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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4.01.11 13:20

특별한 지리산 연(緣)

조회 수 2114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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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글 재주가 뛰어나시군요..

저의 글솜씨는 보잘것 없지만 지리산에서 만난 여러 님들과의 소중한 인연(因緣)을 많은 분들과 함께 하고 싶어 부족하나마 이렇게 글을 올리니, 부디 귀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2004년 1월 8일 목요일 : 첫날
이른 아침, 부산 서부터미널.
화엄사행 버스를 타기까지 조금은 여유있는 시간.
터미널로 올라가는 길에 길거리 찹쌀떡을 천원어치 사서 주머니에 넣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출발까지는 아직 10분 정도 남은 시간.
오늘 화엄사까지 가는 손님은 꽤 많았다. "싸부님"이라고 부르는 10명이 넘는 꼬맹이들......
'어느 도장에서 극기 훈련이라도 하러 가는 건가?'
그 애들을 보니 왠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마 우리 도장 꼬맹이들이 생각나서 그랬나 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망미동의 모 국술원 관장님과 꼬맹이 관원들이었다.)

버스 안의 디지털 시계가 8시 32분을 가리키고 버스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3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되는데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그러나 이것은 나의 얼토당토 않는 기우였으니.
먹고자고 먹고자고 하다 보니 어느새 화엄사 앞.(정확하게는 지리산 남부지소 앞이다.)

생판 처음 지리산에 온 나는 노고단까지 어떻게 가야 되는지 몰라서 남부지소(지금은 공사 중이라 내부가 어지러웠음.) 문을 살짝 열어 안에 계신 분들께 노고단까지 어떻게 가면 되냐고 물었다.
그 중 어떤 분께서 "어떻게 가실 껀데요?"하고 웃으며 물어보셨다.
"...걸어 갈껀데요.."
그랬더니 그 분은 안내판을 보여주시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화엄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에서 만났던 그 꼬맹이들은 내 뒤에서 사부님의 지시를 받으며 시끌시끌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화엄사 앞에 도착해서 500ml 빈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화장실에 갔다온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오늘의 지리산 날씨는............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한낮에 산행한 탓도 있겠지만 정말 더웠고,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 맑고 시원한 공기가 내 탁한 정신까지 정화시켜 주는 듯 했다.

출발한 지 20분이 채 안 되어 난 겉옷 하나를 벗어 가방에 걸쳤다.
또 이내 목도리를 풀어 반대쪽에.

내가 화엄사 앞에서 조금 지체한 동안 꼬맹이 등반객들은 나를 앞서 벌써 점심을 만들어 먹느라 시끌벅적 하였다.
나는 따로 취사 준비를 해가지 않았기에 걸어가면서 아침에 샀던 찹쌀떡을 1개씩 꺼내 먹었다. 3개 중 1개는 이미 버스 안에서 먹어치운 터.
떡 하나 먹고 물 마시고 1시간 가다가 떡 하나 먹고 물 마시고.
속전속결 점심식사 끝.

오후 2시 30분. 중재 도착.
10분쯤 갔을까?
무심코 가방 오른쪽에 시선을 주니 '허걱! 목도리가 없잖여!!'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래도 남자친구에게 선물받은 목도리라 그냥은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써는 그 목도리가 절실했다.
올라오던 길을 다시 되짚어 내려가며 목도리가 있나 여기저기 살펴 보았지만 저~~~~기 밑에까지도 보이지 않는 나의 목도리...
'흑흑흑...결국 잃어버리는구나..........'

목도리가 지리산이 좋아 나를 배신 때리고 갔나부다..라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다시 걸음을 윗쪽으로 옮겼다.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끝없는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졌다.
참.....힘들었다.

가다보니 저만치 나처럼 홀로 산행을 하는 어떤 남자분의 모습이 보였다.
노고단 대피소까지 1.5km 남은 지점.
큰 바위에 앉아 있던 그 남자분이 안내판을 보고 있는 나를 향해 "물 한 잔 하실래요?"라며 말을 건넸다.
산행에서 물의 소중함을 알기에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참고로 난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이번 여행에서도 500ml짜리 물통 하나 달랑 들고 와서 한 병 다 마신 건 첫날 뿐이었다.)


'끝없는 오르막길.........언제 끝나는 걸까...'

아니!!! 저기 빛나는 것은! 평지다 평지!!!+_+
그랬다. 드뎌 길고 긴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까지 도착한 것이었다.
후아............'수고하셨습니다' 스스로에게 인사하고 아스팔트 길을 따라 뿌듯한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사진기를 들고 오지 않았기에, 내 두 눈과 마음속에 지리산의 풍경을 가득 담으며.

4시 17분. 드디어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가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이용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네들은 2층.

"혼자 오셨어요?"
내가 2층에 올라가서 막 가방을 내려놓자 말을 건네는 여자분이 계셨으니.
그 분 또한 홀로 산행을 오신 분이었다.
나의 지리산 첫번째 인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 분은 바닥이 차가우니 깔고 앉으라며 깔개? 깔판? 용어는 잘 모르겠으나 암튼 폭신폭신한 걸 하나 주셨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지친 몸을 달래느라 조금 앉아 쉬었다.

그리고 이내 처음 와본 대피소가 궁금하여 대피소 안팎을 쏘다니며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취침 전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책을 골랐다.
법정 스님의 말씀을 류시화님께서 엮으신 '산에는 꽃이 피네'.
내가 좋아하는 두 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기에, 좋아라 하며 들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신발끈을 풀었다.
그때 2층에서 막 내려오시는 그 여자분.-나중에는 미숙 언니라고 불렀다.
일몰 보러 같이 가자고 하셨다.
산에서는 이것저것 다 경험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에 따라나섰다.
해질 무렵의 노고단 고개는 꽤 추웠다.
'흑흑흑 내 목도리...'
떠나간 목도리가 그리웠다.

친절한 미숙 언니는 귀마개를 빌려주고 초콜렛도 주셨다.
감격의 눈물...ㅠ.ㅠ

디지털 카메라로 열심히 일몰의 광경을 찍고 계신 미숙 언니를 바라보며...
감정이 메말라 붙은 나를 느꼈다.
그랬다. 다들 장관이라며 감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나는 왜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내 마음이 분명 어딘가 고장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긴. 속세(?)에서도 그다지 평범한 감정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암튼 가짜 노고단 고개에서 20~30분간 추운 바람을 맞으며 일몰을 보고 내려가 취사장으로 직행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 시피 난 취사도구 일체를 준비해 오지 않았다.
물론 집에 취사도구도 없지만,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배낭에 애시당초 들어갈 구멍도 없었다.
내 배낭은...............학교 다닐 때 쓰는 그냥 책가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준비해왔다.
그것도 겨우겨우 쑤셔넣어서 빵빵하게 채워왔거늘 하물며 취사도구? 턱도 없지.

집에서 3끼분 정도 될 양의 밥을 싸서 도시락통에 넣고 김치와 참치를 반찬으로 준비해왔는데 언니가 밥 많이 해 놨으니 찌개 끓여서 같이 먹자고 하셨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끝끝내 붙잡는 인정어린 손길에 결국 빈대 모드 돌입.
김치찌개와 밥은......................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또 감격........ㅠ.ㅠ

여기서 아까 노고단 올라오던 길에 만났던 그 남자분과 또 마주쳤기에 한 번 더 인사하고 셋이서 같이 밥을 먹었다.
그 애(어라? 그 "애"? 알고 봤더니 우리 동생과 나이가 같다. 나랑 2살 차이가 난다. 이름은 김성주. 그러고보니...허락도 맡지 않고 두 분의 성함을 공개해도 되는 건가? 에라 모르겠다.)는 반찬을 많이도 싸왔기에 우린 풍족하게 먹고 밥도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식후 따뜻한 차 한 잔까지..............

'후아~ 너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
난 스스로에게 물었다.
고생하기 위해 온 지리산에서 이렇게 잘 먹고 좋은 님들 만나서 좋은 시간 보낼 자격이 있는지 물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좋은 님들과의 연(緣)마저 뿌리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스스로를 달래며, 저녁 산보 가자는 언니의 말에 즐거이 따라나섰다.

지리산의 겨울 날씨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포근한 날씨였다.
별로 춥지도 않고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반짝이는 별들과 산 아래로 보이는 불빛들...
모든 것이 예뻤다.

대피소의 취침 시간은 내 평균 취침 시간보다 3~4시간은 이른 시간이었다.
집에서는 맨날 새벽에 잤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서 아까 가져다 놓은 책을 펼쳤다.
어라? 근데 10분쯤 지났을까? 저절로 눈이 감기네.
이런이런...............책을 보자마자 잠이 오다니...
결국 책을 엎어놓고 잤다.


2004년 1월 9일 금요일 : 둘쨋날
새벽에 여러 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4시 40분에 일어났다.
어두컴컴한 대피소 안. 난 랜턴을 될 수 있으면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비추며 짧은 글을 썼다.
언니에게 전하는 감사의 메세지...
언니에게 들킬 새라 조심조심 빠르게 써내려갔고 언니 모르게 살짝 접어 언니 배낭 밑에 끼워 두었다.

언니는 내가 뽀시락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아님 나를 챙겨주기 위해 일부러 일어난건지 암튼 나랑 같이 일어나서 취사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새벽.
언니는 어제 남은 밥으로 따뜻한 누룽지를 만들어 주시며 내게 먹고 가라고 하셨다.
누룽지 만큼이나 언니의 마음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고마웠다.

언니는 오늘 벽소령까지만 가면 되기에 느긋이 출발해도 되는데 괜히 나땜에 잠을 깨서 죄송스러웠다.
난 오늘 세석 산장까지 가야 했다.
초행길에, 눈발 날리는 어두운 새벽에 홀로 간다니, 미숙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옷. 근데 이게 웬 행운이랴.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어제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꼬맹이들이 취사장에 들이닥쳤다.
알고봤더니 걔네들도 나랑 목적지가 같았고,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출발할 것이라 했다.
홀로 가는 내가 너무나도 걱정이 된 나머지 관장님께 나를 부탁하는 미숙 언니...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고마움을 보답할 길이 없기에 내게 남은 유일한 군것질 꺼리인 귤 하나를 언니의 코펠 안에 넣어둔 후, 6시 15분 노고단 대피소를 출발했다.

노고단 고개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랜턴을 손에 들고 꼬맹이들의 행렬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관장님은 맨 뒤에서 앞서가는 모든 이들을 보호해 주셨고, 더불어 내 말동무도 되어 주셨다.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던 중 국술원이라는 도장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와 일정이 같다는 것도 알았다.

쉬어가는 지점에서 "누나한테 사탕 좀 드려라"하는 관장님 말씀에 사탕을 한 아름 안겨주는 아이, 배낭을 내리고 휴식 겸 간식 먹는 타임에 초코파이를 먹으라며 주는 아이, 지쳐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의 가방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준 내게 망설임없이 목도리를 내주던 아이, 같이 사진 찍자며 내 팔을 이끌던 아이...........
이들이 지리산에서 맺은 내 소중한 두번째 인연이었다.

난 이 아이들과 오늘 일정을 함께 하기로 했다.
고생하기 위해 온 이번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님들 덕분에 예정에도 없던 재미난 여행이 되고 말 것 같은 즐거운 예감이....................

꼬맹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정말 즐거웠다.
관장님도 재미난 분이셨고, 애들도 하나같이 개구쟁이들에다가 하는 짓들이 하나같이 너무 웃겼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여행은...............

하지만 오늘 목표한 세석 산장은 포기해야 했다.
낮 12시 5분.
연하천 산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는데, 문제는 애들이 집에 가고 싶다며 관장님을 조르기 시작한 것.
다들 많이 지쳐있는 터라 관장님도 애들을 억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연하천 산장에서 벽소령까지만 가기로 결정하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은 뒤 1시 40분쯤에 출발했다.
물론 나도 덩달아.......................

이제 벽소령까지만 가면 되기에 여정은 더없이 느긋해졌다.
가다가 애들은 눈싸움도 하고 사진도 찍고 여유 부리며 쉬다가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우린 한참 늦은 오후 4시 45분 벽소령 산장에 도착했다.
예약을 하지 않은 터라 6시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자리는 있을 것 같았고, 일단 취사장으로 내려가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저녁식사를 마칠 무렵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예약 못한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
그릇을 화장지로 닦아내고 있는 나를 보며 한 꼬맹이가 "누나...그릇 제가 닦을테니 놔두고 올라가 보세요"라며 나를 재촉했다.
어이구 기특한 녀석.
씨익- 한 번 웃어주고는 닦던 것만 마저 닦은 뒤 산장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한 여인과 남정네가 있었으니.
그렇다. 그들은 바로 노고단 산장에서 헤어졌던 미숙언니와 성주.
여기서 또 만났던 것이다.
우린 재회를 너무 반가워하며 다시 인사를 나누고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매표소 앞에 가니 관장님께서 표를 사고 계셨는데 알고보니 내 것까지 같이 사 주신 것이었다.
관장님은 사양하셨지만 난 값을 치르고 표를 받았다.
언니와 성주도 표를 사고 우린 각자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지저분해진 바지를 갈아입고 양말도 벗어 말렸다.

성주와 언니와 난 또 한 번 야외 테이블에서 티 타임을 가졌다.
여기서 올려다본 밤하늘은 더 반짝거렸다. 크고 빛나는 별들이 수없이 많았다.
간단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추워서 산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골랐는데, 아쉽게도 여긴 책이 많이 없었다.
대충 골라 읽다가 거실로 나오니 아까 같이 왔던 꼬맹이들이 2~3명 나와서 앉아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은 열심히 과자를 먹고 있었고, 난 그 쪽으로 다가가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요즘의 초등학생들은 실로 엄청났다.
못 하는 말이 없고, 모르는 게 없었다.
나도 모르는 이상한 말들도 많이 알고 있었으며, 자기 말로는 이미 안 해 본 게 없단다.
면역이 없을수록 빠른 속도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법.
이 애들은 단지 그 나이에 맞는 순진한 개구쟁이임에는 틀림없는데 성인 문화에 지나치게 노출이 많이 되어 있었다.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지만 과연 얼마나 먹혔을지.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떤 남자 한 분이 말을 걸었다.
난 조금 경계를 하였고(별 뜻은 없음. 그냥....이건 지극히 내가 가진 문제이므로.), 그 꼬맹이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 사부님 친구의 친구분이라는 말을 듣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나도 이내 들어갈려고 하자, 그 남자분이 좀 더 놀다가 들어가라고 했지만 왠지 경계심이 일어(역시 마찬가지. 그 남자분은 아무 문제없음.)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나도 방으로 들어갔다.


2004년 1월 10일 토요일 : 마지막날
벽소령은 소등 시간이 9시.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틀 산행에 지친 나는 이내 잠이 들었고, 마찬가지로 새벽에 여러 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노고단에서는 2층이라 바닥이 따땃했는데 여긴 1층이라 바닥이 차가웠다. 추워서 여러 번 깼던 듯 하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언니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니 온 몸이 쑤셨다.
'아이고오 삭신이야...'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은 후 가방을 들고 대피소 문을 나섰다.
바람이 장난 아닌 엄청 추운 날씨.
'으미 추운그..'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취사장으로 들어섰다.
취사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고, 꼬맹이들은 벌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도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오늘도 역시나 김치찌개.
산에서 이만한 반찬이 또 어디 있으랴.

배부르게 먹고 간단히 치운 뒤 화장실에 들렀다가 아이젠을 착용하고 7시 40분쯤 성주와 함께 천왕봉을 향해 출발했다.
사실 조금 망설여졌다.
고질병인 위장병이 도진 데다가 발바닥에 있는 상처가 이틀간의 무리한 산행 탓에 한 걸음을 힘들게 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일단 갔다.

한 40분쯤 갔을까?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 난 가던 발걸음을 산장으로 다시 돌려야 했다.
내가 걱정된다며 산장까지 굳이 같이 가자는 성주를 만류하며(나때문에 성주의 종주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정말 싫었다.) 성주의 발길을 내가 잡고 있는 것 같아 어여 가라고 재촉하였다.
차비가 부족한 내게 성주는 선뜻 돈을 빌려 주었고(그때 내 수중에는 달랑 만원 있었다. 내가 원래 좀 대책 없는 인간이다.) 우리는 거기서 아쉬운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젠을 풀고 나니 발바닥의 고통은 더 했다. 너무 아파 한 걸음 내딛기가 고통스러워 겨우 절뚝거리면서 산장에 도착하였는데...
휑~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의신...으로 갈려면 밑으로 내려가는 거겠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내려가는데 나와 같은 길을 가시는 세 분을 만났다.
모자(母子)와 어제 내게 말을 건네던 그 남자분.
남자분께서 "하산하실꺼죠? 같이 갑시다."라며 호탕하게 말을 건네셨다.
난 내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저는 다리가 별로 안 좋아서 천천히 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라고 사양했으나, 굳이 같이 가자고 하시는 그 온정에 이끌려 결국 같이 가게 되었으니....
여기서 지리산의 따뜻한 인연을 또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남자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너무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나를 보살펴 주셨다.
끼고 계시던 장갑을 따뜻하다며 내게 선뜻 벗어 주셨고 내려가는 길에 더워서 가방에 걸치고 가던 내 겉옷을 내 사양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들어주셨다.
또한 아몬드 사탕 한 봉지와 핫브레이크, 연양갱 등 먹을 것을 마구마구 주셨다.
확실한 영양 보충이 되었음은 물론, 그 남자분은 놀라울 만큼 지리산에 대해 많이 알고 계셨기에(아니, 지리산 뿐 아니라, 이 일대 모든 지역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듯 했다.) 의신까지 가는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자리에서 사진도 찍어주셨다.

또한 같이 내려갔던 아주머니께서 너무 훌륭한 안내를 받았기에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며 그 남자분께 점심 같이 하기를 권하시며 더불어 내게도 같이 하자고 말씀하셨다.
난 갑자기 사치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시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인간이 아닌데...
스스로를 반성하고 꾸짖고자 갔던 이번 지리산 행은 그 취지로 보자면 실패로 끝난 듯 하다.
하지만 이제는 내 인연이 되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분들과의 소중한 만남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다.

음.
갑자기 글루미스러운 부뉘기가 되버렸군.
암튼간에 셋쨋날 맺은 연(緣)으로 점심땐 정말 맛난 백숙과 죽으로 배를 따뜻하고 풍족하게 채운 뒤 그 식당에서 차를 얻어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내려왔다.
그 모자(母子)와의 동행은 여기까지였으나, 연락처를 받았으니 분명 다시 뵐 날이 있을 듯 하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얻어 먹기만 해서 송구스러울 따름이지만, 지리산에서 다시 만나 갚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남자분은 나를 온천으로 데리고 가서 하동 온천물에 목욕까지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느껴지는 그 상쾌한 기운이란...
그 분은 차로 나를 하동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셨고 저녁까지 사 주셨다.
그 집이 여기서 제일 맛있는 재첩국집이라면서...
재첩진밥인가? 진한 재첩국에 10가지가 넘는 반찬에 따뜻한 밥...
난 이런 친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고 5시 50분에 부산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 분은 가면서 먹으라고 귤과 딸기우유, 커피우유, 미에로 화이바 등 가는 순간까지 나를 챙겨 주셨다.
'이런.............이 은혜를 뭘로 다 갚지.......'
벌써부터 갚을 게 걱정이다. 받은 게 너무 많기에..............

그 분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싶어 사주신 것들을 차 안에서 하나씩 꺼내 먹었다.
지리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먹다가 자다가 먹다가 자다가.
부산에 도착하니 배가 빵빵.
저녁 8시 15분 서부터미널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나의 짧은 첫번째 지리산 여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간사한 인간의 마음을 그 무엇이 따르랴.
부산에 도착하자 금방 그리워지는 지리산이라니...
산행 할 때는 후회되는 순간도 있었는데 인간의 마음이란 참 우스운 것이었다.
(나만 그런가? 음...)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한가 봅니다.
부족한 나를 끊임없이 반성하며 열심히 한 번 살아봐야겠습니다.

이번달 안으로 또 한 번 지리산에 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쌍계사 쪽으로...
종주는 실패로 끝났지만 다시 오라는 지리산의 부름이라 여기고 다음을 또 기약할랍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 ?
    허허바다 2004.01.11 15:15
    그리 챙겨 주시는 이웃들이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지리에서의 그런 이웃들이 이 세상에도 가득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우와! 아이들과 지리산행까지.. 님께서는 천사들과의 산행을 하신 것입니다. 저두 달랑 몸만 가서 어찌 한번 삐대어 볼까요? ㅎㅎ 많은 인연을 엮고 오신 하마님이 매우 부럽습니다. ^^* 찌뿌둥한 오후 정말 산뜻한, 정이 철철 넘치는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사랑방에도 자주 오시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 ?
    부도옹 2004.01.11 21:40
    지리산에서의 좋은 인연들, 오래오래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
  • ?
    오 해 봉 2004.01.12 02:46
    참 재미있는 산행기입니다.미숙언니 성주랑 어즈간하면 종주를 해볼걸
    무적이나 아쉽네요.지리산에가보니 모두가 식구같고 아껴주고 좋지요.
    이다음엔 세석.장터목.천왕봉.대원사까지 꼭 종주하세요.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 ?
    하마 2004.01.12 03:38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겨주신 메모를 보니 글 쓴 보람이 있네요 ㅎㅎ 에또...조만간 쌍계사에서 출발해서 중산리로 하산하는 남부능선 코스로 도전해볼 생각인데 쌍계사와 세석산장 사이에는 쉬어갈만한 곳이 없는지요? 시간상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오는데...어쩌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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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바다 2004.01.12 09:28
    좌측 메뉴 "질문과 답변"에 질문을 올려보시거나 또는 좌측 메뉴 "지리마당>김수훈의 초행 길라잡이"에 질문을 올려 보시어 답을 구해 보시죠. 언제 부산을 출발하시어 대강의 일정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등을 같이 써 주시면 더 좋은 답변을 구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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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人 2004.01.12 11:04
    제 개인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지리산의 종주능선에 올라오신 모든 분들이 다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올라오시면 다들 좋아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지리산의 어머니 같은 포근함이겠지요. 좋은 인연 앞으로도 계속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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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lu 2004.01.12 11:40
    ^^하마님,산행기 귀엽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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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 2004.01.12 12:01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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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1915 2004.01.18 20:01
    흠. 정말 귀엽게(ㅎㅎ) 잘 읽었습니다.귀엽게 봐 달라구 부탁하셔서 그리 봤으니 아주 잘 된거지요?(ㅎㅎ) 아! 너무 부럽습니다.몇년동안 산 그림자도 못 밟아봤는데 저리 좋으신 분들과의 만남.거기에 미래의 꿈나무들까지요.그 좋은 인연 소중히 간직하시고 좋은일 잇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산행계획 세우시는거 같던데 꼭 이루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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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연 2004.01.24 02:02
    하마님 참 맑은 분이시네요. 잠 안오는 밤, 다시 읽어보다가 제 마음까지 '초심'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이달 안에 지리산에 또 가실 예정이라면... 한번 마주쳤으면 좋겠네요. 저도 홀로산행족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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