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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식(喘息)...
그렇게 서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누워 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정리하고 취사장으로 가서 햇반을 익히고  국을 끓였다. 꼭꼭 씹어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나의 길에 정점이 될 천왕봉으로 출발했다.

계단으로 된 길을 어릴 적에 지게 지던 자세로 차근차근 올라갔다. 가다보니 습지가 나왔고 마침 탐망대가 있어 잠시 길을 멈추어 섰다. 이 높은 곳에 습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고산습지식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떠나가고 있는 세석평원을 뒤돌아보았다. 대학시절 내가 야삽으로 부지런히 퍼질렀던 상처는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고 구상나무도 제대로 들어서서 제법 어우러지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어머니 품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다. 나는 세석에 오면 언제나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 어제도 그랬다.

중국인들은 북방 기마민족의 침략이 잦은 가을을 두려워했고 천고마비라는 말은  이 같은 중국인의 마음을 표현한 거라고 한다. 그동안 나도 이 가을을 두려워했다. 어머니의 지병인 천식 때문이었다. 거의 10 여 년 동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슬슬 긴장이 되었다. 여름옷이 얇다고 느끼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입원소식이 들려왔다.

매년 서너 번씩 입퇴원을 거듭하던 것이 작년 11월에 입원하여서는 더 이상 퇴원을 못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고작 지하 한길 남짓이었다. 그 한길 땅속에 어머니를 묻고 우리는 먹고 자고 지지고 산다. 이승에서 모자의 인연으로 44년을 살았으니 돌아가신 어머니에는 아직 내 마음이 익숙하지 못하다.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로 새로운 연을 쌓게 되었다. 촛대봉에 올라서서 다시 한 번 세석을 돌아보았다. 안녕! 안녕히... 내청춘의 추억들...

연하봉...
지리산의 별칭이 방장산이다. 반야봉, 제석봉, 연하봉... 불교색채를 띄는 이름이 많다. 하긴 우리나라 국보의 80%가 불교문화재이고 천년을 이어와 생활 곳곳에 배이지 않은 곳이 드물다. 종교를 떠나서 나는 이 이름들이 좋다. 반야봉이 좋듯 연하봉도 좋다. 겨울산행때 지친 몸을 이끌고 거의 막바지에 이른 종주길에 새 힘을 불어준 곳도 연하봉이다. 특히 장터목으로 내려가다 만나는 평평한 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생각한다. 가파른 제석봉에 대비해 힘내라는 뜻에서 산신이 배려한 것 같다.

이상하게 중주길 중에 제일 생각이 없는 곳이 촛대봉에서 장터목까지다.  그 곳은 학창시절부터 줄기차게 갔는데 갈 때 마다. 별다른 기억도 없고 와서도 아는 게 없다. 눈앞에 거의 다가온 정상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서 그런 것 같다.

내 나이 44세...
무겁다. 처음보다 배낭의 무게는 많이 줄었지만 갈수록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인가. 무거운 것은 처음부터 배낭이 아니라 내 몸이다. 나이를 ‘묵’었다. 그리고 식탐을 하여 많이 ‘묵’었다. 둔탁한 허리와 부담스런 아랫배는 아내의 아침저녁 지적사항이지만 지방뿐만 아니라 뻔뻔함도 충만한 나는 이 몸에 뺄 살이 어디 있냐고 맞선다. 하지만 제석봉에 오르면서 내 몸 곳곳에서 오는 지적사항에 나는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다. 백두대간 종주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이 몸으로는 도저히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동안 나는 나이도 먹었고 운동은 않으면서 너무 무절제하게 음식을 탐한 것 같다. 나이 먹는 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고 소식이 좋다니까 절제하는 식습관을 길러 산에 맞는 체형을 갖춰야 겠다.

정확히 9시 10분에 천왕봉에 올랐다. 내 경험상으로는 상당히 빠른 시간이지만 이미 많은 선행객으로 들끓었다. 바람은 땀에 젖은 몸을 식혀주었다. 언제나처럼 사방을 부지런히 돌아보며 눈에 넣었다.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세석에 못 보던 안테나가 있더니 전화는 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잘 터졌다. 전화에 바람소리까지  들리는지 바람 많이 부냐고 물었다.

자 이제는 하산이다. 계획대로 대원사로 갈건가. 아니면 빠른 중산리로 내려 갈건가 잠시 고민을 한다. 무릎이 문제다. 폈다 구부리면서 가름해보니 조심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대원사 쪽이다. 사실 중산리는 안 좋은 기억이 많다. 내려가다 많이 다쳤고 올라오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겨울에 아래 민박집에 MT왔다가 후배 둘의 부추김에 준비 없이 눈이 허리까지 쌓인 중산리로 천왕봉에 오른 적이 있다. 엎어지고 미끄러지고 거의 죽을 뻔했다. 가벼운 동상까지 겪었다. 그리고 지루한 계단 길은 산행이라기보다는 노가다에 가깝다. 나같이 소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대원사쪽 길이 훨씬 호감 가는 길이다.

조금은 가빠른 중봉에 올라 한숨 돌리고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갔다. 작년 가을에 이곳에서 보는 단풍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지금도 괜찮다. 저기 태극의 용틀임으로 구곡산이 보인다. 언제고 저 태극 능선으로 가보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려가면서 조심해서 걸으니 다리는 별탈이 없었다. 이곳 길로 온 것이 잘한 결정이라고 자찬을 했다. 아무래도 중산리 보다 오는 사람이 적으니 간간히 마주치는 산객들이 더 반갑기도 했다. 산길도 다른 곳 보다 좀 더 자연스러웠다. 이 길도 지루해질 즈음에 치밭목산장에 닿았다. 10시 40분이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갈증이 났다. 세석에서 두병 가득 채워온 물이 동이 났다. 제일 먼저 식수장으로 가서 찬물을 한입 가득 머금었다. 아! 물이 달다. 오다가 가는 곳마다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달랐다. 아주 맛있게 물을 마셨다.

조금은 이르지만 치밭목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하나 남은 햇반을 익히고 북어국을 끓였다. 산에서의 마지막 성찬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커피를 끓이고 있으니 산장 아저씨가 밖으로 나왔다. 무뚝뚝하고 시큰둥한 모습은 여전하다. 이제는 그 모습이 오히려 정감이 간다. 커피 한잔 하자고 했더니 조금 전에 마셨다고 했다. 전에는 많이 주면 좋다더니... 커피 향을 맡으며 취사장에서 퍼질고 앉아 지난 구간을 회상하고 새재로 갈까도 잠시 고민했다. 아니다. 그냥 그대로다 고!

10여분을 내려가다 올라오는 노부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수줍은 듯  새재에 왔다가 아무 준비 없이 한번 가보는 중이라도 했다.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 했지만  산에 오른다는 흥에 취한 모습은 아름다웠다. 즐겁게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산장에서 만났다면 저분들에게 커피라도 한잔 타드렸을 것인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일었다.

가을이나 겨울산행은 능선과 봉우리가 좋다. 하지만 여름은 골짜기가 좋다. 먼저 햇볕 이 들지 않아서 좋고 시원한 물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머릿속까지 시원해진다. 그 기분은 느끼고 싶으면 당장 치밭목에서 대원사까지 걸어보면 된다.

물이 너무 맑아서 잠시 개울 곁에 앉아 손도 담가보고 평상 같은 바위에서 배낭을 소파삼아 기대어 쉬기도 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중간쯤에서 올라가는 세분을 만났다. 그분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오이 반 조각을 얻어먹었다. 나보다 약간 연상인 듯한 그들은 산에는 초보들이었다. 혼자서 종주한다니 신기한 듯이 이것저것을 물었다. 너무도 진지하게 질문하여 아는 대로 성의껏 대답을 해 드렸다. 谷無虎兎先生이란 말처럼 그 골짜기에서 나는 진짜 등산의 거장 대접을 받았다.

이제는 다 왔다는 안도감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풍경은 중주간에 지친 내 마음을 어루만저주고 씻어주었다. 저번에는 지루한 기분이 든 것도 같은데 이번에는 가는 길 내내 즐겁기만 했다.
유평마을에 닿으니 두시를 조금 넘었다. 쉬엄쉬엄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갔다.  차로 다니던 길을 걸어서 가보니 별다른 느낌이었다. 골골의 물들이 합해져  큰 줄기를 이루고 수정처럼 맑게 흐른다. 발끝은 아리고 어깨가 조이고 종아리가 땅겨도   대원사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운치는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었다. 여러 번 차가 옆을 지나갔지만 그들이 태워준다 해도 걸어서 가리라고 다짐을 했다. 걷는 행복을 차만 타고 다니는 그대들이 어찌 알리오...

차타는곳 까지 가는 길은 내 지친 몸은 힘이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종주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했다고 자부한다. 마침  바로 출발하는 차가 있어 지체 없이 진주로 올수 있었다.

나는 수박을 좋아한다. 토요일이라  아내가 터미널까지 나와서 편하게 귀가를 했다. 오는 길에 수박을 한통 샀다. 가까운 곳에 농산물공판장이 있어 싸고 품질 좋은 과일을 살 수 있다. 배낭을 던지듯 놓고 수박부터 쪼개어 한입가득 물었다.  몇 개를 순식간에 먹고 나니 포만감에 정신적으로도 안정이 되었다. 역시 난 먹어야 행복한 사람이다. 아! 집의 편안함이여... 그리고 나서 아내에게 여름의 지리산계곡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야기 했다. 지리산도 식후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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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6.06.24 13:54
    정다운 산행기 잘 읽고갑니다,
    지리산에가서 천식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는 효심에
    머리를 끄덕였답니다,
    승종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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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옹 2006.06.24 20:02
    아~ 왜 이리 사십대들이 감성이 풍부한지....
    지리산과 함께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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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타타 2006.06.25 00:01
    올해 목표가 종주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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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백성 2006.06.26 14:11
    같은 40대로서 공감이 많이 가는 산행기입니다.
    아픈 무릎은 괜찮하신가요? 저도 지리길을 좋아합니다.
    설악처럼 도도하지도 않고! 한라처럼 사치스럽지도 않고!
    내려와서도 바로 또 가고 싶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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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난 2006.06.27 19:41
    백두대간을 위하여 식습간을 고치신다더니
    지리산도 식후경이라뇨???
    긴 산행후 두분이 수박 한 통들고 행복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끔씩 말고 자주 뵐 수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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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연 2006.06.29 13:06
    저 같은 30대 초반은 아직 감성이 풍부하지 못하여
    이런 글 절대 못 씁니다......^^
    지리산 정말 좋다고 밖에................정말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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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6.07.24 06:47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고작 지하 한길 남짓이었다. 그 한길 땅속에 어머니를 묻고 우리는 먹고 자고 지지고 산다'~느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슬퍼만 했지만 새로운 인연의 세상으로 돌아가셨다는 마음으로 명복을 빌 수 있으니 이승의 삶도 잘 닦아야 할 소중한 몫입니다 오랫만에 세월을 감각하는 좋은 글 잘 읽습니다 합장

    ps;님의 글 함께 읽고 하동송림 그곳에 가고싶다로 모실게요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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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세상 2006.07.27 22:47
    제 어무이께도 지리산 보여드리고 싶은데... '가고 싶은 곳이 없다'고 하시니.. 차 타는게 싫으시대요^^ 뱅기 타는것도 싫고^^ 작년만 해도 관광버스 쫓아 다니셨는데, 그새 더 많이 힘이 빠지셨는지, 아님 제가 잔소리를 많이 해서 같이 가기가 싫으신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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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향기 2006.08.23 17:47
    어머니의 대한 글에서 진한 마음이 느껴집니다..가슴이 뭉클해지네요
    깊은 표현력에 저또한 숙연해집니다... 귀한 산행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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