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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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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전문가들이 보시면 부끄럽습니다만, 이렇게 처음 지리산 산행을 하고 난 느낌을 남기고 싶어서 글을 적어 봅니다. 처음이라 그런지 지리산 자체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적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다음 번 지리산을 방문한다면 조금 더 여유있게 산행하면서 지리산을 느껴 보고 싶습니다...

2002년 상범이의 지리산 종주기

8월 22일, 목요일 : 출발 1일전, 철저한(?) 준비 작업
날씨 : 이 날은 준비하는 날이기 때문에 날씨는 상관없음. 사실 비가 조금 왔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남.

이 날 오후부터 나의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은 늦은 듯한 여름 휴가… 집으로 가는 길에 점심으로 삼계탕을 든든하게 사 먹고서 집에 도착했다. 일단은 어제 빌려 놓았던 비디오 ‘반지의 제왕’의 후편을 보기 시작했는데, 침대에 누워서 보던 관계로 조금 보다가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오후 4시 정도에 일어나자마자 지리산 종주를 결심하고서(몇일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 날 오후 잠자면서 확실하게 결심했음),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지리산 산행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대피소에 관한 정보, 산행을 위한 정보, 날씨, 교통비, 필요한 준비물, 다른 사람들의 지리산 산행기 등을 체크하고 난후에 나에게 가장 적합할 것 같은 일정을 결정하였다. 처음에 계획했던 일정은 3박 4일로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산행을 시작하면서 일정은 변경되고 말았다.

1일차 : 경기도 성남 -> 화엄사 -> 노고단 대피소
2일차 : 노고단 대피소 -> 연하천 대피소(점심 식사) -> 벽소령 대피소
3일차 : 벽소령 대피소 -> 세석 대피소(점심 식사) -> 장터목 대피소
4일차 : 장터목 대피소 -> 천왕봉 -> 치밭목 산장 -> 대원사(끝)

지리산 종주는 처음이거니와, 산행을 하는 것 자체가 거의 6~7년 만에 처음이라서 내가 어느 정도로 산을 탈 수 있을지 몰라서 조금 여유가 있다 싶게 일정을 준비하였다. 사실 약 7년 전에 대학교 선배들과 지리산을 갔었는데(당시 2박 3일, 대원사->치밭목->천왕봉->세석->하산), 그 때 첫 날 치밭목 산장까지 가는데 거의 죽지 않을 만큼 고생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석에서도 더 갈려던 것이 원래 계획이었는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죽겠다고, 더 못 가겠다고 해서 세석에서 그냥 내려왔었다. 그 죽을 것 같던 지리산 산행의 첫 날, 나는 거의 밤 8시에 치밭목 산장까지 기어 가다시피해서 도착했다.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지리산을 올라간다는 게 무서웠고, 나의 체력이 견딜 수 있을지를 몰랐다. 과연 그때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날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 때하고는 많이 다르다. 일단 기본 체력은 매일 헬스 클럽에서 운동을 해온 관계로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고, 그 당시의 몸무게보다는 약 30 Kg 이 줄어 있는 상태이다. 어느 정도는 내 자신의 체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지리산 종주를 결심하게 된 동기이다.

저녁 6시쯤. 필요한 준비물들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혼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집안에 별로 있는 것이 없다. 당연하게 산행에 필요한 장비들도 하나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근처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 등산 전문점 등등을 돌아다니면서 등산화, 등산용 배낭, 코펠, 식량 등을 모두 구입하였다. 참고로 여기에 소요된 비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등산용 부식 및 기타 준비물        
캠핑용 가스             3        \3,900
카레                       3        \4,350
신라면                    5        \1,900
찰떡초코파이           2 박스 \1,980
모카커피                 1 박스 \1,150
영양갱                    4 개    \1,520
핫브레이크              3 박스 \3,660
오이                       4        \2,200
햅쌀밥                    3        \3,840
흑미밥                    3        \4,350
자바라(물통)            1        \1,420
알카라인 건전지 AA  1        \5,590
합계                                \35,860

등산 장비는 어차피 이번에 사면 당분간 계속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조금 좋다 싶은 것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등산 장비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괜히 비싸게 돈을 들여서 산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특히 등산화의 경우는 나의 안전한 산행, 편안한 산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가볍고 좋은 것으로 구입했다. 등산 장비를 제외하면 필요한 준비물은 35,860원 밖에 들지 않았다. 역시 혼자서 다니는 것은 비용이 작게 들어서 좋다. 이번에 산행을 하면서도 모자란 것은 없었다. 식량은 충분했다.

저녁 11시쯤. 준비해 둔 식량과 필요한 옷가지들 및 기타 준비물 등을 준비해서 배낭에 넣었다. 준비한 옷가지들은 다음과 같다.

반팔티 여분 2벌, 반바지 여분 1벌, 수건 2개, 세면도구, 긴 트레이닝복 1벌, 윈드브레이크용 상의 1벌, 속옷 4벌, 양말 2벌

이렇게 해서 필요한 준비물들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 이 날 밤 중에 본사에 있는 외국인과 중요한 전화 통화가 있어, 이 사람과 통화하고 필요한 내용들을 회사에 알리기 위해서 밤 12시 30분 정도까지 E-mail을 작성하고서는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오랜만에 어린 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어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었구나.. 지리산은 벌써부터 나에게 그렇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8월 23일, 금요일 : 1일째. 고요한 혼자만의 산행.., 약 7 Km
경기도 성남 -> 서울역 -> 화엄사 -> 노고단 대피소
날씨는 구름이 많이 끼어 있어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실제로 이동하는 중에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기도 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 5시 20분쯤.
기상. 세수하고 볼일 보고 문단속, 전기, 가스 등등을 점검(사실 한번 훑어 보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후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음)하고서 집을 나서서 태평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아침에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괜한 생각인가? 지리산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도시인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생각되게 만들고 있다.

아침 7시 50분.
서울역에서 전남 구례구역으로 가는 무궁화 열차(18,400원 정도. 표를 사는 때에 따라서 할인율이 적용됨)를 타고서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에 보통 때는 많이 먹지 않는 인스턴트 음식을 아침으로 먹었다. 산행을 하는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엄청난 열량을 소모해야 되기 때문에 꼭 음식물을 챙겨 먹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무얼 먹을까 생각하는데 눈 앞에 띵.. 버거킹이 보이길래 들어가서 와퍼 1개 & 콜라 1개를 먹었다. 이 와퍼가 생각보다 맛있었다. 빨리 먹고 기차 타러 플랫폼으로 내려 갔다. 기차 여행 또한 오랜만이라서 기분이 무척이나 새삼스러웠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기차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상상이 되었다. 박하사탕에 나오는 영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장면에서의 그 기찻길도 생각나고. 그런데 기차가 안 좋아서 그런지 냄새가 좀 나서 별로였다(역시 실제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냄새가 그리 심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10호 차의 창가에 앉았는데, 옆에 외국인이 와서 앉아서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나는 잠을 청해 보았다.

오후 12시 52분쯤.
구례구역에 도착. 도착하기 전에 열차 안에서 점심으로 김밥(3,000원)을 사 먹었다. 누군가의 글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서 바로 이동했다가 무척 힘들었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구례구역에서 바로 화엄사로 이동하려면 점심 먹을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구례구역에 도착해서 지도, 물 등 이것 저것 사다 보니 구례구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놓쳐 버렸다. 버스가 기다리고 서 있는데도 다음 차가 빨리 오겠지 않고 천천히 돌아다니는 바람에 이 버스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거의 오후 2시까지 구례구역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기다리면서 점심을 먹을 시간은 충분했었다. 구례구역을 나오면 식당들이 몇 개 있는데 그 맛들이 어떨까 궁금해졌다. 나는 이런 곳에 오면 꼭 그 지방의 토속 음식을 꼭 먹어 보고 싶어하는데 기차 안에서 김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이 곳 식당에서 한번 점심을 먹어볼 만 하겠다. 구례구역에서 버스 타고 구례구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700원). 여기서 다시 화엄사로 가는 버스 타고서 화엄사로 이동(700원). 이 버스는 화엄사에서 내릴 때 돈을 내면 된다. 화엄사 밑 매표소 입구에서 내려서 걸어가기 시작. 바로 이 지점에 매표소가 있으며 매표소에서 입장료 3000원을 내야 한다. 이 금액에는 공원입장료 1,300원과 문화재관람료 1,700원(화엄사 때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지리산 종주를 끝낸 지금 문화재를 본 기억은 없고, 화엄사는 입구를 스쳐서 지나가 버렸다. 다음에 여유 시간이 있다면 한 번 가 봄 직 하다. 같이 이동을 시작한 일행으로 학생인지 직장인인지 젊은 친구들 2명만이 있었는데 이들은 매표소에서 들어가자 마자 택시로 화엄사 입구까지 이동하였다. 같이 타고 가자고 하는 것을 극구 사양하고서는 나는 그냥 걸어 갔다. 놀라운 것은 노고단 대피소에는 내가 먼저 도착해 버렸다는 것이다. 매표소 입구를 지나서 혼자서 걸어 올라 가는데 일련의 무리들이 내려 오고 있었다. 그 중에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자기네들끼리 게임을 하고서 한 명이 졌는지 내 앞에 와서는 부끄러워하면서 “즐겁게 구경하고 가세요”하면서 인사를 꾸벅 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나도 예전에 많이 했던 장난이다.. 하하.. 귀여운 녀석들.. 시작이 나쁘지 않다!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도중.
햇볕은 별로 보이지 않고, 흐리기만 해서 산행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오랜만의 산행이라 역시나 금방 다리가 아파왔으며, 배낭을 맨 어깨도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어깨뼈가 결려 왔다. 옷은 벌써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으며, 하도 힘이 들어서 제대로 경치 구경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후 늦게부터는 계속 오르막길이 계속 되면서 머리 속에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내려가 버리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천히 다리를 옮기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서 움직이니 그럭저럭 올라갈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느낀 것은, 산행을 하게 되면 나의 경우에는 몸이 힘들기 때문에 머리 속은 깨끗하게 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했던 회사 일, 생활 속의 고민들을 모두 머리 바깥으로 밀어내 버리고서 아주 비어있는 공간으로 머리 속을 채울 수 있다는 것. 멋졌다… 도대체 내가 몇 걸음이나 걷고 있는지 숫자나 세면서 올라갔다. 이 길에서는 지리산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기는 어려웠다. 계속 숲속이 이어지면서 멀리로 볼 수 있는 그런 경치는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지리산 속을 혼자서 걸어 올라간다는 것. 마치 시골집에 온 것 같은 풀 냄새, 물 소리 등등.. 너무나 빨리 흘러가 버려서 아깝기까지 한 시간들이었다. 더욱이 같이 가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어서 더욱 혼자 만의 시간들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중간 정도에서 아까 화엄사까지 같이 왔던 2명을 만났다. 이들이 너무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빨리 걷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서로를 보면서 놀라워 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나는 이들을 뒤로 한 채 빨랑빨랑 걸어가니 어느새 노고단 대피소가 눈 앞이었다. 노고단 바로 밑에서 부터는 좋은 도로가 있었다. 여기까지는 차를 타고 올 수 있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첨부터 걸어 오고 싶었기 때문에. 여전히 사람은 없었고 오직 자욱한 안개만이 나에게 어서 오라고 반가운 인사를 농도 짙게 건네었다… 약 0.5 Km 못 미쳐서 두 갈레 길이 나타났다. 좋은 길이지만 돌아가야 되는 먼 길, 험하지만 짧은 길.. 어느 길로 가도 지리산이다. 돌아가도 좋고, 빨리 가도 좋다. 나는 짧고 힘든 길을 택했다. 한가지 더..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18시 10분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화엄사부터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약 7 Km). 대피소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해 놓아야 하지만(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사전에 전화를 해 보고서 인터넷으로만 예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세삼스레 우리 나라의 인터넷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면 내가 세상 물정에 너무 무심한 것인가?) 주말이 끼어 있어서인지 이미 모두 예약이 되어 있는 상태여서 예약을 할 수 없었다. 그냥 관리 아저씨에게 숙소 이용할 수 있냐고 하니깐 당연히 예약 여부를 물어 보고, 예약 못했다고 하니깐 바로 18번 침상의 표를 주었다(5,000원). 이미 대피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몇 명은 피곤했는지 쓰러져서 기절(?) 내지는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침상은 그냥 나무로 되어 있는 마루 같은 곳이었으며, 발을 뻗는 곳에는 배낭을 올릴 수 있도록 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밑에도 물건을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곳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이 더 좋아 보였다. 땀에 젖은 옷과 수건들을 난간에 말릴 수 있으니깐. 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공간은 가로로 약 30 cm 정도, 세로로는 180 cm 가 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 똑바로 누어 있으니깐 옆 사람하고 어깨가 마구 닿았다.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리산에서 이렇게라도 잘 수 있는 것이 어딘가. 야영은 금지이며, 바깥에서 취사도 금지이다. 취사장이 따로 있는데, 여기서 신라면과 흑미 햇반을 데워서 먹었다. 내가 가지고 간 가스 버너는 가스가 불량이었다(집에 와서 다른 가스로 시도해 보니 잘 되었다. 그런데도 멍청하게 그냥 안 되는 가스로 2박 3일을 버티다니.. 사실 급할 것은 없었기에 천천히 해도 괜찮았다… 난 이렇게 느긋한 인간이다). 최고로 가스를 켰는데도 불구하고 물 끓이는데 20분이 넘게 걸렸다. 입에서 욕이 마구 나오려는 것을 겨우 밥과 라면으로 막았다. 흑미 햇반은 생각보다 맛있었고, 라면도 맛있었다. 뭐가 맛이 없겠는가? 그렇게 힘들게 올라왔으니… 물 끓이다가 또 한번 생활 속의 과학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높은 지역이나 기압이 낮아서 물의 끓는점이 높다는 점이다(이것이 맞는 이야기인가? 틀리면 음..). 그래서 코펠 뚜껑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 놓아서 내부 압력이 높도록 해 놓아야 물이 빨리 끓는 다는 것(예전에 산행하면서 본 적이 있었는데 하도 오랜만에 산행이라 생각나지 않았음)이다. 나는 그냥 물 끓이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거 보고 나도 다 아는 척하면서 빈 코펠(아주 가벼움) 올려 놓았다가 여전히 물이 안 끓어서 다시 돌멩이 가져다가 올려 놓았다. 말은 못 했지만 조금 쑥스러웠다. 캬캬캬.. 여기서는 세제를 사용해서 설거지 하면 안된다. 사실 세제는 가져 가지도 않았지만. 라면을 끓인 코펠은 대강 물로 씻고 말았다. 라면 끓인 코펠은 라면 기름기 남아 있었으나 손으로 대강 씻고 말아 버렸다. 그리고 휴지로 적당히 닦아 내었다. 라면 기름기가 손으로 다 옮겨 붙어 버렸는데 다행히 액체형 비누를 가지고 가서 손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음. 사실 비누가지고도 씻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연보호… 잊지 말자. 좋은 산을 계속 보고 싶다면 말이다.

20시쯤.
밥 다 먹고 일찍 잠을 자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도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옆에서 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시끄러운 소리, 코고는 소리, 밤 새도록 이빨 가는 소리(이 사람 정말 대단했음. 밤 새도록 이빨을 갈았는데 아마도 이빨의 1% 정도는 정말 갈아져 버렸을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도 어떻게 대책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침상 배정 받는 소리 등등. 나중에는 하도 시끄러우니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한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악을 쓰자, 다른 사람은 왜 악을 쓰냐면서 서로 설전이 오고 갔음. 나도 속으로 욕을 했으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 바로 옆에 있는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은 나보다는 조금 나아서 내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욕을 했다. 어떤 아저씨 1명은 술을 먹고 들어와서는 자기 부인이 아닌 것 같은 여자와 한 30분 정도 쓸데 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는 바람에 웃기지도 않았다. 이 통화 후에 바로 자기 딸로 보이는 애와 통화를 다시 계속하더니 그리고 자기 부인과 다시 핸드폰 통화를 했다. 통화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 같았다. 하도 가까이 있으니깐 핸드폰 통화 소리도 다 들렸다. 지리산을 올라오는 길은 좋았는데, 대피소에는 지리산 밑의 생활 모습,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대로를 노고단 대피소로 옮겨 놓은 것이어서 별로 였다. 하긴 그 사람들이 어디 가겠나.. 나 자신도 바뀌지가 않는데… 그렇게 지리산에서의 첫 날 밤이 깊어 갔고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8월 24일, 토요일 : 2일차, 대구 처녀와의 인상적인 만남, 약 22 ~ 23 Km
노고단 대피소 -> 삼도봉 -> 연하천 ->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날씨는 화창하게 갬

새벽 4시쯤.
기상.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원래는 새벽 5시에 일어나려고 했었는데… 이 사람들은 저녁에도 떠들더니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서 부산하게 새벽 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산행에서는 일찍 다니는 것이 그만큼 유리하다고 하니… 어쨌든 시끄러워서 나도 일어나 버렸다. 이 떠드는 사람들은 모두 일찍 준비하고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려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도 취사장에 가서 역시 햇반 1개와 카레 1개를 데워서 먹었다. 가스 버너 때문에 속이 상했지만 준비해 간 카레가 워낙 좋은 것이라(1,000원이 넘는 것임. 안의 내용물 충실함. 강추. 레또 카레), 맛이 너무 좋았다. 그냥 햇반 데워서 껍질 벗겨서 바로 카레 넣어 먹으니 설거지 할 필요도 없었다. 혼자서 산행할 때는 왔다 였다. 혼자 산행 하시는 분에게 강추한다. 햇반과 인스턴트 카레나 짜장류.. 그리고 한가지 놀라운 것은 다리가 별로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다리가 아프지 않을 수가.. 그냥 다리가 멀쩡했다. 예전 생각을 해 볼 때 첫날 무리하게 산길을 걷고 나면 다음 날 다리에 알이 생기고 온 몸이 아프기 마련인데 괜찮았다.. 하하.. 오늘도 문제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새벽 5시 45분쯤.
출발. 가다가 이상한 갈림길이 나왔다. 별다른 표지판도 없고, 두 길 중에서 한쪽 길이 더 잘 되어 있는 것 처럼 보여서 그 쪽이 천왕봉이려니 하고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그곳에 쉬고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내가 가려던 쪽은 반야봉쪽이라고 했다. 뭐.. 반야봉 갔다 와도 좋겠지만.. 역시 모르면 물어 보고 가야 한다. 표지판이 없는 것이(없는 것인지 내가 못 본 것인지…) 이상했다. 어쨌든 천왕봉쪽으로 발길을 다시 옮겼다. 여기서 재미있게 생긴 총각을 만났는데 마치 브라질팀의 호나우딩요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머리도 파마했다. 이 팀과는 나하고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계속 중간에 만나게 되었다.

아침 7시 52분쯤.
삼도봉 도착. 여기서 무슨 3개 도가 합쳐지는 곳이라고 했다. 잠깐 생각에 잠기고 싶었지만 힘들어서 별로 신경쓰이지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산행을 하면서 수많은 나무 종류와 꽃 종류들을 적어 놓은 표지판을 보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 머리 나쁜 인간이여..

아침 9시 55분쯤.
연하천 대피소 도착. 물을 다시 가득 채웠다. 물은 항상 채울 수 있을 만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가득 채우고 가야 한다는 것이 Extreme Sport를 하는 나의 신조이다(이게 무슨 오지 탐험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나에겐 오지 탐험이었다). 언제 어떻게 물이 모자랄지, 어떤 상황이 발생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물통 2개를 가지고 갔는데 1개만 이용하고 나머지 1개는 비상용으로 그냥 보관해 두었다. 이 날은 출발부터 2시간 간격으로 준비해 간 핫브레이크를 섭취해 주었다(그래서인지 다리 근육에 젖산이 축적되어 알이 생긴다는 현상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체력이 좋아진 건지, 계속해서 단 것을 먹어서인지…)

11시 50분쯤.
벽소령 대피소 도착. 원래 3박 4일 계획으로 여기에서 2박을 할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도착해 버렸다. 이 놈의 다리가 지멋대로 빨리 움직여 버린 것이다. 계속 나 자신에게 놀라워 하면서 올라왔다. 준비해 온 점심용 쵸코 찰떡파이 5개를 홀랑 먹었다. 딴 사람들은 여기서 밥하고 난리 났다. 그러나 혼자 산행에서는 간편한 것이 최고. 쵸코 찰떡파이 5개를 맛있게 먹고 물도 맛있게 먹고서 다시 출발. 물론 출발 전에 다시 물통을 100% 충전. 쓰레기는 반드시 봉지를 준비해가서 여기다가 계속 모아 두었다가 마지막 날에 버리기로 했다. 자연보호! 세석 대피소 정도에서 2박을 할까 생각하다가 가는 김에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고, 다음날 아침 일찍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3박 4일의 종주 계획이 2박 3일로 줄어 들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세석으로 가는 처음 1 Km 정도는 아주 편안한 길이었음. 그래서 야호 소리도 지르고, 경치도 구경하면서 걸어 갔다. 이곳은 탁 트인 곳이어서 지리산의 경치를 구경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날씨도 좋아서 멀리까지 시원하고 탁트인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온통 초록색으로 덮여 있는 산을 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이렇게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2박 3일간의 종주 동안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더 좋았다. 너무 멋져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했다… 금방 복잡한 세상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도시인이겠지만..

오후 15시쯤.
세석 대피소 도착. 예전에 기억하던 세석과는 약간 다른 것 같았다. 일단 다시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는데, 왜 물을 채우는 곳이 몇 십 미터 밑으로 내려 가서 위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식수가 나오는 위치가 공교롭게도 세서 대피소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등산객의 다리를 완전히 풀어 버리기 위한 대피소측의 배려인가? 세석 대피소에서 출발하면서 굉장히 잘 걸어가는 20대 초반의 대구 처녀를 만났다. 또 다른 처녀도 군복 반바지에 소매없는 런닝 셔츠를 입고서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총각이다보니 혼다 다니는 처녀들에게는 웬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이 두 처녀 중에서 대구 처녀는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는 길에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몇 마디 물어봤는데 초행이라는데 엄청나게 잘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내게 웃겼던 것은, 이 처녀에겐 일행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1명이 장터목 대피소에서 예약을 못했다고 해서 자기가 먼저 가서 대기자 명단에 이 예약 못한 일행을 올려 놓을려고 한다는 것이었다(이 이야기는 나하고 거의 15 m 쯤 떨어져서 군복 반바지 처녀와 하는 이야기를 엿들은 것이다. 거의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 주는 이 놀라운 관심.. 지리산을 등반하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음이다). 그래서 나도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야 되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추월해서 가려고 세석 대피소에서 출발할 즈음에는 내가 앞질러 갔는데 어떤 봉우리에서 쉬는데 이 처녀가 따라와 버렸다. 왜 이 처녀가 예약을 할려고 혼자 먼저 출발했는지 알겠다. 정말 무서운 처녀였다. 다리도 약해 보이던데.. 이 봉우리에서 보이는 풍경이 멋있어서(이 봉우리에서 보면 내려가자 마자 다시 다른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는데 그 풍경이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이 두 봉우리 사이로 구름도 지나가고 경치도 잘 보이고.. 그런데 이 봉우리 이름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뒤의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을 배경으로 해서 포커스 고정(Focus Lock) 기법을 이용해서 사진도 찍어 주었다. 포커서 고정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찍으면 뒷 배경의 경치도 잘 나오고 인물도 잘 나오는데… 참고로 배경에 포커스를 맞추고서 셔터를 반만 누른 상태로 다시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다음 완전하게 셔터를 누르면 뒷배경과 인물에 모두 포커스가 맞는 사진이 된다. 요즘 나오는 돼지털 카메라도 이런 기능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지나가는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여기서 사직을 찍었으며, 이 처녀하고 같이 찍으라고, 이렇게 하다가 다 인연이 되고 하는 거라고 마구 부추기는 바람에 싫은 척 하면서 이 처녀 카메라가지고서 같이 사진을 찍었음. 사실 이 처녀도 같이 찍자고 했다. 모델비 받아야 되는데…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 하면서.. 지금 생각하니 연락처를 안 준 것이 너무 후회가 된다. 너무 청순해 보이는 처녀였는데… 난 아직 사귀는 사람도 없고.. 참고로 나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혼자 산행을 하는 데다가 별로 사진 찍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이 기행문에 같이 붙여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디지털 카메라는 없지만 말이다.

16시 53분쯤.
장터목 대피소 도착했다. 캬하하.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너무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 치밭목을 갈 때 그렇게 죽도록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여기까지 오다니.. 그리고 몸 상태도 괜찮았다. 대구 처녀한테는 뒤져 버렸다. 도착하자마자 역시 숙소 때문에 매점 앞에 가서 얘기하니 대기자 명단에 올려 주었다. 대기자 리스트 10위 이내에 들었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침상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것은 순진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식수대(이 곳 식수대는 세석 대피소보다 더 멀리 대피소에서 밑으로 내려 가야 했다. 정말 고마운(?) 배려이다)에 가 보니 대구 처녀와 또 만났다. 이런 이런… 또 그 처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세수하고 식수를 받았다. 어쨌든 3박 4일에서 2박 3일로 계획을 수정했기 때문에 식량을 빨리 해지워야 하는 즐거움(?)이 생겼음. 이렇게 하면 짐을 덜 수 있겠지…? 저녁으로 햇반 2개와 강추 카레 1개를 데워서 먹었다. 가스버너는 여전했지만 밥은 여전히 맛있었다. 데운 물을 버릴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가족들이 자신들도 인스턴트 음식을 데운다고 달라고 해서 주었다. 별 생각 없이 준 것인데, 고맙다고 하면서 사과 1개를 주어서 감사하게 먹었다. 너무 감사했는지 가운데 있는 씨까지 모두 먹어 버렸다. 참 맛있었다. 아까 세석 대피소에서 출발할 때 내가 지나쳤던 군복 반바지 처녀는 그제서야 거의 실성한 사람 같은 얼굴로(너무 힘들어 보여서..) 도착했다. 19시 쯤에 방송으로 대기자들 모두 매점 앞으로 오라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숙소 입구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튀어 들어가서 대기자 표를 받았다. 이 표에는 침상 번호 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며, 색연필로 체크 표시만 되어 있었다. 관리인은 배낭 들고 빨리 튀어 들어가서 숙소 안의 중앙 홀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한다. 내가 군대는 가지 않았지만 마치 군대 온 것 같은 분위기다. 전부 다들 서로 얼굴을 보며 난민 같은 모습에 우왕좌왕하며 즐거워(?) 했다. 나같이 처음 온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외국인도 1명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도 희한한 경험이 되었을 거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곳이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사람이 항상 침상 수(170명 가능)보다는 많은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안쪽에 제석봉이라는 방, 이곳에도 침상들이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침상들 사이의 복도에 자리를 배정받고서(복도를 배정받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면 완전히 천국이었다) 누워서 잠을 청하였다. 거미 1마리가 내 귀속으로 들어 오려고 했으나 내가 거부해 주었다. 너도 가서 대기표 받아라.. 그런데 대기자들의 자리를 배정하는 과정에서 장터목 대피소 관리인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전혀 들지 않게 행동하였다. 여기 온 사람들이 자기 돈을 내고서 구걸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으며, 이 관리인들은 ‘자기들이 인사할 때는 사람들이 박수를 많이 친다는 둥 하면서’ 우습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지리산에 처음 오는 나에겐 익숙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자리가 모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이런 사람들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차라리 야영을 하고 싶었으나, 야영도 금지였다. 이곳에 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이만 줄인다.

20시쯤.
취침하려고 시도를 하는데, 아까 그 거미가 다시 내 귀 속으로 들어 오려고 시도한다. 지리산 거미 고집 셌다. 다시 그 거미에게 나의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고서 잠을 청했다.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깐 바깥으로 나가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정확하게 몇 시에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춰 놓았다.


8월 25일, 일요일 : 3일차, 천왕봉에서의 추운 새벽을 맞이하며…, 약 8 Km
장터목 대피소 -> 천왕봉 -> 로터리 대피소 -> 칼바위 -> 중산리
날씨는 흐림.

새벽 3시 30분쯤 ~ 3시 40분쯤.
일출을 보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서둘렀다. 사실 준비랄 것이 없었다. 그냥 일어나자마자 옷만 갈아 입고서 바로 숙소를 튀어 나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천왕봉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서 머리에 쓰는 램프를 착용하였다. 이번 산행에서 제일 준비를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램프와 등산화이다. 이것들은 나의 즐거운 산행을 안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특히 등산화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산행을 하는 도중에 질퍽한 곳들이 많이 만났는데, 전혀 신발 안으로 물이 들어오거나 하지 않았으며, 웬만한 바위에서도 거의 미끄러지지 않는 접지력을 보여 주었다. 이 새벽 산행에서 길을 잘 타는 사람들(길을 잘 타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음)은 램프 없이 가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사고가 나는 경우를 보면 준비 소홀로 인한 인재가 가장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 항상 산행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다시 생각하는 것이지만 산은 절대로 한 순간도 우습게 보아서는 안된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겠지만..

천왕봉으로 가는 도중에.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천왕봉으로 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계속 이어져서 길을 갔다. 뒤를 돌아보니 수많은 불빛들의 행렬이 산 능선을 따라서 마치 꼬리처럼 이어지고 있다. 내 뒤에 따라 오는 아저씨는 엄청나게 숨을 헐떡거렸는데 내가 다 안스러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서 나는 전혀 숨이 차지 않았다. 평소에 매일 5~6 Km 조깅을 해 온 것이 이번 산행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체력에 여유가 있어서인지 달과 별들을 멋지게 구경하면서 갈 수 있었다. 물론 숨이 턱에까지 차는 것 같은 뒤에 아저씨도 달과 별들을 구경하면서 왔겠지만.. 안개가 많이 지나갔다..

새벽 5시쯤. 일출을 기다리며..
천왕봉 도착. 봉우리 거의 10미터쯤 전일까. 갑자기 기가 막힌 소리가 들려 왔다. 먼저 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긴장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어.. 이 봉우리가 아닌 가 본데..”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고전 코미디의 한 장면이란 말인가? 순간 엄청난 긴장감과 함께 이 어두움 속에서 다시 내려 가야 되는 모양이다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그 긴장감을 사라지고 그 봉우리가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미디가 이렇게 사람을 긴장시키다니.. 어쨌든 천왕봉에 도착해서 해가 뜬다는 방향으로 좋은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천왕봉이라고 적혀 있는 정상석도 한번 쓰다 듬어 주었다. “야.. 나 다시 왔어..!!!” 그리고 예의 그 쵸코 찰떡파이 5개를 꺼내서 홀랑홀랑 먹어 버렸다. 그리고 양갱도 하나 꺼내서 먹고는 물을 마셨다. 맛있었다. 달짝지근한 찰떡과 양갱. 그리고 시원한 물 한 모금.. 그리고 서서히 밝아 오는 먼 하늘..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몹시도 추웠고 윗옷과 바지를 하나씩 더 꺼내서 입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구름이 많이 끼어서 일출은 볼 수 없었다. 가끔씩 들려 오는 주위 사람들의 농담은 재미있었다. 해가 안 나오니깐, 옆에 있던 사람은 조금 더 기다리면 이제 달이라도 나올거라고 쓸데 없는 소리를 했다. 가까운 구름들이 지나가면서 살짝 보이는 멀리 있는 구름의 실루엣은 도시에서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신비함이 있었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붉은 돼지에서 포르코가 유유하게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보이는 하늘과 구름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새벽 5시 50분쯤.
일출을 보는 것은 포기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누가 그러는데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라고.. 그래 다음에 다시 한번 시도해 보자. 원래 계획은 대원사 계곡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그냥 중산리쪽으로 가기로 했다. 사실 이틀동안 큰 일(?)을 치루지 않아서인지 속에서 신호가 오려고 했다. 그래서 쉬지도 않고 빨리 내려 갔다.

내려 오는 도중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급해서 중간에 어디 숲속에 들어가서 일을 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내려 오는 동안 계속해서 그렇게 숨어서 일을 칠 만한 곳이 있을까를 두리번 거리면서 찾았다. 하지만 그럴 수야 있는가? 이 곳은 지리산이었던 것이다. 지리산은 나의 갈등, 나의 생리적 욕구를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다.

아침 7시 10분쯤.
로터리 산장 도착. 화장실을 급하게 찾아 들어갔다.

오전 9시 26분쯤.
중산리 매표소에 도착. 지리산 종주가 여기서 끝이다. 중산리까지 가는 길이 쉽지가 않았다. 화엄사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산행 3일째이기도 하지만 계속 내리막 길이다. 발바닥도 아프고, 체중이 모두 앞쪽으로 쏠리다 보니 발가락들도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난리였다. 물론 나는 내 다리가 아닌 척, 모른체 하면서 계속 내려 갔다. 물론 올라 오는 사람에게는 더욱 힘들었겠지만. 이 코스가 지리산 1일 코스여서인지 2박 3일 동안 산행을 하면서 가장 사람들을 많이 만난 길이었다. 계속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녕하시냐고.. 반갑다고.. 수고하시라고 인사하면서 내려왔다. 특히 처녀들을 보면 더 열심히(?) 인사하면서 내려왔다. 땀 흘리며 걸어 올라가는 모습이 모두들 너무 예뻐 보였다. 힘들게 중산리 식당들이 있는 곳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식당 주인 아저씨가 나와서 중산리 매표소에서 다시 버스 타는 곳까지는 한참을 걸어 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걸어 가려다가 식당에서 밥 먹는 사람들을 보니 뭔가 먹고 싶어졌다. 예전에 산행을 끝내고서 파전과 동동주를 너무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기에..  파전과 동동주 한 사발을 시켜서 마셨다. 여기 아가씨가 2500원하는 동동주 값(원래 5000원에 파는 것인데 내가 한 사발만 달라고 아가씨를 졸랐다)을 500원 깍아 주었다. 왜 모든 처녀들은 나에게 잘해 주는 걸까..? (^^;) 파전은 혼자 먹기에는 조금 많은 듯했으나 맛있게(뜨거워서 입천정 껍질이 벗겨져 버렸다) 다 먹어 버렸고, 동동주는 약간 쌉싸롬했다. 역쉬.. 이 맛이야! 게다가 친절한 여기 주인아저씨가 버스 타는 곳(산청)까지 갈 일이 있다고 하면서 봉고로 태워 주셨다. 10시경에 있는 버스는 시간이 넘어서 놓쳐 버렸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화장실에서 깨끗하게 씻고서 옷을 갈아 입어 버렸다. 이 곳 화장실이 제일 깨끗한 것 같았다.

오전 11시쯤.
산청에서 진주고속버스터미널로 버스를 타고서(3,800원) 이동하였다. 바로 앞에 있는 가계에서 표 사야 된다.

점심 12시 10분쯤.
진주고속버스터미널 도착. 피곤했는지 버스 안에서 금방 잠에 빠졌는데 어떤 꼬마애가 다 왔다고 말해 줘서 비몽사몽간에 일어나서 버스에서 내렸다. 서울(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표를 사고서(16,500원, 13시 출발) 정신이 없었는지 잔돈도 안 받을 뻔했다. 터미널 바깥쪽에 있는 식당에서 설렁탕을 한 그릇 사 먹었는데 별로 맛이 없었다. 김치, 깍두기, 오이, 게장 비슷한 것이 나왔는데 너무 짜고 그랬다. 그냥 설렁탕하고 오이만이 그럭저럭 목구멍으로 넘길 만 했다. 아침에 먹었던 파전과 동동주 생각이 났다. 바로 옆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짱면을 먹을 것을 하고 후회를 했다.

오후 13시.
진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 이 버스는 우등버스였다. 한쪽에는 2개열의 좌석이 있고 나머지 한쪽에는 1개열의 좌석이 있는 버스. 내 자리는 맨 뒤쪽. 27번. 좀 위험한 자리였지만(안전벨트를 하지 않을 경우에 브레이크를 밝는다면 바로 운전 기사 아저씨 옆에까지 날라갈 수 있다는 그 자리..), 우등 좌석이라서 오는 길은 편했다. 시간도 일요일 오후인 것을 생각하면 금방 서울에 도착했다.

17시쯤.
서울 남부터미널 도착.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지하철로 양재역으로 이동했다. 서울에 돌아 오니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리고 바쁘게 자신들의 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우습게 보였다. 지하철 역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 지금 지리산 갔다 오는 길이거든.. 당신들 그 기분 모르지..? 음핫핫핫..” 꽤죄죄한 몰골의 인간이 이렇게 지하철 역에서 소리쳤다면 아마도 바로 경찰 왔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하게 양재역의 버거킹으로 들어가서 더블 와퍼와 콜라 작은 것 시켜서 먹었다. 출발하기 전 서울역에서 먹었던 그 맛이 생각나서 다시 사 먹었는데 역시 맛있었다. 이 햄버거 하나로 나는 다시 도시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양재에서 버스를 타고서 성남으로 이동.

저녁 18시쯤.
경기도 성남 도착. 도착해서 방 문을 열어 보니 작은 방 쪽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과열로 불이라도 났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짐 정리하고 깨끗하게 샤워했다… 이렇게 해서 2박 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끝냈다..

산행을 하면서 느꼈던 머리 속 빈 공간이 지금은 알 수 없는 지리산의 무언가로 꽉 채워진 것 같았다.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은 처음으로 시도하는 지리산 종주를 날씨가 그리 좋지 않고(바위들이 물기를 머금어서 좋지 않았는데도) 산행에 대해서 전혀 모른 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끝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산은 항상 조심하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물론 힘들 때는 산에게 욕도 하지만. 나도 이번에 죽지 않을 만큼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지리산 욕 많이 했다. 내리막길에서는 욕 더 많이 하면서 내려왔다..) 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까지 절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바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다치기라도 한다면 즐거운 휴가, 즐거운 산행은 말짱 꽝인 것이다. 그리고 너무 힘들게 올라만 가지 말고 경치도 감상하고, 주위 나무도 보고, 꽃도 보고하면서 올라가야 참 산행을 느끼는 것일 게다. 나는 이번에 너무 열심히 올라 가기만 한 것 같다. 다음에는 꼭 참 산행을 준비해서 가야 겠다.

참고로 이번 2박 3일의 산행에서 사용한 비용은 다음과 같다.

1일차(2002년 8월 23일, 금요일)        
지하철(성남,태평역->서울역)        
버거킹(와퍼,콜라)                           \4,500
무궁화 기차표(서울역->구례구역)        \18,400
김밥                                             \3,000
물 2병, 휴지2개, 지도, 볼펜 1개           \4,000
버스(구례구역->구례구시외버스터미널)\700
버스(구례구시외버스터미널->화엄사)   \700
지리산국립공원입장료                      \3,000
노고단대피소 이용료                        \5,000
담요 이용료                                    \1,000

2일차(2002년 8월 24일, 토요일)        
장터목대피소 이용료                        \5,000
담요 이용료                                    \1,000

3일차(2002년 8월 25일, 일요일)        
파전, 동동주                                    \7,000
버스(산청->진주고속버스터미널)         \3,800
설렁탕                                             \5,000
콜라                                                 \1,000
버스(진주고속버스터미널->서울남부터미널)        \16,500
지하철(남부터미널역->양재역)              \550
버거킹(더블와퍼,콜라)                         \5,900
버스(양재->성남)                                \550
합계                                                    \86,900

19시쯤.
이휘재, 강호동, 김한석, 메뚜기(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가 나오는 방송을 보면서 재미있어한다… 완전히 도시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추가. 대구 아가씨와 함께 경치를 구경했던 그 봉우리가 생각난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과 장소이다. 그 대구 아가씨도 무사하게 산행을 끝냈겠지.... 끝!

두서 없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즐거운 산행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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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메거사 2002.08.27 13:25
    보람있고 기억에 남는 초보산행기, 잘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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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규 2002.08.27 19:19
    좋은 산행과 훌륭한 문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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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거미 2002.08.28 09:43
    정말 잼있게 글 잘 읽었어요. 저도 22-24일까지 똑같은 코스로 지리산종주를 했는데 반갑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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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보 2002.08.28 22:46
    정말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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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옹 2002.08.28 23:21
    ^^* 산행을 같이 한 것처럼 실감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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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철 2002.09.01 19:27
    처음 산행에 많은 도움 될것같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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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10.16 22:44
    재미있게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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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re] 노총각의 지리산 종주<마지막회>수고와 함께 있을 그녀를 위해~ 섬호정 2002.09.04 1924
1010 [re] 노총각의 지리산 종주<마지막회> 1 우렁각시 2002.09.06 2210
1009 [re] 노총각의 지리산 종주<마지막회> 만리동처자 2002.09.07 1668
1008 [re] 노총각의 지리산 종주<마지막회> 빨간윈드자켓 2002.09.07 1706
1007 [re] 노총각의 지리산 종주<마지막회> 순두부 2002.09.07 1732
1006 [re] 노총각의 지리산 종주<마지막회> 동글이 2002.09.09 1533
1005 [re] 노총각의 지리산 종주<마지막회> 1 남원놈 2002.09.18 1601
1004 [ 휴식년제 길과 공단원 ] 3 프록켄타 2002.09.05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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