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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걷는다. 이제부터 긴 여정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내 다리는  긴장되고 걸음이 절로 바빠진다. 6시가 지났는데도 해는 아직 서쪽에 걸려있다. 작년 가을의 짧은 저녁과 비교가 되었다. 다가오는 미래는 내게 항상 설렘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짧게 잡아도 산길 25킬로를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 그리고 장마철이라고도 하는데 무슨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리산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산에 들게 되는 것은 노고단에 대한 호감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삼재길이 열린 이후로 남들보다 조금 일찍 마이카 족이 되었던 터라 시간 나는 대로 하동으로 해서 화엄사로  힘과 연비의 노고단 고갯길을  올랐다. 비온 뒤에 산 빛이 그렇게 고운 것을 그때 알았다. 친구나 연인이나 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었던 곳이라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다. 아내와도 만난 지 일주일 만인가 노고단으로 갔다. 그렇게 험하지 않은 길이지만 괜히 끌어주는 척하며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지금까지 잘 잡고 있다. 그렇게 잡은 손이 한둘이 아니었겠지만 이 한손만은 놓지 않고 살아옴은 인간이 아무리 발부덩쳐도 결국은 인연인 것을... 그래 인연인 것을...  세월이 흐름에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없는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추억을 한 겹 한 겹 떠올리며 그렇게 노고단을 올랐다. 해가 이미 진 듯 한 시간에 발밑은 어두움이 오는것과는 달리 저위쪽 산정에는 여전히 석양이 비치고 있다. 중간쯤에 이르러 화엄사 쪽으로 보자면 저 멀리 섬진강이 비단띠 처럼 빛난다. 이마에 한 두 방울 맺히기 시작한 땀을 훔치고 배낭을 다시 한 번 추스르게 된다. 길옆에는 늦은 함박꽃이 피어 있었다.

처음으로 숨이 턱에 이르는 느낌을 받고서 계단 길을 벗어나니 노고단 산장은 그 모습 그대고 반겨주었다. 이번에는 노고할머니가 정겨운 모습으로 산장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 여자분 둘이서 커피를 마시고 있어 나도 슬그머니 말을 걸어서 커피 한잔을 얻어 마셨다.

배낭을 놓아두고 스틱만 들고 노고단 고개로 올라갔다. 항상 나를 격동시키는 노고단의 석양을 보기 위해서다. 지리산 종주를 가면 내가 좋아하는 코스 중에 하나가 노고단산장에서 코재쪽 전망대를 거쳐 짝퉁노고단까지이다. 성삼재에서 산장까지 오느라 적당하게 몸이풀린 상태에서 언제나 시원하게 불어주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종주산행의 고단함을 아직 격지 않았고 다가올 것에 대해 기대만이 충만하여 심신은 절로 상쾌해 진다.

장마가 예상되었는지 산장은 대체로 한산했다. 전날 월드컵 본다고 잠을 자지 못했음에도 쉬 잠들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그만 일어나서 등산잡지를 빼들고 시청각 자료실로 갔다. 불을 켜고 둘려보니 재미있는 자료가 많이 전시 되어있었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지리산에 방사되었다가 올무에 희생된 반순이의 유골이었다. TV에서 장군이,막내, 그리고 또 하나와 재롱부리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렇게 유골이 되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왠지 피냄새가 싫어진다. 사냥에다 낚시에나 누구 못지않게 전투적인 기억이 많은데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가 되고 그리고 나이를 먹고 삶의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타인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해 외경심이 조금 생긴 것 같다. 무지막지한 덫과 올무를 보며 앞으로 순화된 사고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장의 새벽은 아침잠이 많은 나를 부지런하게  만든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첫 종주길은 왼쪽 무릎이 아파서 고생을 했다. 그다음은 이상이 없었다. 그 아팠던 경험이 너무도 각골명심이라 소싯적처럼 허덕거리지 않고 조심조심 계단 길을 올랐다. 너무도 상쾌했다. 심장에서 무한한 에너지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반야봉 초입에 서서 올 때 마다하는 갈등을 겪게 된다. 그냥 가느냐. 아니면 반야봉에 갔다가 가느냐 항상 갈등은 하지만 가지 않은 적은 없다. 나는 반야봉 그 이름만으로도 사랑한다. 그리고 저 멀리서 봤을 때 산정의 중간쯤이 살며시 접힌 듯한 그 모습이 좋다. 그리고 반야봉에 올라 멀리 펼쳐진 운해를 볼 수 있는데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내 다리가 조금 아픈 것이 무슨 대수가 되겠는가.

오르는 길은 힘이들어도 반야봉에 올라서는 잘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방으로 펼쳐진 경관은  편안하고 경이롭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노고단 쪽과 천왕봉 쪽의 경치는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려오기가 아까워 그냥 무작정 퍼질고 앉아서 놀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가기 싫어도 가는 것이 인생이다. 아쉬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서 내려오는 길에 발레리나의 동작처럼 쫙쫙 펴진 구상나무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내 몸의 취약처는 무릎이다. 산행 중에 항상 무릎을 걱정한다. 그런데 아프게 되면 꼭 반야봉을 내려와 뱀사골쯤에 가면 이상이 온다. 그때 괜찮으면 끝날 때 까지 문제가 없었다. 그날은 컨디션이 너무 좋고 나름대로 조심을 했는데 오른쪽 무릎이 이상이 왔다. 운동선수는 컨디션이 좋을 때 부상을 입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니 자연 몸이 불어나고 마음은 20대인데 몸은 이미 중년에 들어섰다. 중년에 맞는 산행을 하고 몸을 만들어 가야 하는데 식성이 좋은 나는 식도락을 사는 재미중에 하나로 여긴다.

걷다보니 취사장에서 본 아가씨 둘이 보였다. 뒷 자태가 너무 고아서 나도 몰래 걸음을 늦추었다. 무심한 그 아가씨는 살며시 비끼어 서서 ‘먼저 가시죠’ 한다. 친절함도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임걸령에서 수통에 물을 채웠다. 하동에서 친구와 재첩국 먹고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뱀사골까지 오는 코스를 생각 많이 했는데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지금 TV에서 클래식 오디세이를 한다. 신화는 오디세우스를  방랑의 대표주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항해를 했지만 나는 방랑이란 이 말에 무작정 걷는 것을 생각한다. 방랑자의 끼를 타고 났지만 방랑을 못하는 나에게 이 지리산 종주는 제한적이나마 합법적인 방랑의 장을 준다. 오랜 세월을 방랑으로 보내고 다시 만난 오디세우스와 그 아내는 그 기다림만큼 나머지 생이 행복했을까? 아니라는 답을 어느 책에서 잃은 기억이 난다. 클래식 오디세이에 오자와 세이지가 나온다. 반일 교육을 16년 동안 받은 나도 멋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다.

걸을 때 나는 행복했다. 길지 않은 삶에서 미운 놈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전에는 잊고 용서하기도 잘했는데 나이가드니 가슴에 맺히어 잊히지도 않고 한 번씩 되뇌며 씹게 된다. 그래봤자 내 머리만 띵해지는데...  약도 없는 이 증상을 치료하는 데는 걷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집 옆에 있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금호저수지를 걷고 남강 변을 걷고 월아산을 걷는다. 걷는 순간은 항상 즐겁고 행복했다.

이 행복한 행위를 나는 앞으로 만 이틀 동안 계속할 수 있다. 방랑자는 방랑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나 나는 이 순간 열심히 방랑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며칠 전에 베트남과 국제결혼이 뉴스가 되어 나도 베트남처녀와 결혼 하고 싶다는 고이즈미급 망언을 내 뱉었다가 거의 쫓겨날 뻔했다. 집밖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던 그 기억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렇듯 풍찬노숙을 두려워하는 나는 무늬만 방랑자일 뿐이고  이 짧은 일탈에 흠감하다.

연하천에서 점심을 먹었다.  간단한 빵이나 과자류로 떼우고 갔던 지난번과는 달리 찬물로 무릎을 식히고 햇반과 즉석국을 끓어 나름대로 거나하게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 휴식을 더 취하여 회복시간을 갖고 제대로 먹어서 에너지를 보충해야 산행이 순조로울 것 같아서였다.그 노력 덕분에 다리는 많이 회복이 되었지만 벽소령산장에 다갈 즈음에 내다리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조심했음에도 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치 아팠다. 벽소령에 도착하여 찬물도 마시고 초콜릿으로 원기를 보충했다.

이런 상태면 오늘 굳이 세석까지 갈필요가 있을까하고 하는 생각이 들어 애초 계획을 다시 돌이켜 봤다. 산장 앞 벤치에 한 시간여 쉬니까. 다시 원기가 돌았다. 그리고 전에 무릎으로 고생했을 때는 지레 겁먹고 더 무리하게 되어 훨씬 심각했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노련하게 페이스 조정을 하여 전처럼 완전 통제 불능은 아니었다. 그리고 달도 없이 벽소령에서 지내기가 싫었다.

배낭을 추스르고 세석으로 출발했다. 조심스레 오른쪽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게 걸었다. 그러다 보니 걷는 중에 무릎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나도 종주산행에 캐리어가 붙은 것 같다. 벽소령에서 세석까지는 가을이 아니면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가을에 본 것 중에 영신봉과 써리봉이 가장 좋았다. 영신봉 즈음에 어느 분이 사진 촬영을 나에게 부탁을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도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을 것을 권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실은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내 머릿속 생각도 길 따라 시시각각 이어간다. 그러나 카메라를 드는 순간 그 생각과 연상은 깨어진다. 사진이야 많은 분들이 올리니 그 것을 볼 수도 있고  그보다는 아무리 화소가 높은 사진이라도 그 순간의 감상까지 가지오지 못한다. 그냥 가슴속에 머릿속에 담아서 오만은 못한 것 같아서이다.

세석산장은 금요일이라 많은 등산객으로 붐볐다. 그날따라 기온도 차고 어제 잠을 설친 여파와 아픈 다리를 위해 급히 저녁을 먹고 자리에 들었다. 잠시 선잠에 들었으나 깨고 말았다 옆에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단체로 왔는데 밤새 큰소리로 말하고 주무시면서 심하게 코를 곤다. 그리고 옆에 분은 코곤다고 큰소리로 나무라고... 방랑의 또 하나의 목적이 객수심이라 하던가. 나는 그날 객수심을 심하게 느꼈다. 아내와 아들과 그리고 3월 달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날 나는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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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옹 2006.06.23 07:24
    덕분에 글을 읽으며 종주산행을 함께하게 되네요.
    세석에서 마쳤으니 당연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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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lu 2006.06.23 11:03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승종님,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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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영 2006.06.23 22:20
    삶의 향기가 풋풋하게 묻어나는 산행기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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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6.06.23 23:25
    재미있는 산행기 미소지의며 잘 읽었습니다,
    yalu 님 이렇게 나와주시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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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6.08.02 08:58
    승종님의 산행기 중편에서 또 한마디 귀한글 얻습니다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내 머릿속 생각도 길 따라 시시각각 이어간다-
    세석산장의 연민을 가슴에서 지우지 못한채 이글도 함께 저의 하공송림에 모셔갑니다 양해를 바라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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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6.08.02 09:28
    종주산행기 중편에서 승종님의 객수심을 읽으며,꿈 속의 방랑 과 여정속 향수를 되살려 보았습니다
    서정이 담겨 지리산을 흐르는 님의 산행기 멋있어요 ^^*

    '방랑의 또 하나의 목적인 객수심을 심하게 느꼈다는 그날,
    아내와 아들과 그리고 3월 달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날 나는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다.는 대목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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