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23 :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겨울 지리산 설경
제게 지리는 겨울산입니다.
겨울산이 그리웠습니다. 어쩌면 당분간은 마지막이 될지 모를 지리의 겨울을
가슴에 담고, 사진에 담고 싶었습니다.
지리를 처음 만나고 얼마 안된 겨울의
4박5일의 종주는 내게 늘 잊어지지 않는 시간이 되었지요.
그 때는 지금의
장터목과 세석, 벽소령 산장도 없었고, 온풍기는 커녕 야속하게도 난로불 하나 지펴주지 않았지요.
너무 춥고 추워 4박5일동안 10시간도 채 자지 못한 산행이었지만, 온통 눈 속에 살다온 그 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2월23일 월요일, 겨울산을
만나기로 한 후에 설레여서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요.
그런데, 금요일,
토요일 산행을 하고 내려오신 분들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깜깜한 비소식이었습니다.
흰눈을
보고 싶어서,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순백의 산이 그토록 그리웠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한가닥 기대는 월요일에 날씨가 맑고, 기온이 내려간다는
예보였습니다.
아니, 그 예보가 아니라도 산에 가야지요.
23일 새벽 2시30분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장수IC에서 내려서 다시 88고속도로 남장수IC에서 인월로 들어섰습니다.
4시간만에
백무동 주차장입니다.
처음 계획은 남장수 IC 부근의 장군휴게소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주먹밥을 싸가지고 갈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지 않았더군요.
덕분에
죄송한 말씀이지만, 백무동 주차장에 주차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답니다.(^^)
어느
민박집 문을 두드려서 아침식사를 부탁하든지, 그냥 초콜렛으로 버티면서 장터목까지
가자고 마음 먹었는데, 차장 부근의 식당 '초가집'으로 안내되어 아침도 든든히
먹고, 도시락까지 싸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7시30분에 출발해서 하동바위까지
40분만에 올라왔는데, 역시나 어느분의 말씀처럼 눈이 새끼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늘이 밝아지면서 장쾌한 겨울능선을 만나리라는 기대로 한 걸음씩 올랐지요.
백무동 계곡에도 아침이 밝기 시작합니다.
아, 참샘에 이르자 얇지만 잔설이 내려 있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첫 손님을 맞이하는 산과 첫 손님이 된 산꾼은 행복했답니다.
고개를 드니 나뭇가지마다 하얀 옷을 입었습니다.
기가 막혔다는 23일 일출을 한 아침햇살이 반사되기 시작하자 환상이 열립니다.
파란 하늘까지 만나니 더할 나위가 없지요.
소지봉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눈이 참 곱습니다.
젖은 나뭇가지에 간밤에 눈과 안개가 함께 어우러저 만든 작품입니다.
백무동으로 지리를 찾는 이들을 품어주는 능선 길의 시작입니다. 소지봉을 지나서 시작되지요.
앗, 그런데 눈 앞에 열리는 것은,
설산이었습니다.
산죽과 하늘과 눈은 '길'이었습니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아내지 못한 이른 아침 지리산의 분위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 모습을 그대로 전하지 못해서 가슴이 아픕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과 하얀 눈꽃
조금씩 보이는 주능선도 눈으로 하얀 옷을 해 입었습니다.
한걸음씩 올라갈수록 눈꽃은 진해져만 갑니다.
망바위를 올라서기 전의 계단은 절정이었습니다.
망바위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제석봉
장터목 산장과 연하봉
한 눈에 들어온 주능선....
그곳에서 장터목으로 이르는 길에서 만난 눈꽃과 짙은 하늘빛은 그날 천왕봉이 나에게 줄 선물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호흡 한 호흡 아끼면서....
드디어 장터목 산장, 10시 30분, 길이 너무 좋아 지치는줄 모르고 단숨에 달려올라왔습니다.
장터목 산장 바로 앞, 중산리에서 올라오늘 길 오른편 벼량의 눈꽃....
제석봉을 오르는 길에서....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갈수록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칼날같은 바람은 몹시 불었지만, 따사로운 햇살을 이겨내지 못했지요.
이것은 눈꽃이 아닙니다. 조각품입니다.
아니, 어느 조각가가 이렇게 빚을 수 있을까요?
제석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하늘, 나무, 눈, 바위.....
순백과 차리리 검다고 할 푸른 하늘의 조화, 어울림입니다.
천왕봉인가요?
뒤를 돌아 주능선이 펼쳐집니다.
천왕봉 오르는 막바지....
내려다 보이는 제석봉
이날 천왕봉에는 '나'밖에 없습니다.
얼어붙은 천왕봉 정상
이 절경은 어제 그제 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진 비와 그로 인해 고생한 분들 덕이지요.
제석봉
멀리 중심에 주능선과 반야봉이 보입니다.
1시 30분, 장터목산장에 내려와 서둘러 밥을 먹고, 세석을 향합니다. 저물기 전에 세석에서 한신계곡으로 내려야지요.
연하봉에서 본 제석봉과 천왕봉
연하선경이라고 하나요?
설경이 선경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때, 그 빛 속에서만 선사해서 더 귀한 눈꽃을 마음껏 가슴에 담고 사진에 담아 행복합니다.
햇살은 비추어도 눈은 녹지 않습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 아쉬움을 남기며 애꿎은 사진기 셔터만 눌러대고 있답니다.
점점 멀어지는 천왕봉....
촛대봉에 이르자 눈이 거의 녹아가고 있었는데, 막바지 촛대봉은 또한 절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위에도 눈꽃이 피네요.
크리스마스 트리가 따로 없네요. 정말로....
눈꽃에 둘러싸인 세석산장
아직 봄 철쭉의 개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보다 아름다울까요?
산장 앞의 야광나무 눈꽃...
또 멀어진 촛대봉을 뒤로 하고,
3시에 한신계곡으로 하산했습니다.
하산길은 처음 1시간이 무척 고비였지요.
눈이
얼고, 계곡이 범람해서 온통 얼음발이었습니다.
서둘러 내려온 덕에 주차장에 이르니
6시가 되었습니다.
꼬박 하루 머물렀던 지리가 이제 제게 또하나의 영원으로 남을
것입니다.
생에 이런 눈 잔치, 이런 선물을 또 받을 수 있을까요?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