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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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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단독 종주기

어느 날 갑자기 지리산이 나를 불렀다.
전날 몹시 비바람이 불었으나 창밖에는 고요함이 있었기에 새벽 3시에 일어나 배낭을 대충 챙기고 4시에 애마를 몰고 백무동으로 향했다. 어두움 속을 쏜살같이 달려 88고속도로 지리산휴게소에서 추어탕을 아침으로 먹고 야간 간이매점에서 팔고 있는 누룽지를 한 봉지 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논산에서 만든 제품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06:35 백무동매표소에는 고요만이 남아있었다. 다른 국립공원과는 달리 입산객들의 연락처와 출구 매표소를 적는다. 유사시를 대비한다고 하여 적고서 처음 접하는 백무동코스를 올랐다. 시작하자마자 세석으로 오르는 길과 만난다. 나는 종주할 예정이니 장터목코스로 올랐다. 아직 산은 어두웠고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사십분 정도 산행을 하다보니 하동바위가 나온다. 출렁거리는 구름다리를 건너서 참샘 부근에 와보니 부부인 듯한 남녀가 힘겨워하며 오른다. 얘기를 해봤더니 나보다 무려 한 시간 먼저 출발했는데 벌써 따라잡힌걸 보니 초보인 듯 하다. 시작한지 두 시간 쯤 되자 주능선이 보이고 1차 목표지점인 장터목대피소가 보인다. 지리산을 산행하면서 대피소가 보이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마치 오늘의 최종 목표지점에 다다른 듯 말이다. 10여분 주능선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거의 세 시간이 걸렸다.

장터목대피소는 이름 그대로 많은 산객들이 붐볐다. 잠시 호흡조절을 한 뒤 배낭을 두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15kg 정도 되는 무게를 덜고 오르는 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산행시 물 때문에 고생한 적이 몇 번 있는 탓에 지리산처럼 물이 흔한 코스에도 충분한 물을 휴대하곤 한다. 부질없는 짓 인줄 알면서도 내년에 도전할 안나푸르나BC 트래킹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지고 다녔다. 발걸음도 가볍게 지나는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에도 푸르름이 왔다. 인간이 끼친 해악을 웅변으로 증명하듯 고사목이 줄지어 서있고 그 사이사이에 새로운 주목이 그리고 관목들이 자연 스스로  재생하는 놀라운 모습이 보였다. 천왕봉은 보였다가 금세 구름에 쌓여있다. 역시 신비로운 모습이다. 통천문을 지나 오르는 길은 역시 가파르고 숨이 턱에 찬다. 이 놈의 몸무게를 줄여야 하는데 이렇게 산행을 해도 몸무게는 줄지 않고 다리통은 굵어지는데 배는 들어가지 않는다. 천왕봉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정상표지석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내가 가야할 길을 바라보니 저 멀리 반야봉과 노고단이 아스라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저기까지 내가 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장거리 산행시마다 자문하였지만 포기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인간의 한 걸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지금 한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다. 장터목에서 미리 준비해간 김밥 두 줄로 배를 채웠다. 그러나 배가 고팠다. 작년부터 냉동실에서 묵고 있던 곶감을 몇 개 먹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세석평전까지 이어지는 산길은 참으로 정겹다. 지리산 10경중에 하나인 연하봉을 지나면서 이정표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왔는데 이번에는 10분을 넘게 기다려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삼신봉을 거쳐 촛대봉에 서니 저 멀리 천왕봉의 위용과 세석평전의 여유로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천왕봉과 넉넉한 가슴의 세석평전이 더욱 지리산을 지리산답게 만드는 것 같다.

그동안 산행시 거의 먹지 않던 연양갱과 자유시간을 수시로 먹었다. 산행시 먹는 놈과 쉬는 놈 못 당한다더니 한결 다릿심이 솟는다. 세석대피소에서 우두커니 앉아 쉬고 있는 또는 지나가는 등산객들을 보며 홀로 걷는 외로운 나그네의 허허로움을 느껴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귀에 꽂으며 감상하기도 하였다. 행복하다. 비록 동행은 없지만 내 페이스대로 내 마음대로 걷는 단독 종주길은 나름대로 기쁨을 준다. 지난 2005.8.5 무박종주시 가장 힘들었던 벽소령-세석평전 구간이 오늘은 그리 힘들지 않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성삼재-천왕봉 코스를 역으로 가로지르니 내려가는 길이라 그런 모양이다. 영신봉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늘은 내려가니 오르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애처롭기도 하다. 그래도 세 시간은 걸어야 한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천왕봉과 그 아래 장터목이 보인다. 그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장터목을 바라보니 지금 장터목으로 향하는 산객들의 모습에 위안이 된다. 그러나 벽소령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다. 갑자기 길이 넓어진다. 지프차도 다닐만한 임도(林道) 같다. 그러나 몇 백미터 가니 이내 좁아졌다. 낙석위험지구를 지나니 벽소령대피소가 가까이 보인다. 오늘의 종착역 벽소령은 우리 집 같은 포근함을 주었다.

오후 5시의 벽소령대피소는 한산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라면 1개와 지리산휴게소에서 구입한 누룽지를 반봉지 넣고 끓이니 무엇과 비길 수 없는 별미이다. 아는 이가 아무도 없기에 남들이야 먹건 말건 내 뱃속을 채웠다. 누룽지를 조금 더 넣을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다시 배낭 속의 곶감을 몇 개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대피소 매점에서 초코파이를 두개 샀다.  평소에는 전혀 먹지 않는 정크푸드이지만 먹고 나니 조금 포만감이 온다.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처사 한분이랑 등산을 오셨다. 참으로 이색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참았다. 또 어떤 젊은이가 어린이를 데리고 들어온다. 난 삼촌하고 조카인줄 알았다. 부자지간이란다. 단체로 온 팀들은 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신다. 먹고 싶다. 아침에 소주 한 병 넣고 올걸 하는 후회가 엄습한다. 그렇다고 얻어 마시기에는 비위가 약해 결국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초저녁인 7시30분에 취침하여 곤하게 잠을 자다 눈을 뜨니 겨우 10시였다. 이제 막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 듯 헤드랜턴으로 배낭을 정리하는 사람,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아마 나도 그랬을 듯하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도 모르고 자는 사람 등 휴식하기에는 적합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잠을 청하다 30분 간격으로 깨어나 결국 새벽3시에 일어나고 말았다. 또 다시 어제처럼 라면에다 누룽지를 넣어서 먹었다. 꼭두새벽일지라도 그 맛은 일품이다. 아마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리산 10경중에 하나인 벽소명월(碧霄明月)을 보았다. 음력 5.16의 달은 크고도 밝았다. 그 덕분에 별이 많이 보이지 않음이 아쉬웠다.

4시에 벽소령을 출발했다. 야간산길을 혼자 가려니 부상의 두려움보다 반달곰 등 야생동물에 대한 무서움도 있었다. 삼사십 분을 걷다보니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헤드랜턴의 불빛이 보인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숙박한 부지런한 사람들이 나처럼 벌써 산행을 시작했다. 동쪽하늘이 붉게 물든다. 아름답다. 장엄한 지리산 일출이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가보다. 저 멀리 천왕봉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늘 정말 삼대적덕한 사람들 인가보다. 구름 한점 찾아볼 수 없다. 조망이 좋은 곳을 찾아 부지런히 걸었지만 이미 나뭇가지 사이에서 해가 돋고 있었다. 무작정 위로 기어 올라갔다. 사진을 여러장 찍었지만 똑딱이 디카라서 마음에 드는 사진은 별로 없다. 그래도 한두장은 볼만하기는 하다.

연하천대피소는 밥을 짓는 사람, 배낭을 챙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히려 한가롭게 보인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화개재로 향한다. 연하천에서 화개재로 가는 계단이 지치게 만든다. 한참을 기다시피 걸어 오르다 보니 토끼봉이다. 이십여명의 젊은이들이 단체로 올라오고 있다. 부럽다. 나도 진작 산을 알았더라면 지금쯤 전문산악인 못지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화개재에서 셀카로 사진을 찍고 모니터를 봤더니 완전히 무표정이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시 찍어봐도 역시 무표정한 얼굴이다. 게오르규의 소설 ‘25시’를 영화화했을때 주연을 했던 안소니 퀸의 엔딩장면이 떠오른다. 수용소에서 귀향하는 안소니에게 사진기자가 웃으라고 강요를 한다. 그의 인생역정에서 어찌 웃음이 나오랴. 그러나 억지로 웃는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과 연상이 된다. 이제 반야봉의 자락에 들어서는 악명 높은 뱀사골계단이 나온다. 몇 번을 지나던 곳이지만 오늘은 정말로 힘들다. 화개재에서 성삼재까지가 그리 먼 거리임을 오늘에야 새삼 느꼈다. 몇 번을 쉬며 삼도봉에 오르니 노고단 아래 운해가 펼쳐져있다. 그리고 저 멀리 천왕봉이 아련하게 손짓한다. 임걸령 샘터는 여전히 물을 쏟아내고 있다. 빈 병에다 물을 가득 채우니(1.5리터, 1리터) 배낭이 무겁다. 그러나 임걸령 샘물을 집에서 두고두고 마시고 싶은 마음을 난들 어쩌랴. 돼지평전에 다다르니 노고단고개가 보인다. 지호지간이지만 너무 멀다. 노고단에 다다르니 목적지이 도착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내려오는 길에 평상복차림의 어느 아주머니가 여기서 천왕봉가려면 얼마나 걸리냐고 묻기에 ‘저는 어제 새벽 6시 반부터 걸었어요.’이랬더니 기겁을 한다. 성삼재에서 무려 35,000원을 주고 백무동까지 콜밴을 타고 이동했다. 이로서 이번 종주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집에 오늘 길에 전주를 지나는데 반대차선에서 돌멩이가 날아와 내차 앞 차창을 손상시킨다. 보험처리를 해도 5만원이 날아갔다. 피로에 지쳐 운전하던 내게 각성효과를 줘서 안전하게 집으로 올수 있었다고 애써 자위를 해본다. 집에 와서 배낭을 팽개치고 샤워를 한 후 한 시간을 자고났더니 내 마음을 벌써 다음 종주산행을 기대한다. 이 무슨 죽음보다 깊은 병이런가. 글라라의 걱정 속에 무사히 종주를 마치게 되었지만 단독종주도 가끔 시도해볼 예정이다. 지리산은 언제 어느 곳이나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러나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는 이원규 시인의 노래를 되뇌며 지리산을 견디지 못하는 나는 오늘도 새로운 산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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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6.06.14 14:27
    " 저 멀리 반야봉과 노고단이 아스라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저기까지 내가 갈 수 있을까? "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라고하지 안았나요,
    묵묵히 땀흘리며 정다운 능선과 바윗길들을 오르내리고 스치는 산님
    들과 미소짓다보니 목적지에 도달 하셨지요,
    돌멩이 때문에 큰일날번 하셨군요,
    그런 사고는 관할 국도관리청에서 보상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김민기님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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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난 2006.06.14 21:53
    함께하는 즐거움도 좋지만 홀로 산길을 걸으며 느끼는
    지리의 마력에 빠졌으니 님의 앞길도 만만치 않을듯 싶고,,,,^^*
    토끼봉 셀카사진이 궁금해지는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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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이 2006.06.14 22:41
    걸어가신 길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이런 글을 안읽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읽고있습니다.
    읽을때마다 벌떡일어나 배낭을 챙기려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지만 챙겨도 떠나지 못하는 이의 아픔 마음을 누가 알아주리오...
    이밤에 배낭을 챙기면 마눌한테 쫒겨나기 딱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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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백성 2006.06.16 15:28
    홀로 걷는 지리산! 좋았겠습니다.
    늘 지리산을 꿈꾸지만 그 중 제일은 홀로 걷는 길일 겁니다.
    언제고 한번 그 길을 홀로 가고 싶습니다.
    편안한 산행기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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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기 2006.06.16 17:07
    허접스러운 산행기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시고 때로는 과찬을 해주시니 용기 백배하여 다음 산행때도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슬기난'님... 토끼봉 셀카 사진은 제 미니홈피에 있습니다.
    daum.planet.net/minki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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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 2006.07.07 00:03
    산행계획시 많은 도움이 되었읍니다. 흔적을 남기기는 싫고..산우들이
    님긴 흔적은 무척이나 요긴하고...이무슨 조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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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BC 2006.07.15 10:12
    인간, 가축의 생명을 담보로 자행되는 반달곰 방사 전면반대
    http://www.GodBuddhaChrist.com/savemt
    방문하셔서 같이 지리산과 국립공원들을 지켜나가십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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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수 2006.07.20 10:55
    님이 걸어간길이 눈에 선합니다
    왜 이리 지리산은 나를 부르는지
    님글을 읽으면서 입가에 전해오는 이웃음은
    나도 떠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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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종현 2006.07.22 04:26
    저도 이 번엔 단독종주을 할려고 합니다 님 글을읽고 용기가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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