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도의 푸른 밤
2004. 6. 14 - 15
# 두근두근 두려움
어느새 더위가 끈적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순백의 능선이 내 기억엔 마지막인데, 새순이 돋고 숲이 무성해지도록 나는 지리에 들지 못했다. 하루하루 눌리는 힘이 고스란히 마음속에 산이 되어 꿈틀거렸다. 어서 가야지... 그런데 두려움이 앞섰다. 햇살이 타오를수록 흐느적거리는 몸인데, 게다가 요새는 몸을 게으르게 굴렸으니. 지리능선이 쉽게 날 허락할까. 문득 지난해의 혹독한 신고식이 떠올랐다. 봄철 통제기간이 풀리자마자 달려갔던 몸뚱이는 결국 대원사계곡에서 뻗을뻔 했지. 이번에도 그리되면 어쩌나. 그래도... 가야지! 배낭을 꾸리다가 다시 풀었다. 무게를 줄이려고 수선을 피우는 통에, 집을 나서기도 전에 산행을 마친 몸이 되버렸다.
피아골 자락을 돌아 버스가 올라간다. 나 혼자 앉은 버스 안에 배낭만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결코 무거운 게 아닌데. 반야봉의 '나홀로 비박'을 꿈꾸며 가는 길이라, 든 것 없는 배낭이 그래도 빵빵하게 부풀었다. 오전 10시를 지나 창 밖 햇살은 이미 강렬하다. 벌써 한숨이 나온다. 한숨 쉴 길로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왜 용을 써가며...
# 오름길
나무가 나무다운 터널숲을 얼마 만에 걷는지 모르겠다. 발바닥에 눌리는 돌의 촉감마저 신기하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란 게 이럴까. 짙은 숲에 아침이 아직 촉촉하게 남아있다. 덕분에 수월하게 산길을 오른다. 숨쉬기도 적당하고, 다리의 근력도 제법인 것이. 예상했던 시련이 내 것이 아님을 확인하니, 금새 간사한 마음이 삐죽 솟는다. 난 철철 흐르는 땀을 원했는데. 저 아래서 찌든 마음을 진한 육수로 흘려내고 싶었는데.
간사한 마음에 곧바로 화답이 온다. 오를수록 숲은 더워지고, 아주머니들의 화사한 웃음소리가 야속하게 들리고, 배낭이 점점 존재를 알려오고... 그래 이 정도는 괜찮아. 줄줄 흐르는 땀을 훔치며 희열을 느낀다. 물소리 시원한 암반 위로 내려선다. 목뒤로 내리꼿는 햇살, 거침없는 물소리. 나른한 숲. 나는 기다렸다는 듯 팔을 걷어 부친다. 차가운 물을 연거푸 퍼부으니 얼굴이 얼얼하다.. 진한 육수를 쏟아내고, 지리의 물을 부볐으니... 드디어 지리에 왔구나. 젖은 얼굴 그대로 눈을 감아본다. 새소리가 유난하다. 찌든 뭔가가 씻겨나가는 것 같다. 차림상 하나 없이 무슨 의식이라도 치른 걸까. 금새 나는 늘 바라던 단순하고 명랑한 아이가 되어 있다.
한적한 피아골산장. 마당의 솟대도 햇살에 나른하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임걸령을 향해 배낭을 고쳐 멘다. 시간을 보니 1시 반. 휴! 마음도 고쳐 메야 한다. 가장 더운 시간, 물소리도 없는 황폐한 능선길을, 그것도 가파른 기억밖엔 없는 오름길을... 머릿속에 그리지 말자. 어차피 되돌아설 생각이 없으니. 반야봉의 밤만 그리며, 출발!
이런... 초입부터 맑은 하늘에 땀비가 내린다. 이 가파른 길은 언제 끝나나. 하나하나 다가오는 이정표가 얄밉다. 이정표의 선고는 내 추측보다 훨씬 냉혹할테니까. '아직도!' '이제 겨우!' '거짓말!'을 쉼없이 내뱉으며 오른다. 가파른 나무숲 사이로 되돌아본다. 산들이 하나둘 눈높이로 내려선다. 다시 최면을 걸며 엉금엉금 오르려는데, 위쪽에서 한 사람이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올라보니 그가 선 자리가 주능선과 만난 피아골 삼거리다. 끝났네. 이렇게?... 끝나고 보면 지난 길은 왜 짧게 느껴지는 것인지. 정말 간사하기도 하지.
# 반야봉을 향해
시간이 갈수록 햇살이 지쳐간다. 저 멀리 남쪽의 산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녀석, 왜 이제야 왔을꼬... 산 아래선 내 것 네 것이 분명해 손에 닿지 못하는 아쉬움 투성이지만. 여기서는 경계가 없다. 닿지 못하는 저 산너울이라도 아쉽지 않다. 오히려 닿지 못해서 행복한 곳은 산뿐인 것도 같다.
임걸령 샘터에 물이 콸콸 흐른다. 바보. 이런 줄도 모르고 물을 한가득 지고 올랐네. 훈련을 마친 똥개가 된 것 같다. 평일이어도 산에는 사람들이 제법이다. 땀을 한 가득 흘린 여유를 부리며 경쾌하게 인사도 건네 본다. 해가 기울수록 기운이 난다. 해질 무렵이면 점점 감성과 에너지가 치솟는 부류처럼, 나도 그런 아이니까. 반야봉 초입인 노루목에도 시간을 먹어치우는 바위가 있다. 배낭을 세워두고 철퍼덕 앉아본다. 발아래 나무, 건너편 숲, 그 너머 산자락... 선명함이 줄지어 멀어진다. 6시쯤 바위에서 일어선다. 가자. 나의 보금자리로.
반야봉 오름길도 참 오랜만이다. 으슥한 숲길을 지나며 이 길에 새겨둔 기억을 끄집어낸다. 돌뿐인 너덜에서 머리 위로 까마귀떼가 맴돌았었다. 짙은 자켓을 입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아마도 녀석들이 나를 큰 고기덩이로 봤나보다. 까마귀떼가 점점 시야에 크게 들어오자 희열과 공포가 동시에 불붙던 기억이 난다. 그럼 오늘은? 저 아슴한 하늘을 새까만 날개가 휘저어 주었으면 싶은데... 한 녀석도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반야봉이다. 늘 저편에 서서 '나의 똥꼬봉!' 하며 그리워했지. 지금 난 그 볼기짝 위에 앉았다. 일단 돌탑 주변을 총총총 걸어준다. 반야는... 간지럽겠다. 농익은 오후지만 해는 한참이나 위에 있다. 돌탑 바로 옆에 배낭을 푼다. 설레인다. 오늘은 '나홀로 비박'의 첫 테잎을 끊는 날이니까. 그것도 늘 그리던 똥꼬봉 볼기짝 위에.
어디에 잠자리를 꾸릴까, 잠깐 갸우뚱거린다. 솔바람이 얼굴을 솔솔... 그래, 꼭대기에 풀자. 밤새 비가 내릴 하늘도 아니고. 이왕이면 바람과 별을 한껏 누려야지. 희망탑 바로 옆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을 꺼내 커버를 씌우니 정말 내 집이다. 축축한 양말을 벗고 벌렁 누워본다. 시야엔 온통 하늘인데, 나는 뽀송뽀송 '이불'에 누워 발바닥을 간질거리고 있다. 이불을 깔고 하늘을 덮었나 보다.
바위틈에서 라면을 끓인다. 작은 배낭에 거의 비박짐만 넣은 바람에, 먹거리가 너무 허술하다. 그래서 유난히 지친 하루를 보낸 것 같다. 하지만 꿈꾸던 반야봉에 이불 펴놓고 보글보글 라면향기를 맡는 이 순간, 마냥 기쁘다. 앗, 해가 진다! 라면냄새에 넋 놓다가 스멀스멀 해 도망가는 줄도 모르다니! 숟가락을 팽개치고 디카를 들이댄다. 구름이 끼어 해는 보이지 않지만, 녀석은 남은 빛을 고스란히 구름 위에 걸쳐놓았다. 구름은 정말 더불어 빛나는 존재다... 멋진 말을 꺼내려고 머리 굴리는 사이 라면이 퉁퉁.
# 반야도의 밤
별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저기도 또 저기도... 남은 빛을 탐욕스럽게 짜가며 어둔 산을 느낀다. 침낭에 들어가 '번데기'의 끈을 잡아당기니 포근하고 따뜻하다. 다시 얼굴만 내밀고 바람을 부빈다. 눈에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다. 별천지.... 한참 보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온다. 순간 놀라운 생각이 든다. 혼자 자는 밤이라 제법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생각' 씩이나 하다니. 모두 저 별천지와 바람에 취한 탓이다.
저것은 살쾡이? 고양이? 한 두 마리가 아니네... 눈빛들이 무서워. 오지마! 녀석들이 내 바램을 짓밟고 침낭으로 몰려든다. 날카로운 발톱들이 커버를 마구 헤집는다. 팔까지 파고든 발톱, 아프다. 안돼! 이러지 마!... 이거 새 커버란 말야!! .... 벌떡. 눈을 떴다. 꿈인가? 그렇게 요동을 쳤는데 몸은 잠든 그대로 다소곳하다. 꿈이구나. 덥다.... 마음 한 구석 겁이 나긴 했나보다. 어라, 가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그 판국에 외친 말이란 게, '이거 새 커버란 말야!' 후후... 정말 난 무섭긴 했던 걸까?
그 때 숲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꿈이 아니다. 반돌이와 장군이는 잡혀간 걸로 아는데... 뭐지? 돌을 차는 소리도 들린다. 멀어지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소리다. 그 괴이한 소리가 여전히 귓전에 울릴 무렵... "어이! 다 왔어! 정상이야!" 이런... 야간산행하는 아저씨들이다. 중첩된 발소리가 근처에서 멈추고 아저씨 셋이 바위에 앉는다. "이야, 이 아저씨 여기서 주무시네~" 아저씨라니... 하긴, 번데기 껍질만 보고 아저씨인지 처자인지 어찌 알까.
일어나 인사를 할까말까 잠시 생각한다. 여기서 주무시려나? 그런데 잠깐 머무르다가 일어서는 분위기다. 그들은 야간의 취중산행. 나는 홀로 비박. 반갑게 나눌 얘기도 있겠지만 번데기의 끈을 풀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침낭 속도 덥고 시간도 궁금하다. 곧 내려가려는 눈치이니 인사를 겸하여... 뿡! 뿡! 뿌웅!! 앗. 한 아저씨가 반야봉을 뒤흔드는 가스 방출을. 이때 내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면 민망하겠군. 그냥 이대로 있어야지.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번데기의 끈을 푼다. 시원한 바람이 휘감는다. 하늘은 별들이 점령했다. 칠흑 속에도 산너울이 느껴진다. 구름 너머로 시가지가 반짝거린다. 시간은 1시 반. 한밤의 반야는 이제 외따로 솟은 적막한 섬이 아니라, 신비한 심연 한가운데의 전망대가 되었다. 얼굴도 못 본 사내들의 호기 덕분이다. 잠깐의 인기척, 무인도의 적막감을 걷어내는 그 힘이 대단하구나. 고마워라...
# 반야도의 아침
청명한 새소리로 새벽을 느낀다. 잽싸게 번데기의 끈을 푼다. 짙고도 파란 하늘이다. 얼룩말의 줄무늬처럼, 저건 어둠에 밝음을 칠한 것인지 밝음에 어둠을 칠한 것인지... 이 바람도 차가운 것인지 시원한 것인지.
새벽 5시. 두 사람이 반야의 일출을 보려고 올라왔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나도 동쪽 바위로 올라선다. 헉. 숨이 멎을 것 같다. 천왕봉을 거느린 하늘이 타오른다. 짙푸른 바다 위로 불길이 일렁인다. 그 불길을 뚫고 시린 구슬처럼 해가 솟는다. 정제된 열정이 비상하고 있다, 고 착각한다.
그새 반야를 둘러싼 바다는 부지런히 아침을 맞이한다. 짙푸른 주능선도 투명한 바닷가로 밀려왔다. 꽃분홍 불길은 사그라들어 하얀 재로 남았다. 세 사람은 여전히 얼떨떨한데 세상은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카니발의 아침>이란 노래처럼, 축제가 끝난 아침의 적막감. 난 한참이나 바위에 앉아 주섬주섬 새벽이 떠난 자리를 둘러본다.
남실남실 지리 위에 떠오른 반야도(島). 어제오늘 나는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지는 해와 뜨는 해를 맘껏 누렸다. 바랄 게 없는 아침이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반야도를 내려와 지리의 수면 아래로 풍덩, 들어간다.
# 내림길
아무래도 먹거리가 허술했다. 어제 기운도 너무 많이 쏟았다. 신새벽의 신비와는 다르게, 이글대는 저 해는 얄미운 열덩어리일 뿐. 아...이걸 어째. 노고단으로 가는 걸음이 점점 무겁다. 배낭도 질질 끌려온다. 그늘을 핑계로 쉼 없이 다리쉼을 한다.
누군가 부스럭 숲을 헤치고 나온다. 긴 갈색머리. 찢어진 청바지. 체인 목걸이... 그리고 안쓰럽게 절룩거리는 다리. 청년은 긴 막대기를 스틱 삼고 연신 땀을 닦는다. 문득, 시각장애인 아저씨가 개와 함께 지리산 종주 끝에 천왕봉 일출을 보던 다큐가 생각난다. 그 아저씨는 옆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짐을 지고 뒤따르던 청년의 친구가 감탄사를 내뱉는다. 청년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출렁이는 지리를 바라본다. 별다른 말은 없이, 그렇지만 오래도록.
나도 다시 힘을 내어 숲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또 다리쉼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돌아앉은 바위 뒤로 들리는 소리. 아침에 반야봉을 내려서며 마주쳤던 아저씨들이다. 그 중 빈 몸이던 꺽다리 아저씨가 나를 무척 신기하게 여기며 말을 붙였었다. 어떻게 아가씨 혼자서 산봉우리에서 잤느냐며, 놀라던 표정이었다. 아마 반야봉을 올라 바로 되돌아오던 길인가 보다. 꺽다리 아저씨는 배낭이 없어 운동이 안되더라며, 자꾸만 내 짐을 달라신다. 여태 내 배낭을 남에게 들어달란 적이 없는데, 오늘은 너무 힘들다. 긴 실랑이가 필요 없이 나는 배낭을 건넨다.
빈 몸이라 가뿐한 게, 살 것 같다. 스틱만 따닥거리며 아저씨들의 뒤를 따른다. 어느새 노고단 고개. 반야봉을 배경으로 아저씨들 사진을 찍어드린다. LCD화면에 볼록볼록 봉우리가 들어온다. 그 새벽의 반야도... 나른한 한낮에 반야도의 광채가 벌써 가물가물하다. 이 작은 화면에 담아두기엔 턱도 없으니, 또 올라가야 하겠구나. 몸 튼튼 마음 튼튼히, 다시 반야도의 밤을 맞으러...
# 아른아른 꿈
구례터미널을 서성거리며 들고나는 사람들을 본다. 늘 들려오는 크레인게임기 소리. 익숙한 그 소리를 들으며 걸어온 길 되새기는 것도 내 익숙한 버릇이다. 자연물을 향한 내 탐욕은 더하면 더했지 덜한 법이 없다. 이번엔 유난히 그 탐욕에 눈이 멀어 허둥지둥 산을 올랐다. 어차피 나는 산 아래 사는 짐승. 주소지를 옮기면서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면 안되겠지. '행복한 산 위의 짐승이 되려면 준비가 철저해야지, 안그래?' 광주 가는 버스에서 콜콜 잠에 빠진다. 꿈속에 반야도의 별들이 남실거린다. 별들이 산 아래 떴는지 산 위에 떴는지,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