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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형에게...


10월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 J형과 함께 벽소령을 다녀 오고 난 이후 당분간은 지리산 랠리

를 계속할까 합니다. 사정이 허락하는한 지리산으로 갈 겁니다. 그래서

형에게도 함께 산행을 하자고 한 것입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고 탓하

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여름, 분명 기나긴 여름을 보냈습니다. 나이에 비해 내가 너무 많

은 세상경험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세상은 살

아 오면서 생각해 왔던 것보다 분명 더 야박한 것이었습니다. 아름답게

만 볼려고 했는데... 그건 로맨틱한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

의 일을 관조하면서 볼 수 있는 인내도 갖추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건

분명 지리산이 있기 때문이죠. 지리산을 통해서 참을 수 있었고, 지리산

을 생각하면서 그 용서와 화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지리산은

내 인생의 절반입니다. 오늘(10월 13일)도 동행해준 형이 고마웠습니다.


거림골의 아침을 맞이 했습니다.

청아한 물소리, 유쾌한 새소리, 잔잔한 바람소리... 모든 아름다운 소리

들이 함께하는 아침입니다. 거림골을 따라 오르는 길은 알려진 것보다 훨

씬 더 아름다운 길입니다. 평평하고, 흙길이고, 깊숙한 숲이 이어지고,

조용히 흐르는 계곡을 끼고 돌고, 이 모두가 아름다운 길을 이루는 것들

입니다. 또 이른 가을아침의 싱그러움이 더욱 그렇게 하는가 봅니다.

위로 올라 갈수록 단풍은 살며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볼에 홍조를 띤

것마냥 진하지 않고, 그렇다고 희미하지도 않는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단풍은 불그레한 모습이 진해 질수록 아름답지요. 그러나 그모습

은 사실은 죽어가는 모습입니다. 가장 진한 상태는 잎의 마지막 순간이지

요.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건 현실적 모순일 수도 있습

니다. 모든 생물은 죽기 직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죽어가는 과

정은 곧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도 어렵기만한 진리입니다. 소시

적 윤동주의 시, 서시(序詩)의 마지막 귀절을 이해하지 못해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하는 귀절 말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죽어가는 것은 곧 살아 있는것"이란 생각이 떠올라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때의 기쁨을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살며시

물들어 가는 단풍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산길은 "최불암의 가르마"같습니다.

탈렌트 최불암의 머리가르마는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난잡한 건

또 결코 아니구요. 다소 흐트러진 모습... 이렇게 표현하면 맞는지 모르

겠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로운 모습이거든요. 그 모습이 그

토록 어울릴 수가 없답니다. 거림리의 산길이 꼭 그렇습니다. 다소 흐트

러진, 하지만 참으로 조화로은 모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길에 어울리는 다리가 나타납니다. 이름이 특별했습니다. "천팔

교"와 "북해도교"입니다. 천팔교는 아마 이 곳 해발고도가 1008m이기 때

문인가 본데, 북해도교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다리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두 개의 다리를 막 지나고 나면 신천지(新天地)가 나타납니다. 노오란

단풍숲, 맑고 깊은 계곡, 여인의 개미허리처럼 가녀리고 기다란 폭포가

한 폭의 그림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자연은 이런 모습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인간보다 위대하다고들 하는가 봅니다.


지금까지 아름다움만 만끽했다면 이제 부터는 그 만큼의 지루함이나 고통

을 수반할지 모릅니다. 지리산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한가지만 주는 법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힘든 여정이 계속되었다면 금새 그 만큼의 편안함

을 선사합니다. 어느 정도 행복했다면 잠시 후 틀림없이 상당한 인내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

래서 지리산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고, 지리산산행은 인생에서 느낄 수 있

는 굴곡의 축소판이 됩니다. 당연히 오르막길이 당분간 계속되겠지요. 돌

오르막, 나무계단이 쉴사이없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지리산에서는 평안

은 곧 고난과 동의가 됩니다. 고통도 아름다움이 되는 산이 지리산입니

다. 그러하니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 "남

음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맞습니다. "적정성(optimum)의 미학"이란

말이 꼭 맞습니다. 또 지리산은 도처가 명당이고 혈처인 것 같습니다. 바

람을 가두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모진 칼바람

이 없고, 메마른 대지도 없습니다. 어디서든 포근하고 샘이 그득합니다.

장풍득수(藏風得水)가 무엇입니까. 풍수의 원리이죠. 지리산에서는 어느

곳이든 이러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곧 명당인거지요. 그래서 지리산을

무대로 죽어간 젊음들은 지리산을 안식처로 삼고나서 명복을누리고 있답

니다. 그들은 죽어 더욱 큰 행복을 찾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그들

이 적과 아군을 떠나 서로를 증오하지 않고 서로 하나가 되어 안식할 것

이라고 믿는 것도 사실은 이런 이유를 알기 때문이죠.

지리산은 산 자보다 죽은 자, 가진 자보다 못가진 자, 행복한 자보다 불

행에 빠진 자를 좀 더 사랑하는 산입니다. 죽은 자, 못가진 자, 불행에

빠진 자는 지리산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즐겁고 마냥 행복한 시

절에는 지리산은 그냥 좋은 산입니다. 하지만 슬프고 불행한 시점이라고

느끼고 있을 때 지리산은 분명 큰 위안입니다. 지리산이 이제는 모든 이

들에게 그냥 좋은 산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석고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만춘의 철쭉은 없습니다. 철쭉은 다만 낙엽일 뿐입니다. 도리어 황량하기

만 합니다. 말라가는 철쭉나무의 잎새를 통해 분홍의 빛깔을 내기 위한

안간힘을 봅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세석고원이 이제는 조금씩 생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빼곡히 들어찬 나무 등속을 보면서 느낀 점입니다.

사람의 발길을 막으면 이렇듯 금새 자연은 생명을 찾습니다. 지리산의 천

적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지리산은 결코 인간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사

람을 위해 쉼터와 삶터를 제공하였습니다. 지리산은 사람의 산이 되었습

니다. 이렇게 천적마저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지리산을 우리는 "큰

산"이라고 합니다.

한신계곡으로 하산 할 겁니다.

아름다운 길답게 나무, 돌, 잎, 단풍, 계곡 모두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한신폭포에 잠시 들렀다가 가내소를 지나 내려 오면서 맑은 소에 비친 나

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무표정만을 느꼈습니다. 이제 막 자신

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 이러한 무표정은 무얼 상징할까

요. 세상을 너무 거칠게 투쟁적으로만 살아 온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관조하면서 여유로움을 가질 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요.

고개를 들고 다시 바라 본 지리산의 모습은 인자와 무욕, 사랑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나도 지리산의 얼굴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얼마나 지리산

을 올라야 지리산을 닮을 수 있을까요. 꼭 그렇게 되어야 겠지요.

이제 막 백무동에 도착하였습니다.

또 다른 지리산에서의 만남을 기약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 ?
    samchi92 2002.10.14 08:50
    지난해 이맘 때쯤 화엄사 계곡을 오른 후 아직까지 지리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있는 저로서는 님의 용기와 실천에 찬사를 보내며 부러움을 느낄 뿐입니다. 아름다은 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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