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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3.03.19 09:47

1940년도 유가야산기

조회 수 183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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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伽倻山記(유가야산기)

우리 마을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노라면 창이 줄지어 있고 깃발들이 꽂혀 있는 듯하며 구름 밖으로 은은히 비춰 보이는 것이 바로 가야산이다. 이 산은 최고운(崔孤雲)이 은둔했던 곳이며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를 바라보노라면 마치 신선이라도 있는 듯하다. 가야산 남쪽 홍류동에는 수석(水石)과 해인사가 있어 모두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니 이 때문에 놀이를 찾아온 사람들이 항상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 여기에서 발길을 그치고 정상에까지 올라가 그 아름다움을 더듬어 구경한 자가 적으니 이것으로 가야산의 아름다움을 다 구경했다라고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일찍이 그곳에 이르러 등산하며 산놀이를 하려고 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한두번 있었었는데 경진년(1940년) 삼월 보름에 족형 화은(華隱) 공술(孔述)과 이월헌(李月軒) 제경(濟卿)이 나를 찾아와 가야산 놀이를 한번 해 보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여 이에 다시 남추봉(南秋峯)경진(敬眞)과 이임헌(李任軒)대원(大遠)과 송덕원(宋德遠)과 함께 산놀이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추봉,덕원이 당시 무릉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십칠일에 출발하여 합천 영창(盈倉)에 이르러서 김희당(金希堂) 사문을 조문후 유숙하였고 그 이튿날 보림천을 거슬러서 외곡(外谷)에 사는 이노와(李魯窩)구지(久之)를 찾은 것은 또한 그와 함께 가기 위함이었다. 그 이튿날 구지가 길을 안내하여 심묘(心妙)를 거쳐 장항령(獐項嶺)을 넘어서 두 산 사이로 나아가니 골짜기는 통처럼 매달려 있고 하늘은 베 한폭 되는 것처럼 작아 보였고 사람의 말소리는 산울림으로 서로 울려 퍼졌다. 겨우 산등성이에 올라설 무렵 비가 내려서 발길을 재촉하여 골짜기 마을 집에 찾아가 쉬고 있으려니 조금 있다가는 비가 내렸다 그쳤다하기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 또한 갔다가 쉬었다가를 반복하였다.


이와같이 팔구리쯤 가서 숭산(崇山) 소학당(小學堂)에 이르러니 소학당은 김한훤(金寒暄)선생의 유적이다. 시냇가에 높다란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을 지동암(珍巖)이라 한 것은 정일두(鄭一 )가 일찍이 이곳에서 한훤당을 찾아왔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바위에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모두가 말하기를 이 소학당에 올라서 소학책을 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여 이에 한편을 들어서 연이어 암송하고 인하여 소학을 강론하면서 야반에 이르렀다. 그날밤 비는 멈추지 않았고 이튿날 아침에도 음산한 구름 또한 개이지 않다가 저물녂에야 개인 것을 보고서 이에 출발하여 학계(鶴溪)를 거쳐 매화령으로 넘어가니 이곳이 바로 가야산 서남쪽 기슭이다.

높고 높은 기이한 봉우리들이 차례로 바라보는 시야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사촌(蓑村)지각사(至各寺)를 거쳐서 시내를 건너 서쪽으로 가니 이 시내는 홍류동 하류이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매 무릉교가 있으니 이는 길이 통하는 곳이었는데 요즘에 들어서는 없어졌다. 이로부터 올라가매 물은 더욱 맑고 바위는 더욱 깨끗하고 세찬 여울물과 맑은 연못이 굽이굽이마다 더욱 기이한데 홍류동은 그 중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곳이라 하겠다. 서로 얽혀있고 굽이도는 물줄기와 세차게 부딪치는 물소리와 열이랑쯤 되는 수정처럼 펼쳐진 물결이 만 말의 구슬을 흩어놓은 것과 같아 보는 눈이 놀라고 듣는 귀를 깜짝 놀라게 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고운시(孤雲詩)에서 말하는 "흐르는 물로 산을 휘감는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인가 싶다.

여기에 이르니 감흥과 아득한 옛날 생각이 일어나매 "천고의 일을 어루만지매 한세상을 모두다 잊어버리게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되어 이에 술을 불러 취하였다. 취하면 바위에 의지하여 기대어 시를 읊고 시냇가에서 갓 끈을 씻으면서 마음이 가는대로 노래를 하였고 흐트러짐이 미친 듯도 한 것이 해가 저물고 추위가 스며오는 줄조차 몰랐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괴이하게 생각하였고 정신이 쓸쓸하고 몸이 썰렁한데 이르러 차가워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이후에 객사로 돌아가서 잠을 잤다.

이튿날 장차 산에 오르고자 서로 밥을 더 배불리 먹기를 권하고는 두 대의 술과 한 보자기의 과일을 싸 가지고 시내를 따라 수많은 소나무 숲을 뚫고서 기이한 경치를 만나면 곧 멈춰서 발길을 나아가는 것을 잊어버렸고 길을 육칠리쯤 굽이 돌아감에 산은 더욱 깊어지는데 이것이 해인사의 문이다. 그 이른바 고물장(古物藏) 장경각(藏經閣)이라는 곳을 방문하여 한차례 둘러보니  바로 해는 정오가 넘어섰다.

학사대(學士臺)에 올라 스님에게 등산로를 물었더니, 스님은 가리켜주었다."이 위로 곧바로 올라가다가 두 나무 사이로 따라가야 한다" 그 말을 들은 우리들은 스님이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근성으로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스님이 말한 두 나무는 보이질 않았고, 두 갈래 소로길이 있는데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원(大遠)이 앞서 나가 살펴보고서 왼쪽 길로 가는 것이 빠를 것 같다고 하여 그 길을 따라 들어섰는데, 잡초로 뒤덮인 산길은 가면 갈수록 더욱 희미하여 길이 끊긴 듯, 이어질 듯하다가 해묵은 등나무와 고사목 사이에 이르러 갑자기 산죽(山竹)이 우거져 산을 가리웠다.

깜짝 놀라 발길을 멈추고 대숲사이를 살펴보니, 실오라기처럼 작은 통로가 있었다. 이곳으로 가면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곳으로 들어서자, 대나무의 키는 우리보다 더 커서 머리까지 덮어버렸다. 손으로 헤치고 발로 밀치면서 한발한발 앞으로 나갔는데,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몇 걸음만 떨어져도 보이질 않아 말소리를 듣고서 서로 대답하였다. 그렇게 1리쯤 걸어갔을 때, 앞서가던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앞길이 막혔다."
다시 돌아서서 산골짜기의 길을 찾아가다가 갑자기 큰 골짜기로 떨어졌다. 위를 바라보니 삼나무, 전나무가 대숲처럼 뻑뻑하고 어디선가 아무 것도 없는데 산울림만 울려왔다. 더욱 두려움으로 의기소침하여 가시덤불을 휘어잡고 땅바닥을 기어 몇 리쯤을 걸어서야 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조금 전에 왼쪽 길로 접어든 것이 잘못인 줄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다시 기쁜 얼굴로 이는 산행의 추억거리라 말할 만하다고 하며 웃음 지었다. 가야산 정상을 바라보니, 올라갈 수 있을 듯 보였는데, 등산로는 더욱 험준하여 한 걸음 걸을수록 걸음마다 더 어려웠다. 여러 사람들이 권유로 옷을 벗어 나무 위에 걸어놓고 새로운 각오로 산을 올라 큰 너럭바위에 이르니, 몇 십 명이 앉을 만하였다. 너럭바위는 바로 봉우리 아래에 있었다. 잠시 쉬어가자 라고 하여, 가지고 온 술을 마시려고 하였지만 잔이 없었다. 경진(敬眞)이 나뭇잎으로 마셔보았고, 대원(大遠)이 안경집으로도 마셔 보았지만 모두 다 어줍잖았다. 이에 입을 대어 마시기로 하여 각자 고개를 쳐들고 마셨다. 양을 적당히 조절하기도, 잔을 돌릴 수도, 권할 수도, 반배(反盃)할 수도 없으니 이 또한 산중에서의 주도(酒道)가 아니런가. 갈증이 풀리기도 전에 술병은 벌써 동이나 또 서로 마주보고 웃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정상을 쳐다보니, 정상은 하늘 끝에 잇닿았고 등산로는 바위 틈 사이로 계단처럼 보였다. 길바닥에 쌓인 낙엽은 무릎까지 닿고, 두꺼운 얼음은 바위틈에 아직도 녹지 않고 붙어있었다.

우리는 빙빙 돌면서 물고기꿰미처럼 한 줄로 서서 올라가면서 가파른 절벽을 만나면 반드시 손으로 당기고 배로 밀치면서 올라가는데, 이따금 정신이 아찔하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봉우리는 온통 바위였고 그 사이로 조금 흙이 덮여있는데, 깎아지른 절벽은 천 길이나 되고 위태롭게 얹힌 바위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여 불안한 마음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 북쪽에 높다랗게 일리쯤 뻗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돌아섰다. 북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이 가야산의 최고봉이다.

그 남쪽에 움푹 패인 굴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속으로 가야하는데, 생쥐처럼 기어서 수십 보를 가야만이 그 바위를 나갈 수 있다. 석벽은 모두 가파라서 올라갈 수 없었는데, 한 곳이 비어있어 겨우 발을 부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손으로 엉덩이를 밀쳐 주어야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 봉우리 위에는 조금 흙이 덮어있는데 평평하다. 그 정상을 다 올라가면 우뚝 솟은 큰바위 하나가 있다. 그 바위의 동편으로 빗물이 담긴 돌구유가 있는데, 작은 개구리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큰바위 위에 올라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니 툭 트인 시야는 끝이 없어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수많은 산의 줄기와 수 없는 강줄기들, 탁 트여 막힘 없고, 얽혀 감싸 돌고, 높다랗게 융기하고, 그윽하게 깊은 경관들은 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하던 경관들이었다. 하염없이 좌우를 둘러보노라니 나의 눈앞에 모든 것들이 다 모여든다. 때마침 바람도 불지 않고 운해(雲海)도 다 걷히었는데 한가로이 멀리 바라보노라니 산신령이 보이지 않게 우리를 도운 듯 싶다.

서로 손가락질하고 돌아보며 흔쾌히 놀다가 잠시 후 또 뭔가를 잃은 듯 허전하고 무슨 생각이나 있는 듯이 서글펐다. 한참 후에 생각하니 옛적에 동봉 김열경(東峯 金悅卿: 김시습의 자)이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에다가 "요산요수(樂山樂水) 네 글자는 사람들의 똑같은 마음인데, 나는 왜 산에 올라서도 울고, 물가에 임해서도 우는 것일까? 산수를 즐기는 마음이 없어서일까라는 글을 썼다. 나는 그의 문장을 읊조리면서 그의 마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비록 김시습의 청광(淸狂)을 본받을 수 없으나, 시대의 변화와 쓸쓸한 마음은 김시습이 만난 시대에 못지 않다. 산수에 임하여 서글픈 생각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알만하다. 더욱이 최고운의 고상한 지행과 세속의 초탈 또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가야산에 올라 어찌 천지 사이에 스스로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없겠는가.  

다시 석벽의 빈자리를 따라 배와 엉덩이를 대고 내려가는데 올라올 적보다 더욱 어렵다. 암벽 모서리에 벌어져 흔들거리는 바위조각이 있었는데 제경(濟卿)이 말하기를 이 바위는 올라가는 데 장애가 되고 위태로우니, 후일의 등산객을 위해 이를 없애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모두가 힘을 합하여 밀치니 큰소리를 내면서 떨어져나갔다. 모두가 잘되었다고 말하며 잃었다가 찾았던 길을 찾아 내려가니 가깝고 편하여서 올라갈 때와 비교해보면 열에 여덟, 아홉은 힘이 덜 들었다. 지나는 길에 두 나무로 얽어놓은 외나무다리를 보고서야 서로 바라보면서 웃었다. "스님이 말한 곳이 여기 아닌가?" 잘못하여 왼쪽으로 접어든 길목에 이르러 망연자실한 듯 서글펐다.

지난번 나는 가야산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그의 말이 산에 산죽이 우거져 오르기 어렵다고 하더니만, 그 역시 좌측 길을 따라 올라갔는데에도 지금까지 잘못 간 줄을 모른 자라 하겠다. 자신이 길을 잘못 알았고, 잘못 말해준 이에 대해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혼미하여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자신도 그르치고 남까지 그르쳤다는데 대해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슬픈 일이다. 어찌 가야산의 등산로만이 그러하겠는가. 이 세상의 이치는 끝이 없는 것인데, 제 혼자 똑똑한 나머지 하나에 집착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자를 보면, 오늘 왼쪽 길로 잘못 접어든 이들과 다를 자 거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내, 느낀 바 있어 탄식한 까닭에 이를 기록하여 함께 등산하였던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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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메 2003.03.19 11:10
    사실적이면서도 운치를 더하니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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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3.03.20 13:26
    권변호사님 홈페이지에서 조부님께서 한자로 기록하신 내용을 잘보았습니다. 유림특유의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었고 조리있고 흥미로운 글을 읽으며 그분의 학문과 인격이 엿보였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하신 이야기. 후일의 등산객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신 이야기. 그 당시에는 물자도 부족하고 힘드셨을텐데 참 대단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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