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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6.12.19 16:40

잃어버린 30분 - 2

조회 수 3158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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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돌린 후 일행들에게 늦은 시간을 상기시키며 사태지역을 내려선다. 군데군데 위험스럽긴 하지만 이런 지역 경험들이 있어서 그리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첫 번째 합수점에서 폭포를 우회한 뒤로 정리되지 않은 계곡을 요리조리 피해 나갔다. 때론 사태진 비탈을, 때론 작은 폭포를, 때론 계곡사이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거목 타넘으며 나아가지만 속도는 나질 않았다.

한여름을 달구던 태양도 능선 너머로 숨어버리고, 뉘엿뉘엿 땅거미가 떨어지는 시간, 허방다리처럼 제법 큰 폭포 하나가 길을 막는다. 사람을 모은다. 이제 빠른 걸음은 소용이 없다. 모두 같이 행동해야하는 시간인 것이다. 남아있던 행동식을 털어 넣고는 길을 재촉한다.


[잃어버린 30분]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고도는 제법 높아보였지만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모퉁이쪽 홀드를 잡고 발을 아래로 내렸다. 첫 스탭의 스탠스는 양호했다. 그런데 다음이 문제였다. 아니 문제가 있었다가 보다는 마음이 흐트러진 것이었다. 위쪽 홀드를 하나 놓았으나 마땅히 잡을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왼발 스탠스를 옮기는 순간 중심이 흐트러진다. 몸의 중심은 이미 이동해 있었는데 발이 늦게 빠진 것이다. 황급히 런치동작으로 홀드를 챘으나 잡히지 않았다. 아차다 싶은 것은 순간, 몸이 그 상태로 아래로 흘렀다. 그 짧은 순간에 배낭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벽등반하다 떨어져 칼카니우스가 깨지는 바람에 3개월 병원신세를 진 경험이 있는데다가 그 상태로 떨어지면 크던 작던 다리쪽 부상은 피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바로 달포 전 내변산 가마소골에서도 물기있는 바위틈에 놓았던 스탠스가 미끄러지면서 나동그리질 때도 배낭으로 떨어지면서 스틱이 충격을 흡수하여 부상을 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시 공중에 몸이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후론 기억이 없다. 내가 어떻게 떨어졌는지, 어느 부분이 먼저 땅에 닿았는지, 바운딩은 한 번으로 끝났는지... 다만 셀 수도 없이 많은 장면의 꿈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동행자 1]

내 바로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산악회 후배이다. 지리산 아래가 고향이며, 90년대 초 북미최고봉 데날리를 등반하였고, 95년에는 우리와 같이 파키스탄 히말라야 미답봉 루프가르사르(7,200m)를, 97년에는 낭가파르밧(8,125m)을 등반한 적이 있는 산꾼이다. 지금도 고향마을에 살고 있고, 지리산민간구조대원이다.

몸이 기우뚱 하는 순간 형이 내 발 앞에 있던 홀드를 채려고 상채를 일으켜 팔을 뻗었다. 내 생각엔 그간 경험으로 보아 충분하리라 생각했으나 홀드를 잡지를 못했다. 어! 하는 순간 나를 쳐다보는 형의 얼굴에는 왠일인지 떨어지는 두려움보다는 여유로운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보통 그 상태라면 그대로 바위벽에 붙어 미끄러지듯 떨어지는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형은 미끄러지는 듯 하던 몸이 갑자기 뒤로 돌면서 바위를 벗어나더니 바위를 퉁겨져 나갔다. 자연스러운 미끄러짐이 아닌 뭐가 새로운 힘이 가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놀란 가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바위 안쪽 안전지대에 서있어서였는지 마지막 바닥에는 어느 부분이 먼저 떨어졌는지 기억이 없다. 황급히 내려와 보니 의식이 없었다. 의사가 있으니 우선 응급처치를 하고 기다려 보다 최악의 경우 구조대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핸드폰이 터질리는 만무하고, 백무동까지 나가 구조를 요청하느냐, 아니면 여기 있는 나머지 사람 세명(여성대원 포함)이 수송을 하느냐 하는 힘든 결정을 해야 할 것 같다.


[동행자2]

역시 산악회 후배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전문의다.

동식이(동행자1) 뒤에 있어서 형의 떨어지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었다. 전체 높이는 약 6m정도 되는 듯 하다. 내려가 보니 기도는 열려있었으나 의식이 없었다. 떨어진 바닥은 물웅덩이 옆으로 조그만 자갈들이 폭포의 소용돌이에 밀려 모여 있는 곳이었고, 머리는 우측 바위벽 쪽에 있었다. 우선 배낭을 벗기고 몸을 옮기지 않고 안정된 자세로 눕혔다. 외상을 찾아보니 우측 귀 뒤쪽과 턱부분에 싯긴 듯한 흔적은 있으나 깊지 않았고, 골절이나 특별하게 충격을 받은 곳이 없어 보였다.

혹시 모를 머릿속 부상을 염려하여 살펴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동공을 확인하기 위하여 눈꺼풀을 열었으나 풀려 있었다. 심각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 렌턴을 꺼내어 다시 비춰보니 눈동자가 중앙으로 돌아왔다. 일단 심각한 상황까지는 아닌 것 같아 스스로 정신이 들 때까지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동식이와 최악의 경우에 대하여 상의 하였으나 두 가지 방법 외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약 30분정도를 기다리니 의식이 돌아왔다. 일어나려는 형을 모래밭 쪽으로 옮겨 다시 안정을 취하도록 눕혔다. 10분후 몸을 일으키는 형에게 몇 가지를 질문하였으나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우선 어둠이 내리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 정확한 검사를 해봐야 될 것 같았다.


[동행자3]

여성으로 우리산악회 후배이다. 2004년 우리와 같이 중국 오타이나(5,200m)를 등정했다.

사고가 났다는 말에 바위 끝으로 가보니 형님은 의식이 없는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발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고, 두려움이었는지 심각함때문이었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부상자를 앞에 놓고 두 형들은 뭔가를 하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도와줄 일이 없다. 산악회에 들어와 지금껏 뒤만 쫒아 다닌 내가 야속하기까지 하다.


[추정해 보는 종합상황]

홀드를 놓치는 순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의식적 감각이 일어났던 것 같다. 배낭으로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뒤로 돌려 아래를 확인하고 바위를 밀어내며 튕겨지듯 뒤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배낭이 먼저 지면에 닿은 것으로 보이며, 스틱이 부러진 것을 보면 손에 쥐고 있던 스틱으로 충격을 한 번 흡수 한 것 같았다. 머리 상처가 없고 안면상처가 갚지 않은 것은 스틱이 지면에 꽂혀 부러지면서 중심이 앞으로 쏠려 오른쪽 얼굴이 바위에 부딪친 듯하다. 의식을 잃었던 것은 충격을 받았던 귀 뒷부분이 급소였던 까닭이다.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 무수한 꿈을 꾸었지만 의식이 돌아오고 일행들과 대화하는 순간에 꿈은 그야말로 꿈처럼 사라졌다. 편안한 자리에 옮겨와 잠시 안정을 취한 후 괜찮다 싶을 즈음 시간을 물어보니 40분이 흘러 있었다. 땅거미는 이미 내 눈 앞을 어른거렸고 어슴프레 장막이 밀려왔다.



일행을 부추겨 자리를 털었다. 꾸물거릴만한 자리도, 여유를 가질 시간도 아니었다. 어둠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헤드렌턴의 베터리를 교환하였다. 일행들이 괜찮겠느냐 배낭무게를 줄이자 제의해 왔지만 사양했다. 어느 부위가 특정하게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걸음도 지장이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인적마저 희미한 계곡길을 찾아내려온 다는 자체가 무리수를 둔 것이었지만 그것은 이 긴 터널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 일행들의 걱정스런 짐이라도 하나 덜어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어둠의 터널은 생각보다 길었다. 시간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것은 마음보다 욕심이 앞선다는 증거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시간, 길을 읽어내는 시간, 다시 확인하는 시간, 그 구간을 벗어나는 시간... 한 구간 구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느 때부턴가 고질병처럼 따라다니던 왼쪽관절이 다시 몽니를 부렸다. 걱정꺼린 하나 더 늘었지만 드러내지도 서둘지도 않았다. 두어번 인적을 놓치긴 했지만 일부러 흔적을 다시 찾아 길을 이어갔다. 그 시간 적어도 내 이성은 이 골짜기에 떠도는 영혼이 있어 검은 손길로 우릴 유혹하거나, 장난을 칠 요량이었다 하더라도 절대로 받아들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치도 않았겠지만, 오늘 내가 안긴 지리의 품은 따뜻할 것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신계곡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짧은 길을 돌아 온 듯 멀게만 느껴졌던 계곡은 거기서 그대로 서로만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름길 입구를 찾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헤드렌턴 불빛 하나로는 그 너른 계곡의 어느 자리를 건너 어떤 바위모퉁이를 돌아 첫 입구를 찾아야 하는지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아래쪽으로 향하는 일행을 따르다 작은세계골 입구까지 내려선 것을 확인하고는 슬랩바위 뒤쪽을 차고 올랐다. 주 등산로였다. 일행들을 향해 에코를 넣었다.

너른 길을 따라 백무동에 도착한 시간이 22시.
막 닫으려는 첫 가게주인을 불러 맥주를 시켰다. 단 숨에 넘어가는 짜릿함에 나도 모르는 카타르시스가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야, 고생한 내 머리통 어디 새는디 있는가 봐라”

잃어버린 시간은 있었지만 살아왔다는 뜻이었다. 일행들의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숨처럼 긴 담배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연기나는데는 없냐?”

모두 푸하하 웃어버렸다.

  
- 구름모자 -



  • ?
    타타타 2006.12.19 21:34
    천만 다행입니다....^^
  • ?
    슬기난 2006.12.19 21:47
    “연기나는데는 없냐?”
    긴장 끝에 같이 웃음을 띄움니다!
    깊은 산속에서 조심,또 조심하여야겠습니다.

  • ?
    오 해 봉 2006.12.20 00:00
    그만한게 천만 다행 이네요,
    산에서 다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안타깝고 조심스러워 지드군요,
    구름모자님 안전산행 하세요,
    타타타님 슬기난님도요,
    산행중에 취할정도로 목운동 하는일은
    우리모두 자제키로 하지요.
  • ?
    여인 2006.12.21 07:44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읽었습니다
    큰 사고 날 뻔 했음에도 정말 천만다행 이었습니다
    맥주와 연기가 새지 않아서.ㅎㅎㅎ
  • ?
    하해 2006.12.21 12:52
    아찔하고 서늘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한동안 뜸하셨는데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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