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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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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변규화님의 타계를 안타까워하면서, 국제신문 6월26일자 '최화수의 세상읽기'에 올린 글입니다. '봉명산방 봉명선인 30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최화수]

                    지리산의 빈 자리

지리산의 큰 등불 하나가 꺼졌다. 불일폭포 불일평전 오두막의 봉명선인(鳳鳴仙人, 본명 변규화)이 이달 중순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나갔다. 지리산 8경의 하나로 1년 365일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는 불일폭포. 30년 세월을 하루같이 이 폭포를 지켜온 변규화는 '지리산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이 뜻밖의 부음이 불일폭포를 한 번이라도 찾았던 이들에게는 큰 충격이 되리라.

불일평전 오두막에 그이가 정착한 것은 1978년 10월1일, 올해가 30돌이 된다. 칠순 잔치를 겸한 오두막 30돌 축하 모임을 갖겠다던 그이가 3개월을 앞두고 영면한 것. 강산이 세 번 변한 세월을 풀과 나무처럼 자연인으로 한결같은 삶을 살았다. 지리산을 찾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에의 진정한 사랑을 심고 가르쳐온 그이다.

남명 조식과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청학동(靑鶴洞)'으로 보았다. 그래서 작가 정비석은 불일 오두막을 '봉명산방(鳳鳴山房)'이라고 명명했다. 도올 김용옥이 쌍계사 국사암에 머물 때는 매일아침 이 산방을 찾아와 열변을 토했다. 국악인 박범훈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불일폭포보다 '봉명선인'과의 대화를 더 즐겼다. 지리산에서 담론다운 담론을 펼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고마움, 그것이 큰 행복으로 남아 깊은 산 한 자락에 초막을 엮어 삶을 즐기며 살아간다"-그이의 '산거일기' 한 대목이다.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10년간 토굴 수도와 승려생활을 하고 '자연'에 귀의했다. 지리산의 한 포기 풀, 나무가 되어 '자연 사랑의 전도사'로 일관한 것.

지리산 불일폭포는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장마철로 접어들며 수량이 늘어 경관이 한층 더 신비롭다. 오랜 기간 빈터로 있던 곳에 불일암(佛日庵)도 복원해 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닦고 둘러보아도 청학이나 백학(白鶴)은 간 곳없이 사라졌다. '봉명선인'이 떠난 자리가 이렇게 엄청나고 허전하다니…!

지리산이 전란의 악몽을 떨쳐내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 어언 반세기. 그 사이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자연을 사랑한다고 떠들면서 자연을 얼마나 학대했는가! 그 와중에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를 외치며 지리산에 대한 외경심을 심느라 평생을 바친 이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전란 이후 지리산 등산의 길을 열어준 선각자로는 부산의 신업재, 전남 구례 우종수, 경남 산청의 조재영 등을 들 수 있다. 신업재는 1947년 1월 노고단 스키대회에 이어 전후 최초의 지리산 종주를 한 데 이어 로타리산장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우종수 조재영은 지리산 등산로 개척과 지도 제작 등에 큰 공헌을 했다.

'노고단 호랑이' 함태식, 세석고원의 '산신령' 우천 허만수가 심은 '자연 사랑'은 신화적이기까지 하다. 부산의 성산은 '천왕봉 당일 등정'과 법계사 초막에 '사랑의 전설'을 남겼다. 부산의 김경렬은 칠선계곡 학술조사를 비롯, '다큐멘터리 르포 지리산' 등 저술활동을 통한 지리산 인문사적 규명에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

하지만 이들 '지리산 선각자'가 하나 둘 세상을 등지거나 노령 등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다. 그들이 물러난 빈 자리가 엄청나게 크다. 노고단 세석고원 문창대 등에 이어 불일폭포도 썰렁하기만 하다. 만인의 귀감이 될 그들의 지리산 사랑과 열정, 하지만 온갖 소음과 분탕질이 귀중한 발자취를 지우고 있어 안타깝다.

더 늦기 전에 '지리산 선각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기념관'이라며 빨치산 토벌 전적물이나 전시하는 것이 지금 현실이다. 그도 모자라 산길에 빨치산 마네킹을 세워두다니…! 이건 아니다. '지리산 사랑'에 평생을 바친 선각자들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재현, 지리산 사랑의 표상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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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운무 2007.06.27 22:05
    실천적 자연 사랑의 삶을 새겨보며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널리 불특정 대중 다수에게도 객관적으로 어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 다음에야 기념관 건립은 신중해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처음엔 의욕적으로 시작한 기념관들이 관심과 관리의 부재로 썰렁하니 오히려 만들지 아니함만 못한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자연스레 물이 흐르듯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다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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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생마 2007.06.30 23:03
    지리산 선각자 분들의 발자취를 기리는 기념관...
    그 기념관에는 여산선생님도 들어가야 하겠지요.
    크지 않더래도 의미있게 잘 세우면 좋을듯 합니다.
    우리 후배들이 해야할텐데요. 저야 떠돌고 있지만
    오브넷의 쟁쟁한 분들께서 훗날 꼭 할것이다 생각됩니다.
    많은 얘기, 자료를 오브넷에 잘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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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7.07.02 05:02
    '지리산 사랑'에 평생을 바친 선각자들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재현, 지리산 사랑의 표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여산 선생님의 뜻에 전적 동감합니다 전란의 역사를 이은 터에 지리산의 평화를 선도한 선각자님들의 기록이 새로운 문화로 지리산을 지켜갈 일에 여산선생님의 기록 자료 또한 소중하십니다 오브넷의 큰 염원하나 성취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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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7.07.02 05:06
    여산 선생님! 본문을 '불일폭포 이야기편'(하동송림-그곳에 가고싶다방에 좀 올립니다 양해를 바라오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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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7.07.02 05:19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역사적인 깊은 의미의 지리산 민족 의 영산 지리산을 이해하는데 분명 20세기 지리 선각자들의 자취는 역사문화의 현실로 새겨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故 하성목 작가같은 사진 영상도, 여러 산행기 글등 기록 문화로 어엿한 전시관으로 서서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대가 꼭 이루어 놓고, 늦었지만 시작해야 할 일인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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