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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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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2158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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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날씨가 풀어지는듯 하더니, 어제는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환하게 밝아지고 은세계로

변했습니다. 도심의 곳곳, 차창가를 지나치는 남도의 들녁풍경, 저

멀리 보이는 앞산의 초목들 또한 은색옷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2월

이라는 계절을 탓해야 하나요... 조금은 덜 완성된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환해지면 우리의 마음 또한 까닭모를 들뜸과 가슴 벅찬

기대로 부풀게 됩니다. 당연히 나의 마음도 막연한 대상을 향한

동경과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 잡힙니다.

지리산이 떠올랐습니다. 길길이 방황이 계속되다가도 늘 생각의

나래가 지리산에서 멈추면 그것으로 끝이 거든요. 은세계와 지리산,

너무도 어울리는 앙상불이 됩니다. 또 내일은 설, 사실상의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지난 한해의 갈무리를

지리산에서 하기로 하였습니다. 또 새로운 한해를 맞이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겁니다. 기왕이면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서도 더 오를곳이

없는 정상 천왕봉이나, 찾으면 만복이 깃든다는 만복대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천왕봉에는 거듭되는 눈 때문에 갈수

없답니다. 그러니까 가고 싶고, 가야할 곳 중에서 만복대만

남았습니다.


음력 섯달 그믐날이 되었고, 나의 몸은 물론 마음까지 ,만복대를

향합니다. 차분한 마음에 아침 한나절(10시반)이 되어서야 만복대

입구, 상위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그동안 몇차례 상위마을을

찾았지만 늘 조용한 산골마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술래잡기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새롭습니다. 다들 오늘은 학교가 쉬는 날이라

학동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일이 설날이라서 도회의 어린이들이 부모님의 고향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오늘 본 아이들의 모습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우리 산골마을을 확인하는 셈이 되는군요. 그렇더라도 아침부터

시끌벅적 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봄이 오면

노오란 꽃내로 도회인들을 유혹하고, 결실의 계절엔 새빨간 열매로

도회인남정네들의 정력을 돋구게 될 산수유나무는 지금은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할 일이 없다는듯 겨울바람에 한가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상위마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마을분위기가 조용하고 아담한

까닭이지요. 마을이름과는 달리 너무도 조용한 산골마을이랍니다.

한때는 제법 번창하여 이름값을 했다는데... 동란을 겪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쇠락하였습니다. 동란시기에는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던 마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여느 지리산 산골마을이

모두 그렇지만, 이 마을사람들도 외부인을 보면 경계하고 살피는 빛이

역력합니다. 처음엔 기분이 별로 였지만 사연들을 알고나서는 이해

하게 되었습니다. 근대사의 한 과정으로 우리 역사가 모두 그렇지요.

약한자의 슬픔같은 진한 감정의 덩어리를 흠뻑 느낄수 있는 곳이

이곳, 상위마을이랍니다.

만복대가 머리위에 의젓한 모습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만년설로 뒤덮힌 킬리만자로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분명 서설입니다. 신년 새해를 앞두고 만복대를 오르는 까닭입니다.

남들은 재수굿을 한다고들 하지만 만복대의 서설에 흠뻑 취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위마을을 지나 졸졸졸 흐르는

겨우네 계곡을 지납니다. 물소리가 찬 기운 때문인지 몹시 청량하게

들립니다. 간간이 나무가지 위에서 눈덩이가 떨어지곤 합니다.

누군가가 먼저 이 길을 지난듯 합니다. 가녀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나있는 발자국이 무척 반갑습니다. 눈이 계속 내리는 가운데 발자국이

없다면 내가 초행자가 되어 발자국을 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겠지요.

그러나 전인답습(前人踏習)은 이렇듯 안전하고 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이 시대를 살다간 선배들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의 삶이 보잘 것이 없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 시대의 거센 도전에

온 몸으로 대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았던 당대(當代)를

못쓰게 만들고자 했던 세대는 없습니다. 자신들의 시대를 누구나

아름답게 가꾸고 싶었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훌륭한 시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당위성을

찾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그렇기에 하나같이 의미

있는 삶을 영위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습니다.

지리산은 가장 그러한 정당성을 간직한 산입니다. 큰 산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리산을 무대로 삶을 초개같이 버렸던

수많은 젊음은 무엇이 됩니까. 우리가 그러한 상념을 간직한다면 또

다른 위령제나 천도제를 지내지 않더라도 우리의 거친 근대사를 안고

통곡하며 죽어야 했던 젊음들은 위안을 받을 겁니다.


이제는 계속해서 오르막길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오르막은 묘봉치까지 한치의 빈틈도 없이 계속될 겁니다.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면서... 지리산에서의 인내는 단순한 끈기와는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그것은 고통의 초월입니다. 아픔을 참는 또

다른 표현이죠. 그렇기 때문에 지리산에서 우리는 고통의 미학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그렇습니다.

눈앞이 분간이 안될 만큼 눈보라가 치고 있습니다. 바람은 너무도

세차게 불어 옵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나는 가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 말할수 없는 행복감에 사로 잡힙니다.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습니다. 헉헉거리는 숨가쁨에도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없이 걷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듯 싶습니다. 무념의 극치, 그 자체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극단적인 조화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인간들의 이기심의 한 편린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리산 하단부에 가장 흔한 나무인 굴참나무가 하나같이

껍질을 모두 벗기운체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장식용으로 그만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현장을 확인하고나니 인간의 이기심에 분노마저

느끼게 됩니다. 껍질이 벗겨진 아름들이 굴참나무 가지위에 채워진 한

산악회의 리본이 족쇄처럼 보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것들을

안기지만 우리는 자연을 이용하고 앗아만 간다는 사실을 확인 합니다.

도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굴참나무 장식을 보면서 지리산의 자연을

만끽하겠지요. 그러나 굴참나무의 아픔, 또 지리산의 생채기는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구요? 인간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출발한지 두어 시간 남짓 오르면 묘봉치에 이릅니다.

지리산을 장엄한 산이라 말함은 주능선만을 두고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주능선 밖의 지리산 또한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산맥이라

할만큼 장쾌한 능선을 자랑합니다. 저 멀리 반야봉의 모습이 보이지만

짝궁둥이의 형상은 눈보라 때문에 분간할수 없습니다. 노고단은 바로

눈 앞에서 다가올듯 가까이에 있습니다. 좌우로 고리봉과 작은고리봉,

두 봉우리가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완벽한 형상의 균형적 조화를

느끼게 합니다. 만복대는 저 멀리서 빨리 오라 손짓을 합니다.

나말고 사람의 모습은 아무도 볼수 없습니다. 오늘 같은 날, 지리산을

찾는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할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주능선을 밟아 보면 지리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수도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지리산이 큰 산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민족의 한숨과 회한이

베인 산... 맹목적 신념의 포로가 되어 지리산에서 숨져간 수많은

젊음의 무덤이기 때문이죠. 젊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데올로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가 흠뻑 스민 산이 지리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어서 함께 죽어간 국군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리산의 흙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먼저 간 그들 처럼 하나가

될수 있다면... 영호남이 없고, 남과 북이 갈린 세상 또한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한민족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그런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 나라를 소망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요...


무릎높이까지 차오른 눈더미를 헤치고 만복대를 향해 오릅니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만복대를 향하여

오르는 모습은 비장하다 할 것입니다. 흡사 히말라야의 봉우리를

눈앞에 둔 전사의 모습을 방불케 합니다. 적어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는 만복대를 향해 갑니다.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무척 낮습니다.

윈드스토퍼와 자켓을 껴입었는데도 한기가 몰려 옵니다.

한발한발 힘들게 오르지만 결국 만복대를 알리는 표지판 앞에

섰습니다. 표지판을 가만히 껴안아 봅니다. 너무도 행복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옵니다. 내년 한해 만복을

받을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 그런 생각으로 만복을 기원합니다.

고통 앞에 인간은 이렇듯 단순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지리산의

그 많은 의미는 만복을 기원하는 형이하학적 사고 앞에서 스러지고

맙니다. 그렇기에 만복대에 휘몰아친 눈보라는 분명 서설(瑞雪)

입니다. 만복대에서 보내는 음력 섯달 그믐날. 새로운 한해를 맞이

하는 시작입니다. 분명 내일 아침에 뜨는 태양은 오늘과는 다를

것입니다. 희망을 가득 안고 만복을 담아 올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는

분명 너무 솔직한 감정입니다. 그동안 하루하루를 의미없게 보낸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살았는데... 만복대에서 생각하니까 의미없던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소망의 내일을 준비하기

때문이죠. 기다림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죠. 때문에 만복대를더 편하게

오를수 있는 봄날도 멀지 않을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세 시간

남짓의 고통에서 얻은 성과치고는 너무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나는 새봄이 오면 다시 만복대를 찾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출발했던 원점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느끼게 될 고통이 다시 기다려 집니다. (끝)

  • ?
    moveon 2002.02.14 14:06
    아름답고 숭고한 한편의 드라마 같은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
    솔메거사 2002.02.15 14:38
    읽는이에게 닥아서는 뭉클한 멧시지가 있는 流麗한 산행기, 잘 대하고 있습니다..
  • ?
    최성문 2002.02.21 13:23
    영혼이 깃든 님의 글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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