬호정 Reply7 Views2015
    Read More
  11. 차의 화두 만행

    Date2004.11.25 By도명 Reply0 Views1414
    Read More
  12.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Date2004.10.27 By섬호정 Reply3 Views3381
    Read More
  13. 밤안개

    Date2004.10.25 By김현거사 Reply3 Views1542
    Read More
  14. 봉화를 다녀와서

    Date2004.10.21 By섬호정 Reply2 Views1469
    Read More
  15. 화려한외출을 하는누에.....TY동화 행복한세상..에 소재제공에 응모 한 글...^^

    Date2004.10.15 By하이디 Reply4 Views1488
    Read More
  16. 추억의 영화

    Date2004.10.07 By섬호정 Reply4 Views1411
    Read More
  17. 강릉에서

    Date2004.10.06 By김현거사 Reply3 Views1241 file
    Read More
  18. [re] 강릉길~思親 (신사임당을 그리며)

    Date2004.10.11 By도명 Reply1 Views1258
    Read More
  19. 난로~~~``따뜻함이 그리운계절

    Date2004.10.01 By하이디 Reply9 Views1597
    Read More
  20. 사진을 내립니다/ 양해바라며~

    Date2004.09.23 By섬호정 Reply9 Views1432
    Read More
  21. 茶 벽라춘을 마시는 날

    Date2004.09.22 By도명 Reply1 Views1516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