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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6.12.18 15:49

잃어버린 30분 - 1

조회 수 311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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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0분


갑자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건 내가 그 책속의 내용처럼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참 진리를 찾아냈다거나, 아니면 되찾은 시간이 현상세계를 이탈한 초월적 본능을 찾아내어 평범하지 않은 나를 발견하는 그런 류는 전혀 아니다. 엉뚱하게도 내가 이 문장을 생각해낸 것은 젊은 시절 1권짜리 요약분으로(전권은 7부16권 분량으로 생각지도 못했다) 읽었던 흐릿한 기억 속의 제목뿐이다.

그런데도 그날 사고이후 이 제목이 제일 먼저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망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로 역해석 되듯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부단히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되짚음과 다시 그릴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날 그 사고가 있고 나서는...


제석단의 잠자리는 여유로웠다. 오름길로만 끝을 맺은 하루 일정은 초보가 섞인 제석봉골이라 해도 부담이 되지 않았고, 그 넓은 터가 모두 우리 차지일 듯 했는데도 게중 좋은 자리를 고르는 호기를 부리며 떨어지는 태양에 마음을 실어 보내는 낭만까지 누리고 있었다.

구름 뒤에 숨어 산란하던 빛마저도 쓰러지고 뉘엇뉘엇 해거름이 찾아올 즈음에야 배낭을 풀어 저녁을 준비한다.

애초 한가할 것 같던 터는 아름아름 알아왔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한귀퉁이씩을 차지하게 되자 고닥새 만원이 되어버리고 장날 시장터처럼 왁자지껄하다. 일찍 도착해서 먼저 시작했던 술 밥자리가 거의 끝낼 무렵, 어둠속에서 무심이 나를 바라보던 사람이 나를 알아본다. 화들짝 놀라며 미안한 기색인데도 괜찮다는 듯 난 기억도 없는 날의 스친 인연을 예기하며 반가워한다. 그 어느날 나를 만났던 인연과 함께 홈에서 꾸준히 내 글을 보던 분이어서 송구스럽게도 먼저 날 알아보았던 것이다.

끊어질 것 같던 술자리가 다시 이어지고, 그 인연은 다시 소문을 내며 옆자리로 옮겨져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끼리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 그렇게 얼굴을 트기 시작하면서 자리가 넓어져 마치 오랫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산은 참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나눠주곤 한다. 그날 지리산은 참으로 포근하였고, 내 아이 눈망울 같던 또랑또랑한 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아침이었지만 서둘지 않았다. 해가 제석봉을 넘어 우리 자리까지 밀려온 후에야 자리를 털었다. 오늘 일정이래야 청학연못을 거쳐 세석으로 올랐다가 큰새골로 떨어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오랜만에 걷는 주능엔 휴가기간을 이용해 가족과 연중행사를 치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무릎과 손등엔 훈장처럼 외상 하나씩을 달고도 연신 땀을 훔쳐내는 어린 새싹들은 그저 즐거움만 있는 듯 생글거린다. 하긴 그들에게 세상사는 이치는 무엇이며 피 터지는 생존방식의 논리는 무에 필요하겠는가? 훗날 지금 흘리는 땀의 추억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뿐인 것을.

어느덧 촛대봉이었다. 세석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처럼 장검을 치켜든 촛대봉 뒷길을 새어나갔다. 3주전에 봤던 멧돼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면 이곳 생태계 꼭대기에 있는 그들의 횡포가 얼마쯤인지는 능히 알고도 남는다.

청학연못은 아직도 고요하다. 청학이 놀았던지, 청학동을 들어가는 통로였든지, 고은선생이 청학을 타고 들어갔든지, 아님 청학의 기운을 누르고 있는 곳이었든지, 주인을 만나지 못한 연못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비록 서른 평 남짓한 인공물이긴 하지만 짧게는 1백여년 멀게는 5백여년을 회자되던 자리였으니 이젠 자연물이라 해도 충분하건만 현실부정에 대한 인간욕심을 거부하듯 왠지모를 어색함이 베어있다. 그래서인지 잔돌평원 건너 숲속 외진 곳에서 한 자락 와석에 기대어 동그마니 홀로있는 모습은 이상향의 청학이라는 의미보다 드러내어 함께하지 못하는 고독함이 더 짙게 느껴진다.

이른 점심을 들었다. 시간상으로야 세석까지라도 갈 수 있었겠지만 이 더위에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북적이는 것도 싫었고, 특히나 바위틈을 타고 절묘하게 흘러내리는 석간수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 핑계였다. 여유로운 식사시간을 늘려 한 잔 술까지 마신데다가 궁금해 하던 후배들과 바위벼랑 위아래를 넘나들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촛대봉을 다시 오르느니 거림골로 내려서 세석을 오르기로 했다. 짧은 거리였지만 한 여름 폭염에다가 점심 반주까지 합세하여 방해하는 걸음걸이는 사낭이라도 매달은 듯 더디게 떨어진다.

세석은 이 계절에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못되었다. 뙤약볕 아래 샘터는 난민 행열처럼 이어져 있고, 쉴만한 그늘은 비를 피해 들어온 처마 밑처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같이했던 일행들을 모으는 시간마저도 길게 느껴졌다.

영신봉을 올라 이제는 숨어버릴 먼 경치를 아쉬워하며 여기저기 손가락을 펼친다.

오랜만에 걷는 주능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부딪친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칠선봉까지는 지루함이 느껴지고 일행들의 걸음도 무디어져 버렸는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큰세개골 초입에 도착한 것이 오후 4시반. 늦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길이 없으니 해가 떨어지면 고생이야 곱절은 더하겠지만 빠른 걸음이라면 어스름쯤에라도 한신주곡까지는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계속)

  • ?
    슬기난 2006.12.18 18:46
    한여름에도 으스스하던 제석봉골의 냉기가 새삼
    생각나고 제석단에서 바라보는 석양과 함께 지리가
    맺어준 인연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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