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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에게

오랫동안 지리산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습관이란 참으로 묘합니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았는데도 만나지 못

하고 지난 날들이 하루이틀 쌓이면 아무런 일도 없는 것 처럼 무덤덤하게 되지요.

작년 11월 형에게 지리산소식을 알리고 나서 이렇게 반년 이상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 버렸습니다.  오늘 여수초오유봉원정대 훈련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최근 히말라야 초오유봉(해발8,201m)원정대의 단장직을 맞게 되었습니다.

소시적에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오르겠다며 호기를 부

렸는데, 지금은 터무니없는 꿈처럼 되어 버리고 히말라야도 알프스도 다 잊고 살았

습니다. 지역원정대로서 히말라야를 꿈꾸는 일이 쉽지 않는 일인데, 여수의 젊은이

들이 그러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기꺼이 총

대를 메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들의 성공을 위해서 제 일처럼 관심을 가질 겁니다.

아니, 내 자신의 일이기도 하지요.

그들의 지구력훈련을 함께 하기로 하여 지리산 무박종주를 계획하였고,  오늘(6월

20일) 그 계획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02시 10분 성삼재는 소슬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까지 거센 비바람과 함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는데, 이제 하늘은 맑고 온

통 별나라가 되었습니다. 중천에 걸린 반달은 창백한 빛을 띠고 교교하게 흐르고 있

습니다. 반달모습을 참 오랫만에 봅니다. 보름달이나 초승달과 달리, 반달에 대해

선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시작과 완성만을 중요시하고, 그 과정에 대해

선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세태 때문입니다. 반달은 슬쓸하고 빛깔마저 창백한 모습

을 하게 됩니다. 한동안 우둑커니 제자리에 서서 반달을 바라봅니다. 야박한 세태

에 대한 나만의 항의방식입니다. 이러한 감정이 이입되었는지 반달은 계속해서 따

라옵니다. 숲속에 들어서자 소슬바람에 나뭇잎이 무더기로 떨어지는 소리, 산짐승

의 가녀린 울음소리, 각양의 새소리, 물흐르는 소리, 산자체가 울리는 소리까지 모

두 합쳐 기묘한 화음이 되고 있습니다. 차라리 불협화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속에는 알듯말듯한 질서가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 말입니다.

노고단에서 바라본 지리연봉의 흑빛 실루엣은 참으로 장관입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저 멀리 장터목의 불빛이 바람을 타고 전해 옵니다. 임걸령에 도착해서야

서서히 어둠이 걷혀 갑니다. 한 때 산적들이 기거했다던 이곳, 임걸령엔 잿빛의 달

빛만이 유일한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지리산을 지배했던 수많은 인걸들은 이제 다

떠나고 없습니다. 당대의 시인 두보의 국파시(國破詩)를 떠올립니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있어,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진다.(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그렇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그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유장한

산하는 영원합니다.

지리산은 시대에 항거하면서 살았던 이단자들의 최후의 도피처였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상고해 보건데, 지리산에 살다 떠나면서 제발로 온전하게 걸어간 사

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진 다 그대로 지리산의 흙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

리산은 세상이 버린 사람도 다 안았습니다. 어머니처럼. 동란시절 지리산을 무대로

모진 목숨을 이어오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들은 지리산에서 죽

어서야 영원한 안식을 찾았습니다. 중국 명나라의 이탁오(李卓悟)란 철학자가 있습

니다. 그는 유학자로서 높은 벼슬을 했는데, 어느날 당시 세상의 모순에 눈을 뜹니

다. 그리고 그는 표표히 모든 것을 버리고 태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됩니다. 그러면

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가차없는 질타를 가합니다. 당시의 위정자들에게 이탁오는

눈의 가시였습니다. 결국 이탁오는 자신이 기거하던 산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산하

의 흙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시대의 이단자들의 끝은 죽음이었지만 그들은 흙이 되

어 영생을 찾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노루목에 서서히 여명이 다가옵니다. 이제 지리산의 새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삼

도봉에서 하루가 다시 시작되어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일출을 보지 못한 게 다

소 아쉽기는 합니다만, 삼도봉에서 맞이한 새날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보람입

니다. 인위적이긴 하지만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한 곳이니까요. 피아(被我)로 갈려 상

대방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을 젊음들이었지만 분명 이제는 서로를 용서하고 하

나가 되었기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깔닥고개 500계단을 내려오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무판의 편안함을 만

끽하면서 "문명의 안락"을 체험하고, 지루함을 이기면서 우리는 "인내는 희망의 기

술"임을 확신합니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종주산행에서 처음 맞

는 간난의 길입니다. 고통을 감내하면서 만나는 성과물은 더욱 큰 법이죠. 토끼봉에

서 맑은 햇살과 함께 맞이한 시원한 아침이 그러한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토끼봉에

서 오늘들어 처음 햇볕을 보았습니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곧장 벽소령대피소까지 산행을 계속하였습니

다. 벽소령은 많은 의미를 간직한 곳이죠. 잠시 길을 멈추고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대피소 한켠에 "공비토벌루트안내도"가 서있습니다. 분명 이곳은 사

연이 많은 곳입니다. 호랑이토벌대장이라던 김종원이 호령을 하던 곳이었고, 이현

상과 박영발 등 일세를 떠들석하게 했던 빨치산들이 생을 마감한 곳이죠. 그렇지만

지금의 벽소령은 이름처럼 푸른 빛입니다. 지금은 그들의 신념도 투혼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대로 평화로운 쉼터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무대로 했던 모든이들도

저 세상에서는 평화를 가졌으면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접고, 한 민족이었다

는 사실만을 상기하면서 서로 화해와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제는 모두 지리산의 흙이 버어버린 그들이기 때문에 그러리란 생각도 해봅니다.

벽소령을 조금 지나 남원 삼정리와 갈리는 길목에 형이 일러준 꽃대봉이 있습니다.

과거 빨치산들이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예쁜 이름을

붙혔다지요. 목숨이 경각에 놓인 치열한 상황속에서는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표현

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적어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처절

한 증오가 베어 있지 않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민족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리산에서는 우리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은 "우

리"를 모두 안을 수 있기에 분명 큰 산입니다. 우리에겐 히말라야보다도 로키산맥보

다도 커다란 산입니다. 인간에게 거인이 있다면 산에도 거산이 있습니다. 거산을 지

금도 살아있는 이상한 아저씨 한 분이 아호로 써버렸지만요. 지리산이 바로 거산입

니다.

꽃대봉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잠깐. 선비샘에 이르기까지 다시 완사면의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리산은 또 하나의 교훈을 던집니

다. "무소유의 미덕"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고통속에서는 수중에 가진 모든 걸 다 던

져 버릴 수 있다면 버리겠습니다. 소유물 모두가 참으로 부질없습니다. 지금의 여정

속에서 나에게 억만금이 있다해도 무얼 합니까. 하나라도 더 버릴 수 있다면 다 버

리겠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즐거

움으로 알 수 있다면, 그런 미덕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리산자락

에서 살아가는 형처럼 말입니다.

선비샘에서 선비가 되기를 소망했다던 옛적의 이름모를 민초들에게 식수를 뜨기위

해 자연스런 동작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지리산은 곳곳이 모두 애환과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덕평봉을 돌아서 칠선봉에 올라서자 앙증맞은 일곱선녀의 영접을 받습니다. 영신봉

으로 오르는 길목은 나무계단으로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볼 때마

다 모습이 달라집니다. 전에 놓여있던 투박한 모양의 쇠줄, 밧줄, 쇠말뚝 따위가 도

리어 그리워집니다. 호사에 겨운 것일까요. 번듯한 모습이 어색해지는 것은 크게 출

세하여 말을 건네기도 어색해진 옛친구를 만나는 기분입니다. 자꾸 이렇게 길을 편

하게 만들다보니 지리산종주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석대피소에서 점심을 마치고 다시 산행을 계속합니다.

이만큼 와서는 프로와 일반 산행꾼과 차이가 확연해집니다. 프로들은 아무런 기색

이 없습니다. 나는 많이 지쳐 있는데두요. 머리속은 텅비고, 사고는 진공상태가 되

어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앞으로만 가다가 연하봉의 선경을 지나칠뻔 했습니다.

구름이 찬찬히 흘러가는 속에서 기화요초와 기암괴석이 조화롭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장터목은 이름답지 않게 조용합니다. 여기도 올때마다 공사를 합

니다. 시설물들도 늘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는 화장실 위치가 달라져 있더니,

또 무슨 공사를 벌리는지 망치소리가 요란합니다. 갈수록 지리산이 지리산답지 않

게 되는 것이지요. 앞으로는 형처럼 관리공단표지가 없는 곳으로만 골라 다녀야 할

까 봅니다.

천왕봉을 지척에 두고 중천에 떠있는 태양이 더욱 뜨겁습니다. 성취감을 더욱 높히

기 위한 조화라고 생각할 여유마저 잃고 맙니다.

그래도 끝은 있습니다. 16시 30분 드디어 그리던 천왕봉을 만났습니다.

오늘은 천하가 발아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왕봉에서는 오를 때마다 감회가 새

롭습니다. 말할 수 없는 성취감에 사로잡힙니다. 뿌뜻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 천왕봉에 와서야 무소유(無所有)가 곧 만소유(滿所有)가 될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전에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한 노숙자의 행복해 하던 표정을

이해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곧 무욕(無慾)이 정답이었습니다. 다 버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지위도 명예도 부귀에 대해서도 한조각

의 구름을 보는 것처럼 초연할 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을 이제 알았습니다. 바람도 구름도 작열하는 태양의 에너지도 다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궁극으로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 욕망도 부질없고 신념도 몸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초연하게 물흐르듯이 살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

겠습니다.



내려 오면서 보니까 벌써 석양이 곱게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19시 10분 중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지리산에서의 사색을 모두 접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편안한 마음만으로 지리산을 찾을 겁니다.

다 버리기 위해서 지리산에 오를 겁니다.

그러면서도 분명 세상을 모두 가지게 될 겁니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만 지리산에서 보낸 17시간은 분명 행복했습니다. (끝)

안녕히 계십시요.

  • ?
    네오문 2003.07.05 04:14
    아름다운 종주기에 그저 행복할 뿐입니다. 그저 고마움만 느껴집니다. 지난밤의 이른 취침덕에 맨먼저 글을 달수 있는 영광도 누립니다.
  • ?
    산유화 2003.07.05 08:24
    참 아름다운 산행기네요. 편안한 사색의 시간이 옮겨 오는듯 합니다.
    지리산에서 보낸 17시간 정말 행복하셨겠습니다.
  • ?
    오 해 봉 2003.07.06 12:34
    이개호 선생님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를 관심을 두고 잘읽고있습니다. 나이도 저랑 엇비슷하신 것 같은데 여수 젊은산악인들과 8000 m가 넘는 히말라야 초오유봉 까지 원정등반 하신다니 참 부럽고 대단하십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제떠나시는지 떠나시기 전에 좋은글과 이메일을 남겨 주시기바라며 아무 탈없이 성공 하시고 무사히 귀국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녀오신후 좋은 산행기도 기다리 겠습니다. 지리산 무박종주 수고 하셨습니다.
  • ?
    주영찬 2003.07.11 21:55
    먼저 히말라야 초오유봉 원정대
    단장직을 맞게 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한편의 대 서사시 같은 산행기를 보니
    지리산을 달려가고픈 마음 가득할 뿐입니다.

    무박으로 당일 종주를 성공적으로 마치신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에 대하여 진심으로 찬사를 드리면서

    여수시 원정대가 반드시 성공적으로
    초오유봉 등정에 성공하시기를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 ?
    이개호 2003.07.11 23:27
    영찬형~ 오랫만입니다. 그동안 건강하시죠? 조만간 지리산산행 함께 할 수 있기 바랍니다.
  • ?
    정동훈 2003.07.19 11:13
    광주우암에 정동훈입니다. 저도 지리산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합니다.저번초오유원정대 발대식에는 참여 못했지만 그누구보다더 무사히 원정에 성공하고 돌아 오시길 기원합니다. 여수향암산악회 화이팅!
  • ?
    아영호 2003.07.23 08:47
    무소유가 만소유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희말리야 초오유봉 등정의 성공을 기원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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