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석의 아침은 노고단보다 빨랐다. 정상에서 일출맞기를 원하는 이들이 일찍 출발하기 때문이다. 소란스러움에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벌써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한다. 어제본 일출의 여운이 남아있는 나역시 천왕봉에서의 일출을 보고 싶었다.하지만 그것은 욕심이다. 아픈 무릎을 구부러 보았다. 어제보다는 나은 느낌이 든다. 무리는 절대 금물이다. 조금이라도 더 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으로 산행을 하여 기여코 종주만은 성공해야 한다. 그냥 한시간여 누워있다가 5시가 넘어 일어났다.
먹거리 꾸러미를 보니 집에서 싸온 밥이 하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햇반으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생전 처음 사온건데 먹어보지도 못한다면 그것도 억울한 일이다.내 앞자리에서 희발류 버너의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또 그옆에는 학생인듯한 두명이 취사를 하고 있는데 오! 맙소사 이들은 휴대용 가스랜지를 가지고 왔다. 박스에 넣어 아예 세트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거의 가마솥급의 코펠에다 끓이고 있었다. 일행은 두명이었다. 복장 또한 가관이었다. 소위말하는 등산용은 하나도 없었다. 운동화에 잠바에 그리고 목도리, 고깔모자...
저들이 진정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대학시절이 거의 저모습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격식을 따지고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었다. 산이 좋으면 산만 바라볼 것을 복장과 장비에 과도한 관심을 둔것 같다. 장비에 거품이 많다. 상혼에 놀아난 것 같기도 하다. 히말라야 등반도 아닌데 무조건 좋은 것만 찾고 외제를 찾는 것을 반성하게 만든다.
6시 20분, 아직도 칠흑같은 어둠이다. 헤드랜턴을 켜고 조심스레 천왕봉으로 발을 떼어 놓았다. 다리는 어제보다 많이 좋아졌다. 그러니 아주 조심조심 아껴서 걷는 거다... 이곳 저곳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불빛이 보였다.
촛대봉으로 향하는 계단은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방한 마스크를 쓰고 팔레스타인 게릴라 처럼 묵묵히 올랐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조심했으면 이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후회도 되었다. 다음부터는 산행전에 한 일주일 정도 뒷산에서 예행연습을 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처음으로 세석에 와서 지금처럼 춧대봉으로 오를때 등산로 주위 어디 쯤에 습지가 있어 노란꽃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어둡고 바람만 쌩쌩 불뿐이다. 촛대봉 오르는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한참을 걸어 정상에 도착을 했다. 저 멀리 동녂은 어슴프레 빛나고 있었다. 다시 어제의 일출이 생각났다. 기다렸다가 일출을 보고 갈까... 그냥 가기고 했다. 가는길에 곁눈으로 보면 될것이다.
촛대봉에서 내리막길로 들어서니 여전히 어둡다. 그래도 앞사람들이 길을 잘 밟아 둔지라 별 어려움 없이 갈수 있었다. 내려가면서 내다리는 어제수준으로 되돌아 갔다. 하지만 나는 통증에 익숙하고 다리의 불편함에 익숙해 졌다. 아주 능숙하게 다리를 끌면서 내려갔다. 15년쯤 전에 광진이라는 친구와 이길을 갔다. 하루지나자 나처럼 무릎이 아프다해서 내가 배낭 두개를 지고 갔다. 빈몸으로 탈래탈래 걸어 가는 그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저그 꾀병아닌가?'하고 생각했다. 그친구에게 미안하다.
어둑한 길을 가면서 도망친 반달곰 반돌이 생각이 났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지 않을까. 러시아 불곰과는 달리 지리산의 반달곰은 산에서 만나도 두렵지 않고 반가울것 같다.
봉우리 하나를 돌아서 보니 해는 이미 떠서 1미터 정도 솟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제의 감흥이 일지 않았다. 바람은 무섭게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가야할 길은 멀다. 굴곡된 그길을 나는 굼벵이 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갔다.
장터목산장 0.8k, 힘들게 언덕하나를 넘었다. 그러자 놀라운 관경이 드러났다. 마치 궁전의 정원길같은 아늑한 길이 나왔다. 그곳은 바람도 불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재충전이 되었다. 8시 30분에 드디어 장터목산장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석봉으로 통하는 계단이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처럼 펼쳐저 있었다. 지금 나에게 천국이란 단어는 높고 가파르단 의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바로 중산리로 내려 갈까... 아니다 이길도 만만찮다. 그냥 고다.....
제석봉으로 오르는 동안은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이를 악물면서 너무 오버 하지 않게 규칙적으로 쉬었다. 바람은 거칠었다. 큰맘먹고 산 장갑속에서도 손은 시렸다. 벌써 정상에 갔다가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장터목에서 자고 배낭은 산장에 두고 다녀오는 중이었다. 따뜻한 집을 마다하고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 묘한 동지의식에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와중에도 아가씨에게는 더 힘차게 인사를 했다.
천왕봉 0.5k, 웃음이 나왔다. 이것은 사기다. 0.5k란 거의 다왔다는 의미다. 그런데 통천문앞이 과연 천왕봉에 다온 것인가. 특히나 지금의 내몸상태로... 어제 세석0,6k 팻말에는 안도를 했다. 이제 굴러서라도 가겠구나 하고, 하지만 지금은 더욱 아득할 뿐이다. 지금 부터 죽었다...
이제는 철제계단이 난간이라도 붙잡을 수 있어 차라리 나았다. 들려지지 않는 다리를 팔로 당기면서 기다시피 갔다. 그래도 정상이 눈앞에 보이니 힘이 생긴다.
바람은 거세었다. 바람에 밀려 뒷걸음을 치면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10시 조금 넘었다. 그 때 그곳에는 세명이 있었다. 최근에 와서 그렇게 한적하게 천왕봉에 올라본 적이 없었다.
사진속의 이름과 실재를 대비하며 내가 어제 오늘 걸어온 곳을 뒤돌아 보았다. 저곳은 노고단, 저곳은 반야봉, 그리고 저곳은 촛대봉... 아! 신이여 저곳을 정녕 내가 지나온 것입니까?
정상에 우뚝서서 360도로 몸을 돌려가며 봤다. 눈아래 보이는 저 산들이 차라리 더 웅장해 보인다. 굽이굽이 이어져 저멀리 운무에 가리어 산정만 보이는 또다른 높은산까지 다다른다. 힘들게 오른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듯 행여 한곳 빠뜨리지라 않을까 눈속으로 머리속으로 채운다. 앞을 보고 있으면 뒤가 모자란것 같고, 옆을 보면 또 그 옆이 궁금하였다. 앉아서 보고, 물마시며 보고, 빵먹으며 보고 내눈은 먹이 쫓는 독수리 처럼 어느 한풍경이라도 놓칠 새라 깜짝임 마저 잊었다.
저멀리 중산리가 보인다. 나는 지금 정상에서 행복하다. 그리고 내려다 보이는 가파른 하산길은 내 아픈다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다. 중산리는 나를 다시 현실로 돌려놓았다. 배냥을 조우고 신발끈을 다시 맷다. 이제 하산이다. 내려간다는 아쉬움보다 하산길의 가파름이 더 부담스러웠다.
오른발은 고정하고 왼발을 내리고 게걸음처럼 옆으로 가니 할만했다. "내려가기가 오히려 낫네." 하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내려갔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등산객이 많지 않았다. 간혹 한명씩 눈에 띄일 뿐이었다.
30여분을 내려갔다. 이제는 오른쪽 다리까지 아프다. 무리해선 안된다. 최대한 아껴야 한다. 하산길은 양지라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계단길이라 앉기만 하면 길은 의자처럼 나를 받아 주었다. 법계사까지 2k인데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다. 나무계단의 난간을 잡고 억지로 억지로 내려가고 있는데 계단밑에서 학생인듯한 청년 한명이 측은히 나를 보고 있다. " 다치셨습니까? 조심해서 가십시오...그리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올라간다. 산에 오면 이렇듯 예의바르고 친절한 사람들 뿐인데 왜 현실은 그렇지 못할까....?
갑자기 변의(便意)가 느껴진다. 그리고 보니 산에 온이후로 대변을 보지 못했다. 화장실은 법계사에 가야 있는데 큰일이다. 이제는 아픈다리에 변까지 꾹참고 가야 한다. 가다가 앉아서 쉬자니 변의를 촉발시키게 되어 제대로 앉지도 못하게 되었다.누가 삶이 苦海라고 했던가 정말 맞는 말이다.
그때 어디서 목탁소리가 들렸다. 법계사에서 나는 소린가 했는데 숲속에서 났다. 새소리다. 어쩌면 저렇게 목탁소리처럼 들릴까. 고해의 삶을 살지말고 이참에 출가라도 하라는 관음보살의 부름인가?
아내와 아들의 생각이 났다. 스스로 생각해도 모자람이 많은 나를 만나 살아준 것이 고맙다. 함께한 시간이 행복하다. 그런만큼 내가 내아버지와 그 윗대로 부터 받은 부조리한 찌꺼기를 내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
법계사에서 반가운 인물을 만났다. 노고단에서 함께출발한 그 아름다운 청춘의 대학생 2명을 거기서 만난 것이다. 지기를 만난듯이 반가웠다. 벌써갔어야 할 그들은 중봉으로 길을 잘못들어 늦은 것이라 했다. 반가운건 둘째치고 마침 그들의 손에 화장지가 들려있어 뺏다시피 하여 화장실로 직행했다.
무슨 산악회에서 단체로 산에 오르는지 한 무더기인원이 올라왔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라 했더니 얼어서 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준비해간 초코파이로 떼우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프고 힘들다기 보다는 지루하다. 아직도 가야할 4키로가 지겹다. 끝까지 계단이다. 예전에 계단이 아니었을때 동행한 사람과 빨리가기 시합을 했다. 도랑처럼 파여진 길을 마치 봅슬레이 타듯이 내려갔다. 죽고 살고로 달려 거의 1시간 20분에 내려갔던 것 같다. 경쾌한 걸음으로 내려가는 청년을 보며 나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칼바위를 지나니 길이 괜찮아 졌다. 그래도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그보다 이제 다왔다는 안도감에 기운을 내었다.
그 고행의 끝은 나무가지 사이로 갑자기 다가왔다. 야영장이 보이고 다리가 보였다.이제 다온 것인가...?
터벅터벅 새로 짓고있는 매표소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도 풀리고 어깨에 맨 배낭이 무겁다. 갑자기 술 한잔이 생각났다. 가게에 가서 동동주에 파전으로 한잔할까. 아니면 소주라도 한병사서 나발불며 내려갈까...
몸을짓누르는 통증에 인상을 쓰며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갔다. 마침 내려가는 짚차가 정류장까지 태워주었다.
그곳에는 아까 그 대학생 둘이 있었다. 너 잘 만났다. 동동주 한잔하자...
그들은 부산대생으로 곧 임관할 RT들이었다. 훈련되고 정제된 젏은 그들은 보기가 좋았고 함께 한것이 유쾌했다. 군생활을 무사히 잘마치기를 빈다.
술이 약하니 두잔의 동동주에 알딸딸해졌다. 이제 진짜 종주의 끝이고 완성이다. 버스에 올라 의자를 뒤로 졌히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칠년전쟁을 끝내고 하늘로 오르는 이순신장군이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사십하나의 지리산 종주는 이렇게 이뤘다. 나는 이제 현실속에서 다시 기나긴 종주를 해야한다. 어쩌면 더 아플지도 모른다.
먹거리 꾸러미를 보니 집에서 싸온 밥이 하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햇반으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생전 처음 사온건데 먹어보지도 못한다면 그것도 억울한 일이다.내 앞자리에서 희발류 버너의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또 그옆에는 학생인듯한 두명이 취사를 하고 있는데 오! 맙소사 이들은 휴대용 가스랜지를 가지고 왔다. 박스에 넣어 아예 세트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거의 가마솥급의 코펠에다 끓이고 있었다. 일행은 두명이었다. 복장 또한 가관이었다. 소위말하는 등산용은 하나도 없었다. 운동화에 잠바에 그리고 목도리, 고깔모자...
저들이 진정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대학시절이 거의 저모습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격식을 따지고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었다. 산이 좋으면 산만 바라볼 것을 복장과 장비에 과도한 관심을 둔것 같다. 장비에 거품이 많다. 상혼에 놀아난 것 같기도 하다. 히말라야 등반도 아닌데 무조건 좋은 것만 찾고 외제를 찾는 것을 반성하게 만든다.
6시 20분, 아직도 칠흑같은 어둠이다. 헤드랜턴을 켜고 조심스레 천왕봉으로 발을 떼어 놓았다. 다리는 어제보다 많이 좋아졌다. 그러니 아주 조심조심 아껴서 걷는 거다... 이곳 저곳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불빛이 보였다.
촛대봉으로 향하는 계단은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방한 마스크를 쓰고 팔레스타인 게릴라 처럼 묵묵히 올랐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조심했으면 이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후회도 되었다. 다음부터는 산행전에 한 일주일 정도 뒷산에서 예행연습을 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처음으로 세석에 와서 지금처럼 춧대봉으로 오를때 등산로 주위 어디 쯤에 습지가 있어 노란꽃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어둡고 바람만 쌩쌩 불뿐이다. 촛대봉 오르는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한참을 걸어 정상에 도착을 했다. 저 멀리 동녂은 어슴프레 빛나고 있었다. 다시 어제의 일출이 생각났다. 기다렸다가 일출을 보고 갈까... 그냥 가기고 했다. 가는길에 곁눈으로 보면 될것이다.
촛대봉에서 내리막길로 들어서니 여전히 어둡다. 그래도 앞사람들이 길을 잘 밟아 둔지라 별 어려움 없이 갈수 있었다. 내려가면서 내다리는 어제수준으로 되돌아 갔다. 하지만 나는 통증에 익숙하고 다리의 불편함에 익숙해 졌다. 아주 능숙하게 다리를 끌면서 내려갔다. 15년쯤 전에 광진이라는 친구와 이길을 갔다. 하루지나자 나처럼 무릎이 아프다해서 내가 배낭 두개를 지고 갔다. 빈몸으로 탈래탈래 걸어 가는 그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저그 꾀병아닌가?'하고 생각했다. 그친구에게 미안하다.
어둑한 길을 가면서 도망친 반달곰 반돌이 생각이 났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지 않을까. 러시아 불곰과는 달리 지리산의 반달곰은 산에서 만나도 두렵지 않고 반가울것 같다.
봉우리 하나를 돌아서 보니 해는 이미 떠서 1미터 정도 솟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제의 감흥이 일지 않았다. 바람은 무섭게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가야할 길은 멀다. 굴곡된 그길을 나는 굼벵이 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갔다.
장터목산장 0.8k, 힘들게 언덕하나를 넘었다. 그러자 놀라운 관경이 드러났다. 마치 궁전의 정원길같은 아늑한 길이 나왔다. 그곳은 바람도 불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재충전이 되었다. 8시 30분에 드디어 장터목산장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석봉으로 통하는 계단이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처럼 펼쳐저 있었다. 지금 나에게 천국이란 단어는 높고 가파르단 의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바로 중산리로 내려 갈까... 아니다 이길도 만만찮다. 그냥 고다.....
제석봉으로 오르는 동안은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이를 악물면서 너무 오버 하지 않게 규칙적으로 쉬었다. 바람은 거칠었다. 큰맘먹고 산 장갑속에서도 손은 시렸다. 벌써 정상에 갔다가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장터목에서 자고 배낭은 산장에 두고 다녀오는 중이었다. 따뜻한 집을 마다하고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 묘한 동지의식에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와중에도 아가씨에게는 더 힘차게 인사를 했다.
천왕봉 0.5k, 웃음이 나왔다. 이것은 사기다. 0.5k란 거의 다왔다는 의미다. 그런데 통천문앞이 과연 천왕봉에 다온 것인가. 특히나 지금의 내몸상태로... 어제 세석0,6k 팻말에는 안도를 했다. 이제 굴러서라도 가겠구나 하고, 하지만 지금은 더욱 아득할 뿐이다. 지금 부터 죽었다...
이제는 철제계단이 난간이라도 붙잡을 수 있어 차라리 나았다. 들려지지 않는 다리를 팔로 당기면서 기다시피 갔다. 그래도 정상이 눈앞에 보이니 힘이 생긴다.
바람은 거세었다. 바람에 밀려 뒷걸음을 치면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10시 조금 넘었다. 그 때 그곳에는 세명이 있었다. 최근에 와서 그렇게 한적하게 천왕봉에 올라본 적이 없었다.
사진속의 이름과 실재를 대비하며 내가 어제 오늘 걸어온 곳을 뒤돌아 보았다. 저곳은 노고단, 저곳은 반야봉, 그리고 저곳은 촛대봉... 아! 신이여 저곳을 정녕 내가 지나온 것입니까?
정상에 우뚝서서 360도로 몸을 돌려가며 봤다. 눈아래 보이는 저 산들이 차라리 더 웅장해 보인다. 굽이굽이 이어져 저멀리 운무에 가리어 산정만 보이는 또다른 높은산까지 다다른다. 힘들게 오른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듯 행여 한곳 빠뜨리지라 않을까 눈속으로 머리속으로 채운다. 앞을 보고 있으면 뒤가 모자란것 같고, 옆을 보면 또 그 옆이 궁금하였다. 앉아서 보고, 물마시며 보고, 빵먹으며 보고 내눈은 먹이 쫓는 독수리 처럼 어느 한풍경이라도 놓칠 새라 깜짝임 마저 잊었다.
저멀리 중산리가 보인다. 나는 지금 정상에서 행복하다. 그리고 내려다 보이는 가파른 하산길은 내 아픈다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다. 중산리는 나를 다시 현실로 돌려놓았다. 배냥을 조우고 신발끈을 다시 맷다. 이제 하산이다. 내려간다는 아쉬움보다 하산길의 가파름이 더 부담스러웠다.
오른발은 고정하고 왼발을 내리고 게걸음처럼 옆으로 가니 할만했다. "내려가기가 오히려 낫네." 하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내려갔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등산객이 많지 않았다. 간혹 한명씩 눈에 띄일 뿐이었다.
30여분을 내려갔다. 이제는 오른쪽 다리까지 아프다. 무리해선 안된다. 최대한 아껴야 한다. 하산길은 양지라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계단길이라 앉기만 하면 길은 의자처럼 나를 받아 주었다. 법계사까지 2k인데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다. 나무계단의 난간을 잡고 억지로 억지로 내려가고 있는데 계단밑에서 학생인듯한 청년 한명이 측은히 나를 보고 있다. " 다치셨습니까? 조심해서 가십시오...그리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올라간다. 산에 오면 이렇듯 예의바르고 친절한 사람들 뿐인데 왜 현실은 그렇지 못할까....?
갑자기 변의(便意)가 느껴진다. 그리고 보니 산에 온이후로 대변을 보지 못했다. 화장실은 법계사에 가야 있는데 큰일이다. 이제는 아픈다리에 변까지 꾹참고 가야 한다. 가다가 앉아서 쉬자니 변의를 촉발시키게 되어 제대로 앉지도 못하게 되었다.누가 삶이 苦海라고 했던가 정말 맞는 말이다.
그때 어디서 목탁소리가 들렸다. 법계사에서 나는 소린가 했는데 숲속에서 났다. 새소리다. 어쩌면 저렇게 목탁소리처럼 들릴까. 고해의 삶을 살지말고 이참에 출가라도 하라는 관음보살의 부름인가?
아내와 아들의 생각이 났다. 스스로 생각해도 모자람이 많은 나를 만나 살아준 것이 고맙다. 함께한 시간이 행복하다. 그런만큼 내가 내아버지와 그 윗대로 부터 받은 부조리한 찌꺼기를 내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
법계사에서 반가운 인물을 만났다. 노고단에서 함께출발한 그 아름다운 청춘의 대학생 2명을 거기서 만난 것이다. 지기를 만난듯이 반가웠다. 벌써갔어야 할 그들은 중봉으로 길을 잘못들어 늦은 것이라 했다. 반가운건 둘째치고 마침 그들의 손에 화장지가 들려있어 뺏다시피 하여 화장실로 직행했다.
무슨 산악회에서 단체로 산에 오르는지 한 무더기인원이 올라왔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라 했더니 얼어서 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준비해간 초코파이로 떼우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프고 힘들다기 보다는 지루하다. 아직도 가야할 4키로가 지겹다. 끝까지 계단이다. 예전에 계단이 아니었을때 동행한 사람과 빨리가기 시합을 했다. 도랑처럼 파여진 길을 마치 봅슬레이 타듯이 내려갔다. 죽고 살고로 달려 거의 1시간 20분에 내려갔던 것 같다. 경쾌한 걸음으로 내려가는 청년을 보며 나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칼바위를 지나니 길이 괜찮아 졌다. 그래도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그보다 이제 다왔다는 안도감에 기운을 내었다.
그 고행의 끝은 나무가지 사이로 갑자기 다가왔다. 야영장이 보이고 다리가 보였다.이제 다온 것인가...?
터벅터벅 새로 짓고있는 매표소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도 풀리고 어깨에 맨 배낭이 무겁다. 갑자기 술 한잔이 생각났다. 가게에 가서 동동주에 파전으로 한잔할까. 아니면 소주라도 한병사서 나발불며 내려갈까...
몸을짓누르는 통증에 인상을 쓰며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갔다. 마침 내려가는 짚차가 정류장까지 태워주었다.
그곳에는 아까 그 대학생 둘이 있었다. 너 잘 만났다. 동동주 한잔하자...
그들은 부산대생으로 곧 임관할 RT들이었다. 훈련되고 정제된 젏은 그들은 보기가 좋았고 함께 한것이 유쾌했다. 군생활을 무사히 잘마치기를 빈다.
술이 약하니 두잔의 동동주에 알딸딸해졌다. 이제 진짜 종주의 끝이고 완성이다. 버스에 올라 의자를 뒤로 졌히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칠년전쟁을 끝내고 하늘로 오르는 이순신장군이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사십하나의 지리산 종주는 이렇게 이뤘다. 나는 이제 현실속에서 다시 기나긴 종주를 해야한다. 어쩌면 더 아플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