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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조회 수 3846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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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도 채 가기 전인데 스치는 봄 내음이 참 부드럽다 했다.
희미해진 겨울의 뒷자락에 서 이제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갈 한 계절의 저문 시간들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따뜻한 햇살. 그 앞에서는 또 한없이 내어주고 부드러워지고 싶은 맘.
올 봄은 유난히 일찍도 시작되는구나..

주룩주룩 하루 종일 그칠 줄 모르고 비가 쏟아졌다.
봄비. 항상 촉촉히 착하게 내려야하는 게 봄비인 줄 알았더니,
한 걸음 쉬지도 않고 겨우내 얼어있던 찬 그림자를 거두어들인다.
기별 없이 찾아온 빗줄기를 바라보며 다음날 지리산 산행을 앞둔 마음이 많이 흔들린다.
갈까 말까.. 갈 수 있을까. 가지 못할까..
이렇게 온 땅이 비에 젖는데 지리산은 더욱 차갑고 무겁게 젖어있겠지. 거기에 또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날리겠지.
한 몇 주 휴일을 집에서만 굼뜨다가 이번 지리산 산행을 얼마나 기대해왔는데.. 또 비가 내린다니.
뒤죽박죽 여러 생각들이 함께 빗속에서 가뭇거린다.
'한 여름 지리산. 갈증. 편안한 집. 매운 떡볶이. 기대감. 우려. 사람들. 봄. 우산. 우중산행. 비........ '
그러고 보니 과연 비에 흠뻑 젖어본 때가 언제였던가..
그래. 뭐 이참에 다른 곳도 아닌 지리산에서 다 젖어보는 것도 꽤 괜찮을지 모르지.


중산리를 기점으로 천왕봉을 올라 장터목대피소 쪽으로 향하여 법천 계곡을 타고 하산하는 코스.
새벽 4시. 중산리 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조금씩 보슬비가 흩날린다.

아주 오래 전 지리산 산행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능선 이름 하나 기억나지 않는 열 몇 시간의 고행의 길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은 지리한 길. 또 길.. 그리고 계속 따라붙는 타는 갈증.
열심히 좆고 좆아서 쉬지 않고 가야 겨우 볼 수 있었던 앞사람의 귀한 뒤통수가 참 반가웠던 기억 하나.
그땐 지리산은 너무 지리해서 이름이 지리산이 되었다는 누군가의 싱거운 말을 정말 사실처럼 받아들였다.
맨양말 운동화에 뜨아한 옷차림을 하고 나선 나의 첫 지리산 산행.
쓰러질 듯 용케 내려와선 그대로 뻗어버렸는데 잠깐 바라본 하늘이 정말 노랬던 기억. 그리고 며칠 몸살을 앓았던 것 같은 기억..
지금 생각해도 참 뭣한 무모하고 어설픈 산행이다.
그런데 난 여태 지리산을 얘기할 때면 그게 꼭 정답인 듯 지리산을 종주했노라 표현하곤 한다.
내 발 닿은 곳.. 산에서 시작해 부르트게 산과 부대끼다 무사히 산으로 끝났으면 그게 훌륭한 종주인 게지. 암. ㅎㅎ 그렇게 내 식대로의 한 줄 어설프고 명쾌한 결론을 내리면서.

판초 우의을 입었다가 벗는다. 그리곤 미끈거리는 땀을 견디지 못하고 자켓을 벗었다 내피도 벗어 개키고
안개인지 비인지 모를 축축함을 느끼며 또 멈춰 우의를 입는다.
그러다 다시 한기가 느껴져 벗었던 옷들을 열심히 껴입는 수고스러움을 반복한다.
비에 강풍이 분다는 기상 예보에 많이 긴장했는데 의외로 살갗에 와닿는 공기는 쾌적하고
사람들도 별로 없어 꽤 한적한 산행이 이어진다.
더욱 수수한 숨결로 다가오는 지리산의 그 은근한 모습을 마음껏 누리며
시간이 지날수록 비안개에 휩싸인 적막감을 마치 축복처럼 받아들인다.
새벽산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처음엔 그 어둠의 위엄에 압도당한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마치 극과 극의 조화처럼 헤드랜턴 불빛에 감싸인 어둠은 더욱 아늑하게 다가오고,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 몸은 어느새 침묵과 하나가 되었음을 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침묵 속에 빠져 이미 지나왔던 것 혹은 보지 못하고 생각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고 다시 생각하고 후회하고 수정하고 다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겐 바로 그것이 새벽산행의 참 멋이다.
아마 진실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더 많이 존재하겠지.

좀 가파르고 거치르며 꽤 힘이 들었던 중산리의 오름길.
그 사이 누군가는 통증을 호소하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산을 했고
또 누군가 몇은 근처 산장까지만 올라 날이 밝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겠다고 한다.
어둠과 뿌연 안개에 휩싸여 우박도 내리다 눈도 비도 내리다 다시 멈췄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날씨이다 보니 몸의 이상 반응과 하산의 유혹에 더욱 마음이 약해졌으리라.
하지만 제 깊은 속을 쉽게 내어주지 않고 더딘 새벽의 여명을 밝혀가는 지리산의 그 모습에 취해
난 왜 그렇게 오를수록 신이 나던지.
그러나 천왕봉에 다가갈수록 사정은 달랐다.
희미한 안개비는 거센 눈바람으로 바뀌고 금새 그칠 듯 약했던 빗줄기는 웅크린 산자락을 휘돌며 도도하게 몰아쳐댔다.
느슨한 걸음걸이로 웅장한 정상을 기대하던 우리들은
서슬 퍼런 지리산의 위력에 누구하나 놀라고 휘청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왕봉 정상의 신비한 운무를 꿈꾸며 오는 내내 우린 얼마나 들떠 재잘거렸던가.
그런데 한순간에 우리들의 소원은 아주 소박한 것이 되어버렸다.
정말 눈물 쏙 나게 뿌리치는 지리산 천왕봉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 무사히 정상에 오르고,
사진 한 장 잽싸게 박고선 어서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
ㅎㅎ 당연히 소원은 이루어졌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도 천진한 모습을 하고선 입이 귀에 걸리게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몇 장의 추억.
여기 그 영광스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늦은 시장끼를 없애고 하산하는 길은 쉼 없이 비가 내렸다.
지리산 오기 전 우려했던 그 비가 하산길 내내 주룩주룩 주루루룩..........
하루 이틀 전 불평하던 것보다 더 주루룩 발끝을 적신다.
어느새 빗줄기에 온전히 제 몸을 내어준 지리산에 나또한 내 무릎을 적시고 발도 적시고
몸마저 흠뻑 적시고선 아무 걱정 없는 아이처럼 그 속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
그리고 빗속에 점점 잠길수록 내 마음의 몹쓸 잔가시들도 모두 씻어내고 흘려버리고 싶어진다.
정말 철모르는 아이처럼 그렇게 되고 싶어진다.
하산길 내내 동행하게 되었는데 참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신 k님,
그리고 어느 순간 내 뒤를 바짝  따랐던 마음씨고운 H언니.
지리산의 봄비 속에 몽땅 젖어 우리 셋 모두 별 말이 없는데도 마음으로 주거니 받거니
긴 하산길을 내려온다.

한없이 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스치는 새순 가지마다 또록또록 물방울을 매달고 봄을 틔우고 있다.
어디선가 재촉하는 발걸음을 붙잡으며 계곡의 웅장한 하품소리도 들려온다.
누군가 이름 부르며 따라오는 것 같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빗소리 지는 그 자리에 더 큰 빗소리.
마른 잔가지들을 흔들고 푸른 전나무 숲을 스쳐 후미진 계곡을 맴돌아
산자락 마디마디 투명한 비가 와 닿는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지리산도 수많은 사람들의 몸 부대낌을 한결 덜어내고
겹겹한 지난 계절의 껍데기를 모두 벗어버릴 것이다.
아마 지리산 정상은 바람이 그치고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햇살 좋은 곳에서 내 젖은 옷과 젖은 신발을 좀 잘 말려봐야겠다.
그 햇살에 내 마음 차디찬 것들도 함께 널어 말려야겠다.
그리고 다가오는 봄을 향해 지금보다 조금은 더 용기 내어 기지개를 켜야지.

참, 또 다른 지리산을 꿈꾸며 3월 어느 우중산행의 추억을 오랫동안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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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 2007.03.13 15:48
    화요일인데 벌써 지쳐서 주말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리산記에.. 그만 모든게 괜찮아졌습니다.
    닫힌 지리산에.. 열린 지리산 이야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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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옹 2007.03.14 00:02
    ....눈물 쏙 나게 뿌리치는 지리산 천왕봉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 무사히 정상에 오르고, 사진 한 장 잽싸게 박고선 어서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
    소원을 이루셨다니 축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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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타타 2007.03.15 12:44
    우중산행하니 온몸이 오싹합니다.
    초록숲 속에서의 우중산행은 싱그럽기까지 합니다만은....
    너무 춥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항상 즐거운 산행 하십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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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만한 물가 2007.03.15 14:39
    철 모르는 아이가 되게하는 그곳 가고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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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7.03.15 17:21
    비맞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좋았지요,
    꽃피는 좋은때 또 한번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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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아라 2007.03.16 12:13
    지리산과 비
    너무 어울립니다.
    행복하실겁니다. 먼 훗 날 생각해 보면 더욱 더 요.
    저도 두번의 종주때 함께한 비, 그 추억으로 지리산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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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은주 2007.03.16 15:35
    여러 님들의 답글 고맙습니다.. 하나 둘 꽃이 피어나니.. 지리산은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고 그립습니다.. 올 여름엔 정말 시원한 소낙비를 맞으며 제대로 종주를 한 번 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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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성 2007.03.25 18:12
    제 기억에 우중산행은 오랫동안 기억속에 자리하더라구요
    우중에 수고많으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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