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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 - 2월 마지막 날에 *어디로 - 적조암~박쥐굴~지장사터~선열암~유슬이굴~선녀굴~고열암~ 신열암~함양독바위~공개바위~한쟁이골 입구 *누구랑 - 옥종맨, 고향 형님과 선배,친구2명, 슬기난 (6명) *지.산 시산제 산행 가는 길애 하루 먼저 내려가 잠시 산행을 할까하고 옥종맨 형님에게 연락하니 단번에 ok사인이 났지만 토욜 비 소식에 설왕설래 끝에 그냥 강행하기로 하니 지리산 산신령이 어여삐 여기시어 하늘을 열어주신다. 같이 산행한지가 언제였는지 가물가물 할 정도이고 고향친구와 선배, 집안형님, 이렇게 산행팀이 꾸려져 생초ic에서 새벽에 만나기로 약속하여 잠시 눈 부치고 밤 1시 길을 나선다. 밥 먹듯이 밤샘 운전하여 하루종일 누비다가 저녁에 올라오곤 하던 산행패턴이 나태함과 열정이 식은 탓 인지 뜸해지고 그나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모양새라 옛 생각에 잠기어 본다. 생초ic에서 반가운 만남을 가지고 어둑한 엄천교 건너 운서마을로 접어드나 아직 어둠에 사위를 분간하기 어렵고 꼬불꼬불 길을 찾아 적조암 주차장에서 잠시 산행 준비를 한다. 여기저기서 봄꽃 소식을 전해오고 있고 이제 2월도 마지막이기에 봄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으려나 기대해보지만 지리 북사면 음기에다가 잔뜩 찌푸린 날씨가 기대를 접으라 한다. 아직은 어둑한지라 적조암 둘러보기는 내려와서 하기로 하고 운암골 졸졸 흐르는 물소리 벗 삼아 쉬엄쉬엄 오르다 산죽비트에서 계곡을 건너 사면으로 오른다. 숲이 우거졌을 때 보다 희미한 길 찾기가 용이하고 잠시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할 때 쯤 바위지대 위로 박쥐굴이 나타난다. 예전 여름에 왔을때에 천정에 박쥐모습이 보였는데 어둠속에 흔적을 찾기 힘들다, 박쥐굴 잠시 한숨 돌리고 지장사터 찾기에 나서는데 약간 오른쪽(진행방향)으로 작은 상대날등 지능선을 잡아 오르니 고요속에 너른 터만 덩그렇고 누군가 기와조각을 몇 조각 찾아 돌 위에 올려놓았다. 지장사터에서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 중략- -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지장사터에서 바라본 함양 독바위모습 지능선을 이어 상대날등 폐 헬기장으로 오르니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고 고도를 올려 가다가 금낭굴을 찾아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전에 없던 리본이 간간히 보여 따라 가다 보니 금낭굴 아래쪽으로 나온다. 여기저기 산재한 터와 굴이 있어 쉬는 시간이 늘어나고 덕분에 산행이 편안해진다. 금낭굴에서 < 바스락거리는 낙엽 길과는 달리 응달 계곡에 제법 얼음과 눈이 밟히고 선열암 가는 길 험한 바위지대를 넘기가 제법 고난이다. 눈 속에 희미한 발자국들도 숨어버리고 얼마 오래 되지 않았건만 바위지대 중간으로 넘어간 기억에(실제로는 아래쪽으로 우회하여 돌아야 하건만,,) 잡을 곳도 없는 바위 지대를 용을 쓰고 오르니 선열암터 위쪽으로 오른 것이었다. 잘못 인도한 미안함이 가시기도 전에 미끄러운 경사지대 절벽에서 뒤따라오던 한 사람이 미끄러져 간신히 나무를 붙잡고 멈추는 아찔함도 경험한다, 좀 전에 작은 바위 오르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오늘 운수 안 좋은 날이라 조심해야지 하였건만,,, 선열암터 힘들게 올라온 기념으로 한컷!

 

날씨가 점점 흐려지며 가늘게 눈발이 날리고 수평으로 이동하여 능선 사거리에서 계속 서쪽으로 발길을 이어 너덜지대 지나고 유슬이굴로 향한다. 제법 너른 굴속이 아늑하여 잠시 자리 펴고 간식을 들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한동안 시간을 보내고 이제 제법 미끄러운 산길에 아이젠을 꺼내어 신고 선녀굴로 향한다. 유슬이굴 선녀굴 사거리에서 금방 도착할 거리인데 선두가 오르막을 계속 올라 지도 확인하고 다시 내리막 내려서 선녀굴을 찾는다. 바위틈에서 풍부한 석간수가 있어 선녀가 목욕을 했던 전설이 있던 이름도 예쁜 선녀굴은 빨치산 이은조가 사살된 곳으로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고 굴 앞에는 바위가 가로막아 바깥쪽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은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다. 바위 안쪽에는 제법 널따란 공간이 있으며 옆에는 샘물까지 있어 은둔하기에는 정말 좋은 장소였던 것 같다. 선녀굴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는데다 좁은 입구와는 달리 안이 넓은 2중 동굴이어서 굴 내부에서조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아 빨치산의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었다고 한다. 근방에는 이와 비슷한 동굴이 5개나 더 있다. 의론대 솔봉능선이 내려다 보이고 의론대 옆 전망대에서 보이는 함양 독바위 고열암터 <고열암에서 자다[宿古涅庵]> 병든 몸을 지탱하고자 하여 잠시 포단을 빌려 깔고 자는데 소나무 파도가 달빛 아래 들끓으니 구곡에 노니는 듯 착각케 하네 뜬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고 한밤중엔 바위 골짜기 닫혀 있구나 오직 정직한 마음을 가진다면 혹 산신령의 비록(備綠)을 얻을는지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에서- 신열암터 신열암 암자 터는 독바위에서 서쪽으로 2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샘이 있고 축대의 흔적과 구들장돌, 기와조각과 옹기 및 자기파편이 주변에 널려있고 묻혀있다. 수십 길 벼랑 위에 터 잡은 선열암이 고행승의 수도처 같았다면, 이 곳 신열암은 암자 터가 편안하고 아늑해서 학승의 공부도량 같은 곳이라 한다. -------------------------------------------------- “함양독바위는 생긴 모습도 특출하고 대단하거니와 주변의 지형을 보면 풍수쟁이가 아니더라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뒤로는 크게 상내봉능선과 면계능선이 독수리 날개 모양으로 독바위를 감싸고 있고 엄천강이 포근하게 받치고 있어 환상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독수리 머리에서 지맥인 황새날등이 시원스레 뻗어 내리고 있는 정수리에 독바위가 기품을 품어내며 서있다. 어디 그뿐이랴. 펼쳐진 날개 안쪽으로 또 다시 양쪽의 솔봉능선과 상대날등이 황새날등을 이중으로 근접호위하며 품고 있는 형상이다. 여기에다가 하늘이 일부러 천하 명당자리에 내려준 듯 암자터와 동굴을 이룬 바위들이 그렇게 많으니 노장대 마을의 연유가 그러하듯이 예로부터 수행자들과 비결꾼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는 명당이다. “한 부인이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독녀암의 전설은 듣고 흘려버릴 야사가 아닌 실체의 역사로 다가온다.“ .굳이 이 바위의 명칭에 함양이라는 지명을 부치는 이유는 동부능선의 진주독바위와 구별을 위한 것으로 두 독바위가 이름은 같아도 어원은 다르다. 동부능선의 진주(산청)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 독(甕) 바위가 되었고, 이 곳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독녀암을 두고 산 아래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각각이다. 산청 쪽의 화개 사람들은 상투를 닮았다고 상투바우라 하고, 함양의 휴천 사람들은 독아지를 닮았다고 장독바우라 부른다. 또 한 마천 쪽 사람들은 筆鋒이라 부르기도 하기에 마천의 60번 도로 위에서 확인해 보니 붓끝을 닮기도 했으나 가장 두드러진 형상은 유림 쪽에서 본 상투 모양의 독바위 모습이다. .예전에 함양군에서 운암마을에서 노장동을 거쳐 이곳 독녀암 까지를 빨치산 탐방루트로 지정을 해서 함양 독바위를 “노장대” 라고 하였으나 한국전쟁까지 노장동에서 5대를 살았다는 <손종만>씨 외 여러 지역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장대는 토착민들이 부르는 노장동 마을의 별칭이며 함양독바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노장대는 노장동 마을의 옛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일제강점초기에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행정표기상 노장대 마을이 노장동으로 바뀐 듯하다. 독바위는 그 예전부터 독바위라고 불렀다고 문헌에도 나와 있다. 다섯 개의 거대한 바위로 구성된 함양독바위는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여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어 독녀암의 [독]자를 인용하여 독바위라 전해졌다 한다.- --------------인용글------------ [ 바로 앞 상대날등 뒤로 멀리 왕산,필봉산이 보이고,,, 독바위에서 내려다 본 황새날등 와불산 정상방향으로,, < 찬바람 부는 독바위에서 한동안 지형공부도하고 인증샷 놀이 하다가 벗어버린 아이젠을 꺼내기 귀찮아 그냥 진행 하는데 중간중간 빙판인 길에 조심조심 내려서나 낙엽녀석이 응큼하게 위장을 하여 급경사 내리막 3사람이 동시에 엉덩방아를 찧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늦어진 점심에 능선 내리막 조그만 공터에 자리 펴고 간단히 준비한 상을 차리나 부는 바람에 얼른 자리를 뜬다. 옛날 지리산에는 삼베 구만필로 짠 치마를 두른 거대한 마고할미가 살았는데 공기놀이를 좋아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날 마고할미가 떠나면서 가지고 놀던 공깃돌 5개를 포개 놓았는데 그 공깃돌이 바로 공개바위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등산로에서 잠시 아래로 내려가 깊은 산속 사람이 쌓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하기에는 신비스러운 피사의 사탑을 연상케하는 공개바위에 들린다. 거대한 5층 돌탑으로 높이 12.7m, 둘레 12.4m, 추정 무게 약 100t으로 넘어질듯 아슬아슬하게 서있어 아래에서 사진 찍는 일행에게 넘어진다고 빨리 내려오라고 농담을 건넨다 ^^

 

제법 날리는 싸락눈에 옷자락이 젖어들고 운서리 방향 내리막 천상굴은 그냥 길가에서 바라만 보고 길을 줄이나 아래쪽은 내리는 대로 눈이 녹아 질퍽한 길에 미끄러지기 딱 좋은 내리막이다. 능선 끝까지 내려서기 전 한쟁이골 입구 다리방향으로 가까운 지능선 하나 잡아 그냥 내려서니 널따란 밭 조성한 곳으로 내려서고 산행을 마감한다. 길지 않은 거리에 이곳저곳 들리는 곳이 많아 시간은 제법 걸렸지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 시켜주는 산행이라며 다시 다음을 기약하자고 한다. 운서리 마을 입구에서 내일 시산제 때문에 모임이 있는 뱀사골로 향하며 아쉬운 이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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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솔지기 2015.03.04 22:46
    덕분에 ,
    너른 지리의 품, 그 생소한 골골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특히 점필재의 유두류록 원전을 인용한 기록이 감동입니다....
    좋은 님과 멋진 산행....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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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규 2015.03.05 09:27
    슬기난님께서 우리동네 뒷동산을 다녀오셨군요. 오브넷에 공개바위 모습을 맨처음 올렸던 장본인으로 산행기가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그쪽은 세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이제는 완전 구축된 등산로로 자리매김해진 듯 합니다. 노장대와 함양독바위의 정확한 구분을 잘해 주셨군요. 함양군에서 바위를 노장대라 안내해 놓는 바람에 등산객들이 함양독바위를 노장대라 잘못 알려진 문제도 있었습니다. 선녀굴과 마지막 빨치산! 전쟁이 남긴 문제의 요소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봄직한 비화라 하겠지요.

    천상바위의 천상굴은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굴로 유명합니다. 6.25전 호랑이 새끼를 천상굴 앞에서 직접 쓰다듬은분이 휴천면 남호리에 아직도 살고 계시며 1974년 무렵 호랑이 목격(당시 운암마을에 거주, 손종만)담도 있었거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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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난 2015.03.06 12:46
    청솔지기님,
    아흔아홉골 골짝을 다니다 보면 생소한곳도
    많이 부딛치지요. 계절마다 틀리고 생각도 달라지지요.
    언제 지리 자락에서 만나질런지요.

    김용규선생님.
    그날 친구분하고 통화할때 옆에서 듣고 있었지요.
    지극한 고향사랑에 감동입니다.
    언제 진주나들이 가게되면 함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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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봉 2015.03.20 20:49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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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경 2015.03.23 08:55
    신비스런 여러곳을 자세히 보여주시고 설명해주시니
    정말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정겨운 산우분들과 늘 건강하신 산행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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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해 2015.03.25 11:42
    반가운 슬긴난님의 산행기를 참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군요.
    여전한 지리산행 이야기를 따라가니 즐겁습니다.
    점점 따뜻해지네요. 이제 푸른 산 이야기도 고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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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난 2015.03.26 23:03
    늘 반갑게 맞아주시는 기린봉님, 고맙습니다.
    선경님, 지리 속살 산행이라 낯이 설수도 있겠습니다.
    워낙 넓은 지리산이다보니,,,
    하해님, 마음은 늘 오브넷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들리지 못하여 늘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봄도 오고 꽃피는 지리산 이야기로 자주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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