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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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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골은 깊다. 얼마나 깊은지 그 속은 알 수가 없다. 대원사에서 50리 골짜기를 따라 올라 이젠 산과 물과 하늘밖에는 없을 것 같던 그곳에서도 세 골짜기나 숨겨 놓고 있다.

지금이야 대전-삼천포간 고속도로에다가 밤머리재가 뚫려 덕산을 거치지 않고도 들어설 수 있지만 불과 십여년전만 하더라도 예까지 찾아오려면 오는 길 하루, 가는 길 하루였다.

방법이래봐야 딱 한 대있는 새벽열차를 타고 진주에서 내려 첫차로 들어가는 방법과 전주, 남원, 함양, 단성, 덕산까지 너댓번 버스를 갈아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이 곳으로 오름길이나 내림길을 잡는 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맘 먹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조개골은 농사지을만한 땅이있다는 평촌에서 대원사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야한다. 대원사골짜기는 이름있는 골짜기만 손씨골, 삼밭골, 밤밭골, 망생이골, 물골, 한판골, 앵골, 신밭골, 조개골 등 9개의 골짜기가 모여들지만 중봉을 정점으로 50여리를 흘러내리니, 이름마져 잊혀져버린 골짜기 수를 헤아린다면 아마도 지네 발가락만큼은 될 것이다.

조개골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쪽, 즉 써리봉, 중봉, 하봉, 쑥밭재에서 시작하는 골짜기다. 들면 들수록 깊어만지는, 겉은 보여도 속은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조개 속 같은 골짜기다. 그 골짜기가 얼마나 깊었으면 “골로갔다”는 말이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근세의 일이긴 하지만 이데올로기 전쟁통에 사상적 대립이 심회되면서 아我건 적敵이건 들어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곳이다.

유평리의 고유지명은 유독골이다. 독이 작아 홍수때만 되면 물이 넘쳤다는 곳이다. 유역이 넓어 받아내는 면적이 많기도 하지만 그만큼 좁은 골짜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의 어원을 풀어보면 기름유油 평평할평坪, 즉 기름진 넓은 땅이 있다는 뜻이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들어와 화전이나 일구어 호구지책을 마련하던 골짜기에 붙여진 이름치고는 과장이 심한 듯 보인다. 굳이 원명에 어울리는 한문이라면 흐를유流 도랑독瀆이 맞을 것 같다. 짐작컨대 한문 이기과정에서 유독골과 평촌의 지명이 합성되어 유평리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마음만이라도 기름지고 너른 평야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중봉에서 시작하는 이 골짜기 물은 천왕봉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과 덕산에서 만난다. 지척에서 시작하여 먼 길을 돌아 만나는 두물머리에 양당촌이 있다. 조선의 대학자 남명 조식선생이 찾던 “두류산 양단수”가 이 곳이며, 도화 뜬 맑은 물에 천왕의 긴 그림자가 잠겼던 곳이 이 곳이고, 예가 바로 무릉이라고 읊었던 곳이 이곳이다. 그곳에 산천재를 지어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말년을 보냈다.

조개골이 시작하는 윗새재까지는 찻길이 있다. 그런데 궁금한 것 한 가지는 1917년 왜정시대에 만들었던 지형도를 보면 외고개를 오르는 길과 쑥밭재 오르는 길이 확연하게 표기되어 있다. 찻 길은 아니었겠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는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언뜻 생각하면 조선총독부에서 지형도를 만든 목적이 수탈에 있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인지라 일종의 자원수탈의 편리수단일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리산은 아고산대식물이 자생하는 지역이다. 왜놈들은 이 지역의 체계적인 관리와 수탈을 위해서 벽소령을 중심으로 동부는 경도제국대학(교토대학)이, 서부는 동경제국대학(도쿄대학)이 연습림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봉마을에서 연로하신 할머니말씀이 생각난다. 오봉은 예전엔 70여 가구가 넘던 부촌이었고, 하동장에서 방물장수와 소금장수가 넘어와 물물교환을 했던 곳이라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세에는 가당치 않은 일로 보일지 몰라도 불과 반 세기 전 상황이라면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새재마을은 지리산의 전형적인 화전마을이다. 유평은 기록으로 보면 진주민란과 동학란 이후 패잔병들의 은둔지였다 하지만 대원사 창건연대가 서기 584년 연기조사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걸 보면 그 보다는 훨씬 이전에 사람들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이상향을 찾거나 정상적인 삶의 궤적을 그리며 찾았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쫒기거나 숨겨야할 상황, 또는 남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부득이 멀어져야 하는 상황의 막다른 선택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산속에서의 호구지책이라야 화전이 우선이었을 것이고, 생필품을 조달하는 금전적인 수단은 약초와 숯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당시 아낙네의 하루 품삯이 쌀 한 되, 남자 하루 품삯은 쌀 두 되에 못 미쳤다. 그런데도 유평리 남자의 하루 품삯은 쌀 서되, 숯가마 기술자 하루 품삯이 닷 되 정도였다니 지리산이 주는 넉넉함이 물씬 풍기고도 남는다.

1960년대만 해도 이 골짜기에는 200여개 숯가마 터가 있었다 하고, 그 생산량만도 숯가마 두 개에서 열흘만에 200포가 생산되었다하니 호구지책은 마련된 셈이다.

그런데 평온한 골짜기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왜정시대에 경도제국대학(교토대학)에서 관리하던 연습림이 해방 후에 경상대학으로 넘어간다. 이들에게 지리산은 경제수종관리와 더불어 산림의 산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소중한 장소였다. 그런데 산에만 들어오면 아름드리나무가 베어지고, 숯가마에서는 숯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간이 가능한 지역은 산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었다. 당연히 눈에 가시였을 수 밖에,

그러던 1964년 10월 연습림을 찾았던 교수와 조교, 학생 40여명은 연습림보호라는 명목하에 조개골 가옥 7채와 장당골 가옥 9채를 불살라 버린다.

문제는 그곳이 해발 7백의 고지여서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데다가, 주민들에게 통보도 없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질렀다는 것 이었다. 가해자는 산과 산림을 지키려는 자부심이었지만, 피해자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힘없는 민초였다. 80여명의 화전민들은 졸지에 생활터전을 잃었고, 생의 연을 놓지 않고 숨어들어 오기 전 그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른들은 한숨만 쉴 뿐이었고 아이들은 놀라서 울고, 배가 고파서 울었다. 그 후 이 사건은 정부에까지 알려져 유평리, 삼거리마을, 중땀, 새재마을에 방 한칸 부엌 하나가 따린 독가촌을 지어 화전민들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1970년에는 화전이 금지되고, 몇 뙤기 밭에서 나는 감자와 날품팔이 산판일로 연명하게 되나, 산판마저도 70년대 후반 금지되자 과수와 한봉, 잠업으로 생활방편을 옮기게 된다.

또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행정규제에 묶여 손도 대지 못하던 가옥들도 90년대 후반 규제가 풀리면서 현대가옥으로 증 개축이 이루어져 민박 등으로 생활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계속)


- 구 름 모자 -

  • ?
    이안 2008.11.13 17:02
    지리산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시대적 배경상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었겠지만 권력의 힘에
    무너져야했던 다른 편의 아픔도 함께 읽었습니다.
    제가 아는 지명이 많이 나와 반가웠습니다.
    산천재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인데..
    감사드립니다.^^
  • ?
    시골역 2008.11.18 21:15
    어릴적 생각이납니다
    뭘 잘모르면 덕산(지리산)유덕골(유독골)에서왔나
    하고 핀찬을 주었답니다
    한마디로 아주깊고깊은 산골에서왔느냐고 말이죠
    애잔한 사연이 있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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