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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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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주에 질문 글을 올렸던 초보자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남편이 데려가기 무서워했던 (?) 초보자랍니다.
저도 드디어 종주 후기를 쓰게 되었어요!!!

*****************************************************
결혼 3년째에 접어들었고 올 9월에 만으로 딱 서른이 되었지요.
많은 고민 끝에 그냥 질렀답니다.
기차표를 예매하는 저를 보며 남편은 계속 불안해했습니다.
짐을 꾸리고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저희 둘 다 이번 산행을 하루 아니 몇시간 만에 끝내지는 않을까 염려했답니다.

용산에 밤 10:50 기차를 타고 구례구에 새벽 3시 23분에 도착했습니다.
남편과 택시를 타고 화엄사 입구로 가기로 했는데 택시 기사님은 저희를 매표소에서 내려주셨나봅니다. 화엄사 입구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캄캄한 길 옆으로 계곡 물 흐르는 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화엄사를 둘러보다보니 어느덧 새벽 네시가 지나고 새벽 예불을 마치신 스님들이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헤드랜턴을 켜고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어둡고 조용한 산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과 또 한 편으로는 작은 떨림으로 출발했습니다.
발등에 비춰진 작은 빛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 조심 내딛었지요.  
차던 밤공기도 어느덧 데워진 체온으로 훈훈해지고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어느새 흠뻑 젖은 땀을 말리고 등산화를 풀고 발을 말렸습니다.발을 자주 말려 주는 것이 오랜 산행에 제일 중요하다고 남편이 가르쳐주네요.
남편은 길 가에 벌렁 드러눕습니다. 저도 잠깐 돌 위에 기대 하늘을 봅니다.
푸르스름한 빛이 나타나는 걸 보니 곧 동이 틀 모양입니다.
금방 땀이 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느껴져 다시 신발끈을 매고 출발합니다.
동이 터오고 햇살이 비취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고운 빛갈의 단풍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쉬운 마음에 사진기를 꺼내들고 화엄사 계곡길에서 첫 기념 촬영을 합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7km.
이정표에 씌어진 거리가 조금씩 줄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어떨 땐 아이고 아직 이것 밖에 못 왔나. 어쩔 땐 벌써 이만큼 왔구나..
일희일비하며 발걸음을 계속합니다.

코재를 넘어서자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향하는 대로가 보입니다.
정말이지 광명이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
"아이고...욕 봤심더..." "수고했습니다.."
성삼재에서 오시던 등산객들이 수고했다 칭찬해 주시니 정말 내가 뭔가를 해낼 것만 같은 기분에 날아갈것만 같습니다.

환한 그 길을 여유롭게 걷다 마지막 10분 바짝 올라가니 노고단 정상입니다.
버스 타고 성삼제까지 가서 출발하자고 남편을 무척이나 졸랐으나...
"그러려면 뭐하러 가냐.."는 남편의 고집에 어쩔수 없는 코스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노고단에 도착하여 지리산의 맛보기를 하니...이젠 슬슬 막연한 두려움 보다는 새로운 기대가 마음을 채웁니다.

노고단에서 코펠을 꺼내 세상에서 가장 맛나는 라면을 끓여 먹고 첫날 머무를 연하천을 향해 출발합니다.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가는 길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많은 등산객들로 붐빕니다.
앞뒤로 여러 산악회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하하호호 즐겁게 오릅니다.
느릿느릿 한걸음 한걸음 오르는 저는 수십번도 더 길을 비켜 서주어야만 했지요.
계속 꼴찌로만 가는 게 못내 속상했던 저에게 남편이 이야기해줍니다.
한비야씨가 독일의 무슨 산을 오를때 어떤 아주머니가 모든 이들에게 길을 내어주며 너무도 천천히 가는 모습을 보며 뒤따라갔는데 결국 정상에 오른 것은 그 둘이었다고.
그 말에 힘을 얻고 다시 걷습니다.
굽이 굽이 오솔길, 오르막 후에 다시 내리막 길..내리막 길 후에 다시 오르막길..
이렇게 반복되는 길이 좋습니다.
오르막이 계속된다는 두려움도 내리막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없어지니까요.
내 앞에 펼쳐진 길을 한 걸음씩 걸어나갑니다.

임걸령을 지나 삼도봉에 도착하니 사진 찍는 등산객들로 다시 한번 북적거립니다.
한 쪽 바위에 걸터앉아 신발 끈을 풀고 삼립 크림빵과 쵸코바로 간단한 점심을 먹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지리산 자락들.
제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이 차마 믿기질 않습니다.

너무 느릿느릿 걷는 나머지 표지판에 표시된 예상 시간보다 한시간은 더 걸리는 상태라 다시 걸음을 재촉해봅니다. 해지기 전에 연하천에 도착해야 하니까요.
토끼봉, 명선봉을 넘어 연하천산장까지 가는 길은 정말 힘들었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기가 힘들 때에는 두 가지 대사를 생각하며 걸었습니다.
하나는 엄홍길 님이 무릎팍 도사에서 하신 말씀인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산이 내가 그 곳에 있도록 받아준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었고,
또 하나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카렌이 하던 독백 " 내 인생에서 너무 힘들땐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가려고 했습니다."하는 말이었습니다.

힘겹게 힘겹게 해질 무렵 연하천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힘들었지만 스스로에게 뿌듯했고...
오늘 하루 내게 너무나 좋은 것들을 보여준 산이 고맙습니다.
저녁을 해 먹고 나니 부슬비가 내려 옷과 짐이 축축해지네요.
예상과는 달리 많은 등산객들이 머물러 산장은 무척이나 좁고 축축하고 추웠습니다.
그래도 자다 깨다 하면서 눈을 붙혔지요...

이튿날 새벽 다섯시.
아래층에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미역국에 햇반을 말아 후루룩 먹습니다.
밖은 안개가 가득하고 바람도 몹시 불어 옷을 끼어 입고 잠바도 하나 더 입고 모자까지 덮어쓰고 중무장을 하고 출발합니다.
생각만큼 다리도 아프지 않고 비교적 가벼운 발걸음입니다.
그런데..
날아갈 것 같은 센 바람. 간간히 내리는 우박.
내일은 정말 좋은 곳으로만 다닐테니 기대하라고 남편이 어제 얘기했었는데...
보이는 것이 없네요...
아무 것도 안 보인다며 투덜대는 제게 남편이 말합니다. “안개 보이잖아.이런 안개를 또 언제 보겠어.”
할말을 잃었습니다…

예상 시간을 훨씬 지나 벽소령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다들 떠난 다음이라 그런지 대피소에는 적막이 흐릅니다.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벽소령 화장실 뒷편으로 장관이 펼쳐지네요.
선비샘에 도착해 맑고 찬 물로 얼굴을 헹구고 나니 목욕이라도 한 듯 상쾌해집니다. 선비샘의 하늘이 가장 푸르다는 남편. 한참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기대해도 좋다는 남편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봉우리를 하나 오를 때마다 펼쳐지는 장관은 정말이지 감동의 연속이었지요.
칠선봉과 영신봉을 지나 세석 평전에 도착했습니다.
가을의 햇살을 받은 황금빛 물결에서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했던 아늑함과 평온함이 찾아옵니다. 남편과 손을 잡고 세석 평전길을 따라 한걸음씩 걸어 오르니 벌써부터 왠지 모를 아쉬움이 스며듭니다.
이번 종주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촛대봉이었습니다.
촛대봉 바위 끝에 올라 사방으로 펼쳐진 끝없는 지리산 자락의 모습. 마음 속 모든 지꺼기들을 가져가는 듯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삼신봉을 지나 연하봉으로 가는 이름 모를 봉우리. 그곳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한없이 바라봅니다. 저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태양 주위로 붉은 광선이 퍼집니다.
장터목 산장에 도착해서 저녁을 해 먹고 밤바람을 쐬러 남편과 나왔지요. 얼마 전 종주에 실패하고 내려간 남편의 후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전 학생 때 별명이 “산녀”였으나 지금은 애기를 낳고 꼼짝없이 매여있는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 곳 까지 온 제가 자랑스럽고 보조 맞춰가며 저를 이곳 까지 오게 해준 남편과 여러분들에게 감사했고 무엇보다 저를 받아준 이 자연이 감사한 밤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새벽 다섯시.
짐을 챙겨 천왕봉을 향해 오릅니다. 시작부터 제겐 한걸음 한걸음이 버거웠지만 헤드라이트를 켠 긴 행렬에 보조를 맞추어 따라 올라갑니다. 두발 보다는 네 발을 더 많이 사용하며 오르고 또 올랐지요. 마침내 천왕봉에 도착했습니다. 거북이 걸음으로 드디어 그 곳까지 올랐답니다. 일출은 볼 수 없었지만 사방에 밝아오는 미명의 빛이 신비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내려오는 길.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가방과 옷과 모자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지요. 앞서가는 한 아주머니 “좋은 건 다 보고 가네~”라 하십니다. 정말로 그렇네요. 첫 눈까지 선물로 받았으니까요.
중산리로 내려오는 길. 무릎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산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렸지만…덕분에 지리산에서 내려오기를 너무 아쉬워하던 남편은 내려오는 굽이굽이…이 곳 저 곳에서 마음껏 즐기다 올 수 있었다 합니다.
내려가기 너무 싫다는 남편에게 제가 한 마디 합니다. “아쉬움이 남아야 진짜 좋은 거지, 아쉽지 않다면 그게 정말 좋은 거겠어?” 남편이 말합니다. “이구..조댕이는 살아가지구..ㅋㅋ”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오는 길. 멀찍이 바라보는 지리산이 이젠 무섭지 않고 너무나 친하게 느껴집니다. 색색의 아름다운 가을 빛을 가득 담은 지리산. 정말 소중하고 아름다운 2박 3일의 종주였답니다.

제가 출발할 수 있도록 용기 주신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 ?
    오 해 봉 2007.10.31 23:16
    권승연님 새댁 이시군요,
    지난주 질문과답변 란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젊은부부의 아름다운 지리산 미소지으며 잘 읽었습니다,
    “아쉬움이 남아야 진짜 좋은 거지, 아쉽지 않다면 그게 정말
    좋은 거겠어?” 남편이 말합니다. “이구..조댕이는 살아가지구..ㅋㅋ”
    참 다정한 부부로군요,
    그리던 지리산 종주를 했으니 더 건강하고 행복 하세요.
  • ?
    해성 2007.10.31 23:56
    첫눈인가요?
    아~ 벌써 지리산에는 눈이 내렸군요..
    좋으셨겠습니다.
    산행기를 보면서 지리산에 처음 올랐던때가 생각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
    부도옹 2007.11.01 00:26
    지리산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에 흰 눈 까지 내렸다니 정말 좋은 것은 다 보고 오셨네요.
    종주 축하합니다.^^*
    힘든 산행길을 덜 힘들게 만들어준 남편분께 박수를....
  • ?
    쉴만한 물가 2007.11.01 09:01
    안개가 가득한 산길에서 안개를 볼수 있는 권승연님의 남편의 여유로움이 참 좋습니다. 힘든 길을 서로 격려하면서 걸어가시는 모습이 참 정다우십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
    아낙네 2007.11.01 14:15
    눈으로 밟는 종주길임에도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느낍니다.
    산행하며 흘리는 땀은 기분을 좋게 해주거든요.
    나누는 격려속에 꺼질 것 같은 몸도 마음도 금새고 추스릴수 있는 그 힘도 함께요~~ 종주 축하드려요 ^^*
  • ?
    김종광 2007.11.01 15:10
    부부가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해내셨습니다.
    축하드림니다. 보기좋구요.
    힘들고 어려운 산행길이 훗날 행복한 추억으로 여운이길게 남지요.
  • ?
    슬기난 2007.11.06 19:42
    저리 든든한 남편이 옆에 계시니 먼 인생길도
    무난히 헤쳐 나가시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산행을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두 분 손잡고 좋은 산행 하시기 바랍니다!

  • ?
    여우아저씨 2007.11.24 21:53
    지리산이 정겹게 느껴지지요 *^^*
    내려가기가 정말 아쉽습니다.
    지리산처럼 든든한 사람과 함께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멋진 종주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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