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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 2003. 9. 6. ~ 9. 7. (1박2일)
산행인원 : 혼자
산행코스 : 백무동 - 장터목(1박) - 천왕봉 - 장터목 - 중산리


# 1 ; 불길한 예감

산행을 하루 앞둔 금요일 잠깐 졸던 중에 이빨이 모조리 으스러져 빠져버리는 꿈을 꾸었다. 산행을 앞두고 있던지라 불길한 예감이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징후는 그 하나로만 그치지 않았다. 토요일 새벽 일어나 씻는 순간 코로부터 한줄기 물이 쭉- 흘러나와 세면대를 빨갛게 물들였다. 지난 꿈의 기억과 함께 등쪽으로 쏴- 하니 전율이 일었다. 순간 이번 산행을 포기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으나, 대피소 예약을 양보해주신 낮모를 분의 호의를 기억하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산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이 도시에서 혼자 견뎌내기 어려운 날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배낭을 추스리고 청주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함양으로, 함양에서 백무동으로.. 10시 30분.. 너무 이르게 도착해 버렸다. 초가집에 들러 이른 점심상을 받아놓곤 꾸물럭 꾸물럭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1시 반이 되어 신발끈을 조이는 찰라.. 투둑- 세번째 고리가 떨어져 나간다..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등산화 끈 고리가 떨어져 나가다니..


# 2 ; 그래도 갈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래도 포기하기에는 우습다는 생각에, 적당히 끈을 마무리 한 다음 산행을 시작했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차라리 오늘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서 망가져버렸음 싶은 마음이 강했다.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일탈이 어렵다면 차라리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라도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급격하고 결단적인 변화를 갈망하는 시기.. 그래서 난 엉성한 한쪽 발을 이끌고 터벅터벅 산으로 들어갔다.


# 3 ; 평이한 산행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1시반에 출발하여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한 시간 후 하동바위에 도착하고, 30여분을 멍하니 쉬다가 산아가씨가 아닌 산모기 아줌마에게 불순한 피를 나누어 주고..

30분 후에는 참샘, 또 다시 30여분을 쉬며 졸며 생각하며..

참샘에서 소지봉 구간의 급경사는 한 가지 생각마저 말끔히 앗아가고, 충분한 땀을 흘린 후 도착한 소지봉에서는, 거친 호흡과 함께 쏟아져 나간 답답함에 시원하게 웃어도 보고, 창암산쪽을 바라보며 지난 여름도 돌이켜 보고, 쓰레기도  줍고, 쓰레기들 욕도 해주고..

아무런 별다른 일도 없이 그냥 그렇게 걷다 망바위에 앉아 또 다시 한 30여분.. 멍하니.. 한신지계곡쪽으로 보이는 바위굴에 눈도장 한번 찍어두고 출발.. 오후 4시 제석봉 뒤를 지나 장터목으로..


# 4 ; 장터목에서의 여유

장터목은 늘 저녁 늦게 도착하여 새벽같이 떠나던 곳으로, 복잡한 틈바구니와 뽀개질듯한 두통밖에는 없는 그런 곳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의 한산함은 여느 산장의 한가로운 오후와 다를바 없이 평온했다..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 담배 한개비 피워물고 엽서를 쓰는 낭만이라... 하하.. 오랫만이다..

비구름 개인 하늘은 적당히 구름들을 보냈다가 거둬가고.. 어느새 서쪽으로는 주황색 태양과 잔잔한 노을선이.. 동쪽으론 그에 반사된 뭉게구름이 흰색에서 오렌지색으로, 오렌지색에서 분홍색으로, 분홍색에서 어둠으로..

불길한 예감과 고독도 어둠속으로..


# 5 ; 빗소리..

하루가 지났다..
견디기 어려웠던 하루는 그렇게 조용히 잊혀져버리고 새벽.. 장터목엔 비가 내렸다. 모든 우울을 쏟아 내리는 변주곡처럼... 가늘게.. 거칠게.. 따갑게.. 아프게.. 차갑게.. 차갑게..
침낭속 곰이 긴 잠을 잔 후 다시 깨어났을 때 하늘은 개어있었다..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된 듯 했다..


# 6 ; 부덕한 조상을 둔 죄..?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일출을 난 한 번도 못봤다..


# 7 ; 진주시민 여러분!

천왕봉에 들렀다가 장터목으로 돌아와 엽서를 부친 후,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했다. 처음가는 코스라 선택한 길이었는데, 예상외로 길은 편하고 좋았다. 계곡을 낀 하산이라 눈과 귀와 살갖이 모두 시원하고 쾌적하게..

중산리에서 홀로 동동주 한단지를 비우고, 불콰해진 얼굴로 키득거리며 진주로.. 남는 차시간을 때우기 위하여 책 한권 사보려는 마음에 서점을 찾았으나, 진주시내에서 서점 찾기란 개미 떵구녕에 마데카솔 바르기보다 어려웠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노인, 아자씨, 아짐마, 아가쒸, 노청각, 아해, 기타 등등들께 여쭤봐도 서점이 어딨는지는 모른단다.. 순사나리께 물어봐 찾아간 곳은 수험정보서점.. -_-;; 어느덧 진주대교를 건너 딴 동네로 가보니 헌책방 하나 겨우 간판을 달랑거리고 있다..

서점이 옷가게로,
서점이 술집으로,
서점이 게임방으로,
서점이 패스트푸드점으로..

정신은 허영으로,
정신은 토사물로,
정신은 비현실적 도피로,
정신은 허리춤의 두툼한 핸들로..


# 8 ; 다시 일상으로

내게 있어 여행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 원인에는 무엇보다도 일상으로의 회귀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산행은 다소 달랐다. 불길한 예감속에 도피를 위하여 떠났다가 약간의 취기와 책 한권을 안고 평온히 돌아왔다.
비록 아무런 일탈도 일어나 주진 않았지만, 산정에서의 여유와 비는 충분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오늘 하루는 다소 건강하게 흘러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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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도 2003.09.09 09:06
    앞으로도 가벼운 마음을 가져요! 읽는독자를 생각해서라도.....
    즐거운추석 추억이있는 고향앞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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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ga 2003.09.09 09:32
    정진도님 감사합니다.. 좋은 명절 편안한 길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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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eon 2003.09.09 09:34
    너무 잔잔하고 그러나 깊게 다가오는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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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2003.09.09 09:42
    제가 좋아하는 빗소리를 들으셨군요...가늘게.. 거칠게.. 따갑게.. 아프게.. 차갑게..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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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ga 2003.09.09 09:59
    정진원님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정신을 담을 소중한 그릇... 건강 꼭 되찾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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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lu 2003.09.09 10:50
    ^^조마조마하면서 읽었습니다.'평온한 산행' 축하드리며,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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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3.09.09 13:05
    #6번은 wiga님이 기상관계를 고려치않은걸로 사료 됩니다.재미있는 산행기입니다.좋은 추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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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ol1 2003.09.09 21:24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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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조아 2003.09.13 16:00
    기인을 보면 도사 같고, 평범치 않으면 기인같고, 평범하게 살려니 답답허무하고, 잘읽었습니다. 도사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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