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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249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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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11월의 산행은 늘 조급함과 비장함을 안

고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리산에서 느끼는 만추의 감정은 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늦가을의 지리산

을 생각하면 나는 늘 아들을 걱정하는 늙은 어머니의 간절함을 떠올립니다. 웬

지모를 허전함과 쓸쓸함이 것잡을수 없을 만큼 물씬물씬 묻어 나오는 그런 감

정말입니다. 그러한 깊디깊은 감정의 침잠을 느끼기에 나는 이 계절에 빠지지

않고 지리산을 만나러 가게 되지요.


요몇일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조용히 내렸습니다. 가을을 떠나보내는 비였지

요. 사무실에서 진한 가을비를 바라다보면서 비에 젖은 지리산을 상상했답니

다. 이제 이 가을도 10월의 마지막 날을 뒤로하고 우리 곁을 떠나는구나... 이

렇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까닭모를 한숨을 짓게 됩니다.

만추의 차디찬 하늘, 가을비 지난 후의 스산한 바람, 가녀린 산길 웅덩이진 곳

곳에 단풍잎이 낙엽으로 바뀌어 들어찬 모습을 생각하면서... 11월의 지리산을

찾아 갑니다. 당연히 추억이 깃든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화엄사길... 학창시절 언제나 나를 시험에 들게 했었죠. 코끝을 할퀴듯 코재를

넘었고 무냉기재를 바라보면서 가쁜 숨을 몰았었습니다. 그러다... 노고단대피

소에 도착할 때 쯤에는 종주를 하겠다던 양양했던 의기는 사라지고 하룻밤을

멍하게 보내고나서 다시는 찾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 하산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나는 지리산 어느 길을 미친듯이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었

습니다. 가장 싫어했으면서도 가장 많이 올랐던 길... 화엄사길이었답니다. 11

월의 첫 주말(11월 3일) 오후, 이 길을 찾게 된 것도 그렇고보면 필연일 수 밖

에 없지요.


그 옛날 화엄사길을 찾던 시절의 꿈은 당연히 알피스트였지요. 세월은 나의 그

꿈을 앗아가 버리고 이제 내 귓가에도 조금씩 서릿발이 서고 있습니다. 지리산

능선길을 타잔처럼 달리던 그 패기, 지리산을 무대로 세상을 구하고자 했던 젊

음들의 신념을 배우고 싶었던 열정은 이제 나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루하

루를 살아가면서 조금 더 편하게, 조금 더 무사하게 보내기를 바랄 만큼 무덤덤

하게 변해버린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한 평범해진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

나고 싶었습니다. 추억의 화엄사길에서, 새파란 날의 꿈길에서 말입니다.


연기암까지 신작로가 주욱 나 있더군요. 몇 해전 공사를 할 때 와보았는데...

이렇게까지 큰 길이 나있을 줄은 상상을 못했습니다. 자동차가 한 대 쑹 지나

가는데 신작로 위로 떨어진 낙엽이 차 꽁무니를 따라 휘날립니다. 지리산중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깁니다.

연기암을 지나서도 예의 밤자갈길이 아니었습니다. 바닥에 로마시대의 전차도

로 처럼 돌판을 깔아 놓았더군요. 대리석 만큼이나 반질거렸습니다. 좁고 가파

른 오솔길은 온데간데 없고 널직한 로마시대 전차도로 같은 보도가 계속 이어

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걷기가 편했고요. 그렇기에 나의 힘들었던 옛 기억들

을 되살릴 수는 없었지요. 이 길을 거쳐 종주를 마치고나면 산악반 악우들에게

큰 소리를 치며 뻐길수 있었는데... 그런 길은 이제 아니었습니다.


허전함이 밀려옵니다. 금새 닿은 집선대에서 오늘 걸어온 길을 내려다 보았습

니다. 깔아놓은 돌길 위로 수북히 쌓인 낙엽이 왜 그렇게 초라하게 보이는 것일

까요. 사라진 기억들을 안타까와하는 듯 집선대의 작은 폭포들은 많이 말라 있

습니다.

집선대에서 코재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살아 있었습니다. 아무리 길을 넓

게 만들어도 오르막을 없앨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렇지만 오름새가 코끝을 할

퀼 만큼 독하지는 않습니다. 오르기 편해졌는데도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군요. 평생을 그리워 했던 첫사랑을 찾고보니 죽었더라... 그런 싯귀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기분을 지금 내가 느끼고 있습니다. 허망함 말입니다.

눈썹바위 위에서 내려다 보니 우수수 낙엽이 지는 모습이 눈 앞에 보입니다. 지

리산의 겉모습을 아무리 바꾸어 놓아도 그 속내까지 바꿀 수는 없는가 봅니다.

단풍잎은 화사했던 모습을 뒤로하고 더욱 빨리 떨어지고 있습니다.

키가 더욱 큰 나무들은 벌써 앙상한 가지만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죠. 세상

사가 그렇잖아요. 아름답고 잘난 양하는 모든 것들도 사라지는 것은 순간이거

든요. 그러한 모습을 지금 나는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포장도로를 따라서 노고단을 향해 걸어가다 그만 두고 그냥 성삼재로 내려왔습

니다. 더 이상 걷는 일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이, 아니 그 힘으로 이룩한 문명이 인간의 추억을 앗아가 버린다는 사

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쓸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씁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

다. 지리산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고 산행길 내내 생각해 왔기

때문이죠. 그런 쓸쓸함, 허전함... 지리산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흔한 감정이

기 때문이죠. 그런 상념에 사로 잡히면서 성삼재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지리산을 넘어 서산에 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끝)                  
    
  • ?
    오명숙 2001.11.08 23:28
    이국장님...지리산을 찾는다는 사실에서 행복을 느끼는 모습이 아련히 그려지고 있습니다.
  • ?
    최성문 2001.11.09 09:38
    문명이 인간의 추억을 앗아가 버린다는 말..그렇습니다.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 삶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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