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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더욱 지리산, 그 너른 품이  간절하군요.
여러 님들이 올려주신 산행기를 며칠 동안 둘러만 보다가 몇자 올립니다. 수십 수백가지의 지리산 등반로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재미있게 읽기만 하다가 제게 얽힌 지리산의 추억도 간절히 생각나 산행기를 어지럽힐까 저어하면서도 용기를 냅니다.  

89년도 8월 이었네요. 다니는 성당에서 한 스무명이 떼지어 간적이 있습니다. 학생들 데리고 산간학교다, 신앙학교다 도떼기 시장판같은 초여름 두달을 보내고 나니 스무살 초짜 교리교사들은 진이 다빠지고 이것저것 다 마무리 짓고 평가회를 빌미로 훌쩍 떠났더랬습니다.

젊은 신부님, 신학생들 그리고 대학생 교리교사들 한 스물 남짓에 남자 몇 안되었지요.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 합니다만 아마도 거림으로 해서 세석평전갔다가 천왕봉 오르고 백무쪽으로 내려 온 듯 하네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부터 나오는게,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를  2박 3일 동안 고생고생하며 지리산 능선을 굴러 다니다시피 한 기억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 완전 초보라서 준비할 것도 별로 없겠다싶어 백고무신에 기타하나 메고 쌀 한줌 들고 떠났었지요. 그런데 선배들은 별로 말릴 생각도 않고 그예 데리고 가더니 동기 여학생들 짐을 다 떠넘기는 겁니다.

산길 따라 걷다보니 고무신은 자꾸 벗겨지고 앞으로 멘 기타는 출렁이고 등짝에 얹힌 남의 짐은 무겁기만하고 반대편에서 마주오는 다른 이들은 키득거리며 농반, 걱정반의 인사를 건네고 가더군요. 노끈하나 줏어서 신발 안 벗겨지게 묶고나니 무슨 보부상도 아니고 허위허위 세석까지는 갔더랬습니다.

거기서 퍼들어져 텐트치고 일박을 하였지요. 맨몸으로 사부작거리며 올라온 딸내미들이 더 죽겠다고 악을 쓰는데 은근히 약도 오르고해서  짐짝을 패대기치고 맙니다. 그날 저녁 일용할 양식을 함부로 다뤘다고 선배들이 혼내더니  밥도 조금만 주더군요.
속으로 그랬습니다. '그래 니들 다먹고 다 똥으로 가라, 화장실도 없는데...'

소주 한잔 먹고 울적한 마음 달래려고 애물단지 기타를 꺼내 튜닝하고 한곡 하려는데 우리 텐트 위 너른 바위에 누가 앉아 대금인지 퉁소인지 불기 시작하더군요, 하긴 줄도안맞는 기타하고 애잔한 대금소리 하고 비교가 될리 없지요. 기타 도로 집어 넣고 다시 술잔들고, 긴머리 휘날리며 대금불던 멋진 남자를 안주삼아 씹었습니다.

다음날 일어나니 열두시가 훌쩍 넘어 있더군요. 갑자기 비는 오고 널브러진 금복주 댓병 서너개 정리하고 장터목까지 갑니다. 고무신은 더 잘 벗겨지고 짐은 더 무겁고 기타는 어디 불피울때 쏘시개로 던져 버리고 싶어지더군요. 여차여차해서 장터목 도착해 짐 벗어놓고 천왕봉 다녀오고 나니 태풍오니까 다 내려가라고 난리도 아닙니다.

백무쪽으로 하산길을 잡고 내려오는데 그만 날이 저물어 하루를 더 잡니다. 하긴 그때는 중간에 퍼진 여학생들 때문에 10분 걷고 쉬고를 반복했으니 하산이 아니라 그냥 기어내려왔다고 하는게 옳을 듯 합니다. 전 고무신 신고 기타들고 지네들 짐까지 다메고도 오는데 동기 여학생들은 등산화에 맨몸에 지팡이 짚고도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니 참 난감했었지요

등산로 여불때기에 자리잡고 남은 음식 다모아 최후의 만찬을 합니다. 먹을 건 별로 없고 금복주 댓병만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그래도 기타꺼내 바람부는 가운데 치고 놀며 그렇게 밤을 보냈지요.

그때 마음에 두고 있던 동기 여학생이 있었는데 갑자기 술먹다가 사라지길래 혹시나 싶어 등 토닥여 준답시고 으슥한 산길을 랜턴도 없이 뒤따라 갔었지요. 저 덤불너머 무슨 소리는 들리는데 아뿔사, 토하는게 아니라 다른 볼일을 보고 있더군요.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서로.
어제 나 밥안주고 지네들끼리 그렇게 많이 먹더니...

도로 내려와 혼자 파장하고 텐트 들어가 잤습니다. 무슨 일 있냐고 다른 이들이 들어와 깨웠지만 말을 못하겠더군요. 아침에 눈뜨니 서로 슬슬 피하고 참 서먹했지요. 지금은 시집가서 잘 살고 있겠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웃음부터 납니다.

하여간 바로 내려와 백무계곡 빼곡한 동동주집에 스무명 앉아 술부터 들이키기 시작하는데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집니다. 낮술에 피곤한 몸에 그래도 내려 왔다는 안도감에 다들 퍼지고 대구까지 어떻게 왔는지 지금도 알길 없습니다.

지금은 야영금지, 노상방뇨 불가이겠지만 15년전 지리산은 뭐 그렇게 다녀올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분들 너무 화내지 마시길...)
어쨌던 제겐 추억으로 남아 있는 시절입니다.

그 뒤로도 1박으로 가서 텐트 버리고 온 일, 겨울 뱀사골 야간산행 갔다가 달랑 20분 오르고 길 잃어 눈파서 수프 끓여먹고 도로 내려와 민박집에서 빈둥대다 돌아온 일 등이 기억에 남네요.

이번 가을에는 마누라 꼬셔서 애기 데리고 소풍이나 다녀와야 겠습니다. 삼사년 후의 가족산행 계획에 지금 막 가슴이 부풉니다.    
  
  
        








            
  • ?
    타타타 2004.10.23 14:10
    하하하~
    산행기 읽으면서 뒤집어져 보긴 처음입니다..
    꼭 다시 다녀와서 산행기 부탁 드립니다.
    하하하하~
  • ?
    해성 2004.10.24 00:08
    ㅎㅎ 15년전 지리산행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짧지만 액기스만 있는 진정 재미있는 산행기 잘보았습니다.
    산행기 종종 올려주세요!
  • ?
    아낙네s 2004.10.25 09:10
    푸하하하~
    그래도 힘들게 가지고간 기타줄 팅겨보기라도하셨으니
    애물단지만은 아니였네요 ^^*
    지리산에 얶힌 남은 에피소드들도 기대가되는데요~
    재밌는 산행기로 월욜아침 시작할 수 있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느린걸음 2004.11.12 01:59
    너무 웃깁니다.
    그런데 지리산엘 고무신만 신고서 다녀오셨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들 짐에 기타까지,,
    대단하십니다^^
    너무나 재미난 추억때문에 지리산을 더 잊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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