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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1988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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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 앞에서 장당골과 내원골의 두 계곡물이 합쳐진다. 사찰 바른쪽이 장당골이고, 왼편이 내원골이다. 장당골은 아주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길게 이어지지만, 내원골은 이른바 '황금능선'을 향해 가파르게 치닫는다.
내원골에도 광산 개발을 위한 산판도로가 나있었는데, 요즘은 안내원부락까지 시멘트 포장이 돼 있다. 내원골은 입구 쪽에 우성구씨 집 등 몇 가구가 있고, 위쪽 배양이마을에 몇 가구, 마지막으로 안내원에 또 몇 가구의 집이 있다.
안내원부락은 내원사에서 3.5㎞, 해발 800미터에 자리한다.

산줄기 사이로 좁다랗게 이어진 내원골은 마지막 마을인 안내원부락을 지나면 의외로 드넓은 분지를 좌우편에 두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사찰이 자리하여 '절터골'로 불렸다. 내원사에 안치된 보물 비로자나불상도 이 절터골에서 발굴된 것이다.
안내원부락은 지리산의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경작할 땅도 좁은데다 자연풍광이 수려한 곳도 아니다. 지난날 화전민들이 눌러앉은 곳으로 10년 전까지만 해도 10여채의 윤판집이 전부였다. 주민은 산죽을 끊어와 조릿대를 만드는 등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필자는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 안내원부락을 비교적 자주 지나쳤다. 그 때는 삼장면사무소 소재지 대포리에서 걷기 시작, 이 마을을 지나 국사봉(?)까지 다녀오는 당일산행을 주로 했었다.
안내원부락은 언제나 잠자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어쩌다 주민이 눈에 띄기도 했는데, 우리가 접근하면 금세 모습을 감추고는 했었다. 외지인과의 대화마저 기피하는 듯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이 마을을 지나치면서도 '망실공비 2인부대'로 유명한 정순덕(鄭順德)의 생가를 확인하지 못 했었다.

지리산의 깊은 산간마을에는 나름대로 어떤 매력이나 특징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심원마을은 원시림과 청정계류를, 오봉마을은 산간오지의 정취가, 삼정마을이나 새재마을은 주능선 등산구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안내원부락은 무엇이 특징인지 얼핏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른 곳과 달리 주민들이 외지 내방객과 대화를 기피하는 것부터 그러했다.
오봉, 새재, 삼정마을에 '민박' 간판이 내걸렸을 때도 이곳 안내원부락은 민박이란 말조차 몰랐다. 민박을 받을 만한 제법 반반한 집조차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안내원부락은 정순덕의 생가가 있는 고향마을이고, 그녀가 13년 동안에 걸친 재산(在山)투쟁을 마감하고 사로잡힌 곳이기 때문이었다.
1955년 5월 지리산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는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 섬멸되었습니다'란 안내문을 내걸었다. 48년 10월 여순병란 이래 2만여명의 빨치산과 인민군이 맞아죽고 굶어죽고 얼어죽고, 군경토벌군 수천명도 희생된 끝에 지리산이 평화를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안내원부락은 결코 '평화의 지리산'이 아니었다.

안내원부락 출신 정순덕은 홍계리 출신 이홍희(이)와 '2인부대'로 여전히 지리산을 누비고 다니며 그로부터 8년을 더 용맹(?)을 떨쳤다.
정순덕 이홍희의 재산투쟁은 1963년 11월18일 한밤중 잠복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이 안내원부락에서 비극적으로 마감된다.
그때까지 이 '망실공비 2인부대'는 쌍계사 뒤편 화전 농막 일가족 살해, 안내원부락의 형제 가족을 몰살시키는 등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마을 주민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엄청난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1962년 10월10일, 안내원부락에선 엄청난 유혈참극이 빚어졌다. 형제간인 정위주 부부, 정정수 부부와 정위주 아내 뱃속의 아기까지 다섯 목숨이 정순덕 이홍희에 의해 학살됐다.
정순덕은 고향마을의 정위주씨 형제를 위협하여 생필품 구입과 정보를 얻는 끄나풀로 이용했었다. 이 정씨 형제가 변심, 정순덕을 사로잡으려다가 도리어 희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순덕 이홍희는 또다른 주민 끄나풀인 성수복씨의 밀고로 삼장지서 김영구 박기수 두 경찰의 총격 세례를 받고 13년 재산투쟁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유혈이 낭자했던 산중오지 안내원 부락의 상처는 아직도 씻겨지지 않고 있다. 마을 입구에 '구들장 아지트'며, '정순덕 생가터' 표시가 내걸려 있다. 하지만 지난날의 윤판집은 폐가로 버려진 한 채만 남겨두고 모두 철거되고 없다.
그 대신 웬 고래등과도 같은 2층 집들이 들어섰다. 집이 어떻게나 큰 지 무슨 특별한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높은 곳에 왜 이처럼 대형주택들이 들어섰는지 아리송하다.
이런 집들은 정순덕의 지리산 투쟁에 대한 상상마저 흔들어 놓는다.
(지난 2002년 9월22일에 쓴 글입니다-최화수)  
  • ?
    오 해 봉 2007.10.03 22:52
    다시 읽어봐도 흥미롭습니다,
    여산선생님 칼럼과 정충제님의 실록 정순덕을 읽어보고
    재작년 ofof.net 노고단 모임후 안내원마을에 가봤습니다,
    길이 너무협소해서 오르고 내려오면서 차를만날까 걱정도 되드군요,
    그동네 아주머니께서 삼복에도 이불을 덮고잔다고 하드군요,
    10,20일 ofof.net 설악산 모임에 여산선생님이 와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사랑방에 공지되면 리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
    최화수 2007.10.04 18:22
    오해봉님!
    10월20일에는 경북수목원 등을 둘러보는
    답사 일정이 마련돼 있어 불가능합니다.
    지리산에서 만날 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악산 모임 즐겁고 유익하길 바랄께요.
  • ?
    김용규 2007.10.05 21:40
    빨치산 정순덕! 순수한 산골 새색시! 평범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아주 대조적인 의미일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그 그토록 산골 새색시에게 가혹하리만치 덫을 놓아 다치게 했을까요? 이면에 가리어진 인간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게 하는 사례라 할수 있겠네요. 흑과 백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로 한 인간을 잔인하게 말살시킨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정순덕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지리산 아래에서 자라면서 순딕이 온다 하면 아주 무서운 말로만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아무 의미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편이냐? 저편이냐? 상황이 돌변하면 흑백의 논리로 단순하게 인간을 평가를 해 버리는 요즘의 정치 논리와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어찌되었건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던 극한 상황에서 실존 현대판 로빈손크루소가 되어야 했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정순덕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그분에 대한 동정적 측면과 잔인한 측면 어느것도 함부로 옳다 그르다를 결론내리기 힘든, 영원한 21세기의 전설의 주인공처럼 여겨집니다.
    지리산을 사랑하시는 분들께서는 지리산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모르고서 지리산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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