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2. 8-10
오랫동안 나는 산길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산이 있음에 고마워하고
내 튼튼한 두 다리를 주신 어버이께 눈물겨워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는 일이야말로 나의 넉넉함
내가 나에게 보태는 큰 믿음이었다...
<그 산에 역사가 있었다 - 이성부>
1.
지리산에 오르는 아침이면 늘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 노래 하나를 돌려 듣습니다. 그 느낌에 푹 빠져 버스를 타고 먼 산으로 다가갑니다. 주차장에 내려 배낭을 고쳐 매면 나는 이미 그 품에 있습니다. 그 많던 생각도 모두 '그렇고 그런 따위'가 되어, 지나온 길에 다 떨구어집니다. 기분이 맑아집니다. 숨 한 번 크게 쉬고 산길로 들어갑니다.
일요일 오후 백무동. 며칠내 발목을 붙든 폭설은 이미 옛날이고, 바람은 따사롭기만 합니다. 내 튼튼한 두 다리가 뿌듯합니다. 산길에만 들면 얼떨결에 받아 쥐는 '텅빈 마음'의 선물에도 감사합니다. '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 애절한 가사는 아랫마을 이야기로 멀어지고, 경쾌한 선율만 흥얼흥얼 입가에 남았습니다.
장터목 가는 길, 지루한 돌길이 끝나고 드디어 능선을 만났습니다. 건너편 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 할 말을 잃습니다. 저는 유난히도 조망을 좋아합니다. 긴긴 숲길을 견디는 이유는 모두 기다림 끝에 펼쳐지는 산너울 때문입니다.
장터목산장이 보이는 언덕길에서 무심코 오른쪽을 봅니다. 솜사탕마냥 눈을 품은 나무숲 사이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화들짝 놀라 언덕으로 튀어 오릅니다. 눈밭에 배낭을 던져놓고 셔터를 누릅니다. 구름과 해가 사이좋게 엎치락뒤치락... 구름과 해가 함께 만드는 일몰은 역동적이고, 그래서 더 황홀합니다. 코앞에 손짓하는 나무 하나가 보입니다. 늘 저걸 보는 녀석은 일몰보다도 난데없는 저의 호들갑이 더 신기할 지도 모릅니다.
고즈넉한 산장 옆구리로 소리 없이 들어가 저녁을 맞습니다. 오늘은 왠지 혼자 취사장에 들어가는 게 청승맞게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산장에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혼자서도 잘 먹고 잘 놀았는데 오늘은... 긁적긁적. 마침 배도 고프지 않습니다. 침상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커피 한 잔에 빵으로 요기를 합니다. 황홀한 일몰 덕분에 괜히 느긋합니다.
밤바람을 맞는 일은 또하나의 기쁨입니다. 발전기소리에 물러난 바람소리를 찾느라 귀를 쫑긋하고 장터목을 어슬렁거립니다. 바람소리에 몸과 마음을 맡깁니다. 구름이 장터목을 흐르고 있습니다. 저기 중산리가 불빛으로 빛났다가 구름에 덮였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그 시절 불빛이 저리 빛났을 리는 없지만. 전사는 칠흑 속에서도 마을을 보았을 것입니다. 내려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몸... 이웃을 적으로 겨누어 여기까지 등 떠밀어낸 이념이란 것도, 고개를 넘는 밤구름 앞에서 허무해졌을 지 모릅니다. 그 전사는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무얼 보았을까. 되려 눈을 부릅뜨고 저 불빛을 노려봤을 지도 모릅니다. 진절머리 나는 것을 떨치기 위해서는 도리어 그것과 맞서버리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그네들의 전장이 온통 폐허였다면 차라리 견디기 쉬웠을 텐데. 지독히 아름다워 허무의 칼날까지 들이대는 산. 지리산은 그런 전사들에게 정말 잔인한 산이었을 겁니다. 캐캐묵은 기억의 한 끝에서 외할아버지를 떠올려봅니다. 저기 어디였을까... 젊은 그도 추위와 허기보다 허무감이 더 무서웠을까? 당신이 스러진 전장을, 등 따숩고 배부른 외손녀가 뜰 삼아 걷고 있습니다.
2.
장터목에 아침이 밝았습니다. 차가운 산바람이 폐 속으로 파고듭니다. 상쾌합니다. 온 세상이 청명합니다. 먼 산 빈가지도 손에 잡힐 듯, 맑습니다. 근래엔 늘 아련한 반야봉을 보았는데, 오늘은 선명한 속살이 오히려 낯설게 보입니다. 밤새 더딘 걸음이었는지, 아직도 하늘 높은 달이 파란 물에 둥실.
두근거립니다. 저는 오늘 그리도 그리던 '세석과 장터목 사이'를 걷게 되니까요. 주능선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길, 그러나 올해 눈이 내린 이후로는 한 번도 걷지 못한 길. 되도록 천천히 음미할 생각입니다. 실은 일부러 맘먹지 않아도 거북이가 되버립니다. '이 예쁜 길을 서둘러 가버리겠다고?' 마음이 발을 꽁꽁 묶어버리니까요.
두 번의 '목장길'을 지나, 연하봉을 스치고, 일출봉을 곁눈질하며, 꽁초바위에 철퍼덕 앉아... 눈부신 햇살과 새하얀 눈밭에 실눈을 뜨다가... 저기 남해바다에 눈이 똥그래졌다가... 늘 믿음직스런 '천왕봉과 친구들'을 쉼없이 뒤돌아봤다가... 손에 닿을 듯한 덕유산을 음미하다가... '세석과 장터목 사이'를 걷는 저는 전신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마주오는 이들에게 길을 비켜주는 것도 좋습니다. 덕분에 또 멈춰 음미할 시간을 누리니까요.
그렇게 촛대봉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꼭대기에 올라 바람을 쐬고 바위틈에 짐을 풉니다. 산장 벤치도 좋지만, 요즘은 이렇게 봉우리에서 커피 한 잔 들고 세석평전을 내려다보는 게 더 좋습니다. '내가 멧돼지라면..' 생뚱맞은 그 생각이 간절해지는 곳도 촛대봉입니다. 멧돼지라면 저 세석평전을 마음껏 내달릴 수도 있고, 딱지를 끊을 일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촛대봉은 늘 그렇게 시간을 꿀꺽 먹어치웁니다. 천천히 배낭을 매고 영신봉을 향합니다. 이제 세석과 장터목 사이의 감흥을 되새기며 걷습니다. 쉼없이 걷고 눈밭을 헤치고... 감흥은 어느새 사그라들고 저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낮의 정적이 부추겼는지도 모릅니다. 실은, 글귀 하나가 어제 집을 나설 때부터 줄곧 따라왔습니다. 산에 혼자 가는 사람은 이기적이다....? 온전히 그렇다고 수긍하긴 어렵지만...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에 올라도 늘 관계를 맺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산과의 관계. 저는 갈수록 사람을 피해서라도 산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저의 관계맺기는 진공상태라는 느낌도 듭니다.
'당했다'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던 때가 길었습니다. 지금은 '당하긴 뭘, 니가 일으킨 물결에 세상이 보낸 반작용이지.' 하고 피식 웃습니다. 꽤나 유들유들해진 모양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몸을 사립니다. 지리산만큼은.... 여기서만큼은 조금도 쓰리지 않은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칼바람에도 기꺼이 몸을 맡깁니다. 하지만 한 구석 편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조금도 쓰리지 않은 것을 바래? 욕심도 많네... 쓴 것은 뱉고 단 것만 찾아 도망왔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 모름지기 세상사는 부대끼며 가는 거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저는 이기적인 아이입니다.
실은 잘 모릅니다. 부인하려고 해봤자 할 말이 없고, 또 그렇게 단정지을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바람 불지 않으면 인생살이가 아니라는데, 산바람은 그리도 좋아하면서 세상바람엔 왜 그리 몸을 사리는지.
나무를 마주보고 앉습니다. 저 나무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허공을 향한 힘있는 겨냥 같기도 하고, 부질없는 허우적거림 같기도 합니다. 헛된 몸부림이든 자신만만한 겨냥이든, 어쨌든 '한바탕 해본다'는 그 느낌이 좋습니다. 탄광사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날, 해변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던 조르바처럼.
벽소령 산장이 보입니다. 군사도로를 허리춤에 두른 봉우리에도 시선이 갑니다. 꽃대봉이라고 했지요... 흐드러진 꽃이 너무 아름다워 빨치산들이 지었다는 이름. 상춘객이 아니라, 서러운 민초들의 작명이었다는 이유로 제겐 금새 안타까운 이름이 되버렸습니다. 아, 이 지긋지긋한 감상. 살짝만 뒤집어보면 청승의 다른 이름... '청승이야!' 하면서도 걷는 내내 그 봉우리를 마음에 담습니다.
3.
이른 오후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벽소령에서 자려던 터라 해가 중천이어도 갈등이 없습니다. 침상에 잠깐 누워 생각합니다. '글고보니 나도 어릴 땐... 혼자 산에 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사촌오빠가 산에 혼자 다닌단 소릴 듣고 얼마나 갸우뚱했던지... 근데 내가 이러고 있네? 푸하...'
그러게 말입니다. 절대 아니라던 일을, 살다보면 내가 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던 일은 어느 날 그게 아닌 것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사실, 의외의 일을 하는 것보다, 그 변화를 불현듯 깨닫는 당혹감이 더 놀랍습니다. 모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멀스멀 흘러가는 시간 때문입니다. 당혹감을 맘껏 음미하다 스르르... 눈을 뜨니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취사장에 내려가 간단히 밥을 해먹습니다. 젊은 친구 서넛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고 짐을 정리하러 다시 취사장문을 엽니다. .... 어라?? 저게 누구야?? 나 꿈꾸는 거 아니지? 맞은 편에 앉은 '저게'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만 벌리고 있습니다.
평소에 얼굴 보기도 힘든 사촌오빠를, 어릴 땐 이해하지 못했다며 침상에서 잠깐 떠올렸던 그 오빠를... 첩첩산중 지리산 벽소령에서 그렇게 만났습니다. 사촌오빠는 직장산악회에서 무박2일로 천왕봉에 왔다가 하루 더 있으려고 친구와 벽소령까지 왔다고 합니다. 놀랍습니다. 제가 이른 오후 연하천으로 발걸음을 돌렸다면 이 만남을 놓쳐버렸겠지요.
십수년이나 차이가 나고 사는 곳도 멀어, 오빠와 나는 철들면서 만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친척들 소식통에, 오빠는 혼자 산에 다니면서 결혼도 못하고 나이만 먹은 노총각으로, 나는 늘 허깨비 짓만 하는 현실부적응아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새에 말입니다.
뜻밖의 우연으로 지리산에서 만난 오빠와 나는 술병을 땁니다. 서로가 좋아하는 지리산에 마주 앉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습니다. 산행으로 지친 친구분은 먼저 잠자리에 듭니다. 저는 어릴 적 이해하지 못했다던 사촌오빠와 꼭 닮은 모습으로 앉아있습니다. 맞아맞아! 맞장구도 치면서. 우리는 서로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며 진실(?)을 바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벽소령 달빛과 참이슬의 기운으로 규명한 진상은 이렇습니다. 오빠는 장가를 못간 게 아니라 안간 것이고, 나는 현실에 적응을 못한 게 아니라 손수 또다른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실은 여자 많았어. 물론 마흔 되기 전까지는." "오빠, 나도 사실 따르는 남자 많아. 내가 싫어해서 그렇지. 푸하하!." 아무렴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이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진실이 될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믿습니다. 믿어서 해가 될 것 없는 흐뭇한 밤. 코흘리개 꼬마와 순박한 산총각은 먼 훗날 지리산 벽소령에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4.
셋째 날도 하늘은 그지없이 파랗습니다. 온 산자락이 구름이란 놈을 들이지 말자고 작당을 했나 봅니다. 사촌오빠와 친구분은 화엄사까지 간다고 합니다. 저는 이날 바로 하산하기로 해서 산장에서 인사를 나눕니다. 잘 가시게 친구!... 저도 늦게 배낭을 챙기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눈이 부신... 이대로 내려가기 아쉽습니다.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연하천으로 발걸음을 돌려버립니다.
다져진 눈길은 이제 녹고 있습니다. 결국 주능을 탈 거였으면 오빠를 따라갈 걸 그랬나? 어느새 삼각고지에 다가갑니다. 마지막 망바위에 앉아 건너편 명선봉에 시선을 보냅니다. 안녕히...! 음정마을 갈림길로 내려섭니다. 작전도로는 꽤나 지겹지만, 이 갈림길에서 작전도로와 만나는 2.5km의 오솔길은 참 좋아합니다. 썰매도 타고, 오른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주능을 기웃거리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금새 작전도로에 도착합니다. 자연휴양림으로 내려서는 입구에서 잠시 갈등을 합니다. 여기로 내려갈까?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도 '천왕봉과 친구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조망을 위해 미련없이 계곡길을 포기합니다. 길고 밋밋한 길이라도, 먼산바라기의 기쁨은 지루함을 충분히 보상해주니까요.
이제. 튼튼한 두 다리로 산이 있음에 고마워하던 그 길은 끝났습니다. 버스는 1시간 후에나 옵니다. 한적한 시골 정류장 한켠에서 물을 끓입니다. 남은 비스켓을 아작거리며 커피를 마십니다. 햇살에 스패츠와 장갑을 널부러놓고 말립니다. 건너 산자락이 햇살에 아득합니다. 저 산에 내가 정말 있었을까? 지리산. 그리고 햇살.... 더 필요한 게 없는 오후입니다. * * * * * * * *
주능선의 아침, 반야봉 위로 노니는 달
주능선 종주에 나선 구름들
남녘 산들의 아침
남쪽바라기 일출봉과 구상나무
태양을 향해 쏘는거야?
새하얀 '목장길'
꽁초바위에서 바라본 주능선, 선명해서 도리어 낯선...
자작나무의 손짓
이 비행접시는 따뜻하면 녹아요...
세석가는 길에 본, 덕유산의 아침.
계곡마다 찾아든 햇살
늘 보고 또 봐도 설레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