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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형!

지리산 가까이에서 살면서도 지리산이 그립단 말을 하였죠. 조금씩

형이 했던 그말을 이해하는 중이랍니다.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분명

다릅니다.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산들을 "지리산과 지리산이 아닌

산"으로 나눈다는 얘기를 하였을 때, 나는 형의 그러한 지리산

편식증을 탓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내가 지리산 안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키워가고 있는 상태랍니다. 분명 지리산의 마성(魔性)입니다.

누구나 지리산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는 그 순간부터 지리산의

포로입니다. 김치맛에 길들이게 되면 매울수록 깊은 맛을 느끼는

법입니다. 외국에 나가서도 한국인들은 김치맛을 잊지 못합니다.

지리산이 꼭 그렇습니다. 지리산에 빠져들수록 걷잡을수 없어집니다.

지리산에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야 다양하지만, 형이 더 잘아는

사실이라 그만 두겠습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계절, 지리산 산행이 일년 중 가장

힘듭니다. 절기는 봄이지만, 아직도 지리능선에서는 잔설의 기세가

한겨울을 방불케 합니다. 군데군데 빙판이 되어 있는 골짜기

산행로에서는 안전사고가 가장 많이 생기는 때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3월부터는 모든 입산로를통제합니다. 다급한 마음에 평일이지만 하루

짬을 내었습니다. 산행이 힘들 거라는 예감을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런 예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리산에 대해 나의 심중에 담긴

차가운 보름달 같은 간절함이 산행의 고통 쯤은 상쇄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산행의 기점은 백무동으로 하였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승용차로 출발하여 찾아가기 가장 쉬울 것같았기

때문이죠. 오늘은 이처럼 맘편한 산행을 하고 싶습니다. 큰 의미를

깨닫는 차원높은 산행보다는 지리산을 다시 만난다는 편안함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느긋한 기분에 점심 때가 가까워진 시간이

되서야 백무동을 출발합니다.

가뭄이 심각하다던데, 정말인가 봅니다. 늘 우렁차게 흐르는 백무동

계곡물의 위세가 몰라보게 꺾여 있습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득

끼어 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산행객도 거의 보이지 않아 고즈넉하고 조금 쓸쓸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고로쇠물을 채취하기 위해 설치한 호스가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흑인 매혈자의 피를 뽑기 위해 호스가

어지롭게 널려 있던 장면을 보고서 전율하였는데... 고로쇠물은 곧

나무의 피가 아닌가요. 나무가 말을 할수 있다면 저희들끼리 이렇게

말하고 있는줄도 모릅니다. "넌 오늘 피 얼마나 뽑혔어? 난

한말이나 뽑혔더니... 너무 힘이 없어." 영화에서의 매혈자는

돈이라도 벌지만, 고로쇠나무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피같은 수액을 뽑아내도 나무가 죽지않는다는 것을 알아낸 인간의

지혜보다 인간들의 학대를 견디며 끝까지 살아남을 나무의 생명력이

더 위대합니다. 이유는 나무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시원한 물로 씻기울수 있다고 믿어 수액을

나눠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무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동바위를 지나면서 예상했던 대로 빙판길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서늘한 날씨이지만 바람이 없어서 포근합니다. 얼음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청량감을 높히고, 나무가지의 맹아는 요몇일 사이에

유난히 더욱 푸른빛을 띄고 있습니다. 지리산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돌길위로 눈이 쌓여있어, 흑백간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든 자연은 조화로움입니다. 타자(他者)와의 어울림,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 있어서도 자연의 의지는 분명합니다.

잘 아는 것처럼 참샘을 지나 소지봉을 오를 때가 오늘의 산행 중에는

가장 지루하고, 힘든 상태가 됩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고통의 의미와

인내의 참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런 뜻에서 김지하시인 얘기를 조금

할까 합니다. 시인은 지리산종주를 해보지 않고는 인생의 고통을

이야기할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고통의 미학을 아는 인간과 평범한

인간으로 세상사람을 2분화했습니다. 천왕봉에는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된다"는 돌비가 세워져 있죠. 나는 한국인으로서

천왕봉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는 깊은 이야기를 나눌수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천왕봉과의 만남은 그곳에 올라 증명사진을

찍는 것을 말하지만 못올라가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느낄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맹자가 말하는 심물망(心勿忘)의 상태 말입니다.

물론 나만의 독선일수 있죠. 그렇지만 나는 천왕봉과의 만남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확인하는 절차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담긴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입니다. 곧 욕망입니다. 권력을 탐하는것도,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모두가 돈 때문입니다. 형도 생각해 보십시요. 그들은

궁극에는 돈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나는 "인간"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나도 돈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나도 돈을 벌고

싶고, 권력을 얻고 싶습니다. 명예도 갖고 싶습니다. 하지만

천왕봉과의 만남을 계속하면서 나는 그러한 목표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나의 가치를 인간들 틈새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하루를 살다 죽는다해도 정도(正道)를 가고

싶습니다. 천왕봉에 오르는 일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합니다. 허영호가

오르는 천왕봉과 내가 오르는 천왕봉이 다를수는 없습니다.

허영호에게도 천왕봉을 오르는 일은 고통입니다. 나는 천왕봉과의

만남에서 정도로 걸어야먄 올를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힘든 여정을 소화해낼 때 우리는 정상에 오를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게 내가 말한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돈을 탐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과 나와는 분명 "노는

물"이 다릅니다.


이제 장터목입니다. 당연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장터목은 늘 사람들로 붐벼야 어울립니다. 하지만 학창시절 시멘트

집이었던 장터목대피소가 그립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장터목에

대피소는 사라지고, 산장이 들어 섯습니다. 시멘트 바닥위에 거적

메트리스를 깔고 새우잠을 잤던 시절은 사라졌습니다. 산장에 들어설

때마다 그 시절을 추억합니다. 형과도 몇차례 동숙했던 기억이 남니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성공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잘 것없는 내 처지를

보고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지금 나의 기분이 그렇습니다.

제석목의 고사목은 이제 두번 죽고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한번의 욕망은 자연의 생명을 죽였고, 또 한 번의 욕망은

자연의 모습마져 앗아 갔습니다. 지금 저 어린 구상나무 묘목들이

의젓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그때가 오면 돈의

가치를 탐하는 인간들의 부질없는 욕망이 용서될수 있을까요. 그러한

아픔을 통해 내가 찾고자하는 가치의 정당성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통천문을 지나면서 우리는 인내의 한계를 시험받고, 고통의 극한을

경험합니다. 고통과 보람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때

나에게도 소승적 이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내가 이 고통을 감내해내는

조건으로 우리집 아이녀석이 공부를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인간이기에 너무도 사람다운 생각을 한 겁니다.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했습니다.

33번째의 만남입니다. 사방에 뻣친 뿌연 안개 속에서 천왕봉은 그

유장함을 더합니다.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뫼(萬古天王峰

天鳴有不鳴)" 천왕봉은 제자리에 여전히 우뚝 서있습니다.

천왕봉에서의 환희를 단순하게 지금까지 고통에 대한 반대급부적

보상이라고 쉽게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왕봉의 의미를

그렇게 가볍게 볼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리연봉은

천왕봉을 가운데 두고 이제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손도손 질서를 이루고, 어느 봉우리에 대해서도 서로 앞길을 막지

않는 배려와 사랑이 있습니다. 아기자기한 균형미 속에서 민주적

조화와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왕봉과 함께

지금까지 힘들었던 여정을 통해 인내와 고통의 아름다움을 함께

깨닫을수 있고, 인간한계에 대한 도전정신을 배울수 있습니다.

천왕봉 가까이에 있는 중봉(1874m)은 "2등은 없다"는 세상의 세태를

다시 확인할수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땃던 선수의 푸념을

생각나게 합니다. 2등이면 대단한 결과인데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1등만이 전부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중봉이 남한땅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중봉에서 바라본 지리능선이 가장 의젓하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저 멀리 바래봉은 천왕봉에서 보다도 중봉에서 바라봐야

가장 잘 보입니다. 천왕봉이 1등이 될수 있는 것은 중봉이 있기

때문인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2등에게

2등다운 대접만 하여도 이 세상이 이토록 강팍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보다 못한 자에 대한 배려가 있기 때문이죠. 중봉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쓸쓸한 모습으로 무언의 대항을 하고 있는듯 특징없는

모습으로 서있습니다. 2등도 당당하게 나설수 있는 세상이

그립습니다.


치밭목을 거쳐 하산하였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대피소에 잠깐 들려서 산장지기 민선생을 만났습니다.

형의 안부를 전했습니다. 그와는 1년 반만의 만남이었는데 그의

얼굴에서도 세월의 잔영을 그대로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리산은 분명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들만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은 갈수록 지리산다워지는데 찾는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웅다웅 살아야하는 현실 탓이겠지만 잠시나마 그러한

일상의 늪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습니다. 위안을 줄수

있는 지리산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데 너무도 행복해 합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정말 좋습니다. 그 이유는 지리산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저는 세속의 온갖 것들을 던져

버리고 지리산으로 떠난 형의 본심을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이

추구하는 지리산의 가치를 조금은 이해할수 있습니다. 벌써 땅거미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저녁 7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 윗새재마을의

조개골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천왕봉을 오른 횟수는 대충

기억하겠는데, 지리산을 만난 횟수는 지금 기억할 길이 없습니다.

천왕봉 또한 지리산의 한 가족에 불과할텐데 말입니다.

지리산에서의 짧은 소회는 이만 멈출까 합니다. 다음 산행은 형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 ?
    솔메거사 2002.03.06 11:33
    지리사랑을 인간사의 德目과 연결지어 유려한 문체로 표현하시는 님의 글을 반갑고 소중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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