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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기 (4) - 아아, 천왕봉!

나이 들면 ‘밥심’으로 산다더니... 망바위에서 새참을 먹고 나니 거짓말같이 힘이 솟았다. 기껏 멸치와 마늘장아찌 그리고 김치 몇 조각을 반찬으로 해서 먹은 밥인데 그 밥이 심(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장터목을 향해 오르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내친 김에 천왕봉까지 뽑을까?”
“아니요. 점심을 먹고 올라가는 것이 나을 거 같아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더니 맞아. 당연히 천왕봉도 식후경이렸다. 점심은 라면으로 하기로 했잖아. 그럼 라면을 끓일까?”
“아니요. 밥을 먹어야 해요. 밥이요. 라면 먹고는 천왕봉 못 올라가요.”
“그럼 지금 밥을 하자고?”
“그래요. 그런데, 밥 보다 더 급한 게 있어요.”
“뭔데? 화장실?”
“아니요. 너무 잠이 쏟아져요. 잠 못 자게 하는 것이 고문이 되는 걸 확실하게 알겠네요.”

장터목 대피소 중앙 홀. 우리처럼 곤한 사람들이 잠시 눈을 붙이도록 마련해둔 곳이다. 여기저기서 가늘게 들리는 코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시 낮잠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밥 먹자.”
“몇 시죠?”
“음, 12시.”
“잠깐 눈 붙인 것 같은데 30분이나 지났다구요? 우리, 라면 말고 다른 것 해 먹어요.”
“그래. 육개장 해 먹을까?”
“좋아요. 햄을 좀 넉넉하게 넣어요. 기운이 나야 하니까.”

오후 1시 10분.
잠도 조금 보충을 했겠다, 밥도 넉넉히 먹었겠다. 게다가 배낭까지 장터목 대피소에 맡겨둔 채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희망의 길이었고, 행복의 길이었다.

“장터목라고 하면 예전에 여기 장터가 있었다는 말인데 이 산중에 웬 장터가 있었을까요?”
“옛날 천왕봉 남쪽에 있는 시천(矢川) 마을 사람들과 북쪽에 있는 마천(馬川) 마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여기 모여서 장을 열었다는 거야. 물론 물물교환을 하던 장소였겠지.”
“시천의 특산물과 마천의 특산물을 바꾸었겠죠? 그게 뭐였을까요?”
“글쎄, 낸들 알 수 없지...”
“저기 좀 봐요. 아직도 철쭉이 곱게 피어 있어요.”
“워낙 높은 산이라 여긴 아직도 봄인 모양이야. 그지?”
“그런데 저게 뭐죠? 해골처럼 생긴 나무들이 많이 서있네요.”

안내판을 보고 고사목에 얽힌 기절할 사연을 알았다.
제석봉은 아름드리 구상나무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울창창하던 곳이었단다. 그런데 50여 년 전, 자유당의 어떤 귀하신 분이 그 근처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아름드리 나무들을 벌목을 했다고 한다. 그게 문제가 되기 시작하니 그 벌목의 증거를 없애려고 아예 제석봉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불탄 구상나무들이 그 모습 그대로 50여 년 동안 제석봉을 지키고 있단다.
요즘도 그와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인데 하물며 50년 전에랴... 세상엔 늘 그런 일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지리산은 늘 말없이 그런 인간들을 감싸고 있다.

“제석봉엔 옥황상제가 사는 곳이 아니던가요?”
“제석(帝釋)은 불교에 나오는 신인데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에 살고 있다고 하지. 우리나라에서 제석이라고 하면 옥황상제를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러니까 옥황상제가 사는 곳이 틀림없지.”
“그럼 제석봉의 옥황상제는 그런 나쁜 놈들을 가만히 놔둔단 말인가요?”
"......"

제석봉을 지나 통천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천왕봉에 이른다. 하늘로 오르는 문이 쉬울 리가 없는데 영악한 인간들이 만든 사다리 덕분에 쉽게 걸어서 하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록 고사목들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천왕봉에 이르는 길은 비단 폭에 그린 한 폭의 그림이었다.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
해발 1915미터에 세워져 있는 돌비석에는 ‘한국인의 기상은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음각으로 세워져 있다. 그 뒤에는 ‘천왕봉’이라고 새겨져 있고...
천왕봉 일출이 지리산 10경 중에 1경이라고는 하나 그 일출을 보려면 3대 동안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하니, 나 같은 속인이 어찌 천왕봉 일출을 기대하랴. 한 낮에 떠 있는 태양만 쳐다 볼 수 있는 것도 과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기대하고 새벽에 천왕봉을 오르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안분지족하고 새벽 일출맞이는 그만두기로 했다.

“저어기 저 끝에 희미하게 먼 곳이 노고단인 모양이네요. 저길 우리가 갈 건가요?”
“그래요. 그 오른쪽 앞에 사람 엉덩이 같이 생긴 봉우리가 반야봉인데 거기도 올라갈 예정이고... "
"정말 노고단까지 갈 수 있을까요?"
"노고단까지 여기서 25.5km라고 하니 멀기는 멀지만 한 걸음씩 가다보면 못 갈 것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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