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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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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은 작고 빈한한 암자이다. 그런데도 안온하고 정갈한 느낌이 앞선다.
암자 뒤편을 둘러싼 벼랑 바위와 뜰에서 건너다보고 내려다보는 지리산의 자연 풍광이 마치 숲의 망망대해를 보는 것 같다.
봄철에는 온갖 산꽃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고, 녹음기에는 푸른 숲이 파도처럼 멀리서 몰려오며, 가을에는 단풍이 날마다 뜨거운 불을 지피고, 겨울철엔 적막한 정적 속에 나목의 가지마다 침묵의 눈꽃을 피운다.

이 암자는 서쪽의 천인굴(일명 천용굴)에 바짝 다가서 세워져 있는데,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1,000명이 피난했다고 하는 얘기도 있으나 확인이나 조사가 되지 않았다.
겉보기로는 결코 큰 굴 같지가 않다.
현재는 입구 한편의 두터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받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약수 보시를 하고 있다.

암자가 세워질 때는 그 터가 명당이거나 여러 가지 유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수암은 옛 자취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스님에게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그것이 누구에게나 어떤 감동과 같은 여운을 안겨준다.
영원사에서 영원스님과 청매스님, 그리고 각운선사를, 상무주암에선 지눌(보조국사)과 무의자(혜심), 대혼자(무기) 스님을 생각하게 된다.
지난날의 고승 또는 괴짜 스님의 특별한 일화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여러 가지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오솔길을 따라 문수암에 닿고 보면,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도봉스님이 옛 스님 가운데 어느 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다.

도봉스님은 이 문수암에서 6년째 수도생활을 해 오고 있다. 그의 첫 인상에서 혜심스님(無衣子)이 쓴 차시(茶詩)를 저절로 떠올렸다.

'오래 앉아 피곤한 긴긴밤 / 차 끓이며 무궁한 은혜 느끼네 / 한 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 / 뼈에 사무치는 청한(淸寒) 모든 시름 사라지네.'

스님은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은 듯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그냥 깡마른 얼굴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청한'한 느낌의 이 스님에게서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게 되어 몇 해 동안에 걸쳐 여러 차례 삼정봉의 이 코스를 따라 문수암을 찾았다.
스님도 이제는 필자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러나 서로 이름을 물어본 일도 없고, 별다른 대화를 나눈 일도 없다.
그저 필자가 길을 물어보았거나, 스님이 오미자 열매를 말리며 차 이야기를 잠깐 들려주었을 뿐이다.

문수암의 좁은 뜰을 지탱해주는 사람 키 높이의 석축 아래에 너비 1미터 남짓한 좁다란 밭이 뜰의 길이만큼 이어져 있다.
가을철에 문수암을 찾게 되면 발 아래로 불붙고 있는 단풍도 단풍이지만, 축대 아래의 좁다란 밭에서 성장한 무가 대단히 달고 깨끗하게 보여 눈길을 끈다.
시골에서 성장한 듯한 한 등산객이 이 고랭지 무를 쳐다보며 감탄을 했다.
"아유, 저 무 좀 봐! 한 입 깨물었으면 꿀맛일 것 같애!"

그러자 스님이 활짝 웃으며 말한다.
"맞아요. 서리를 맞아 아주 꿀맛입니다. 비료도 농약도 뿌리지 않았으니 마음에 드는 놈을 뽑아 드시오. 저 오솔길을 따라가며 무 베어먹는 맛도 괜찮을 거요."
"정말 뽑아먹어도 괜찮겠어요?"
"거짓말을 왜 합니까. 여기 계신 누구라도 좋아요. 제가 마음놓고 권할 것은 저것밖에 없으니까 모두 마음껏 뽑아 가세요."
머뭇머뭇하던 등산객들이 무 한 뿌리씩을 뽑아들고 즐겁게 떠들면서 멀어져 간다.

"이곳에는 밭이라곤 달리 보이는 것이 없는데, 아무나 함부로 뽑아가게 하면 어쩌지요?"
필자가 스님에게 물어보았다.
"하기는 이 무가 내 농사의 전부요. 그래도 남이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은 곧 나의 기쁨이지요. 선생도 망설이지 말고 한 뿌리 뽑아가시오. 이 무는 정말 맛이 좋습니다."
이 높은 곳에서 홀로 수행생활을 계속하노라면 여러 가지로 궁핍하고 아쉬운 것이 많을 텐데도 그는 베푸는 것에서 이미 넉넉한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한번은 필자 일행이 암자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스님이 크게 기뻐하며 환대를 했다.
"정말 오늘은 때를 잘 맞추어 왔어요. 여러분들께 오미자차를 대접할 수 있어서 아주 기쁩니다."
스님은 큰 주전자와 사발을 우리들 앞에 내놓았다. 주전자에는 오미자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스님의 말이 걸작이었다.
"오늘 군수영감께서 이곳에 찾아오신다는 전갈이 왔어요. 그래도 고을의 어르신이고 모처럼의 행차이신데 드릴 것이 무엇 하나 있어야지요. 곰곰 궁리해보니 저 바위 벼랑에서 따낸 야생 오미자로 차를 끓여 대접하는 길밖에 없겠구나 했지요."

스님의 말은 또 이렇게 이어졌다.
"그런데 차를 끓이다 생각해보니 군수영감만 드리고 지나가는 등산객에겐 내놓지 않는다면 이것도 참 곤란한 노릇이란 말씀이오. 음식에 사람 차별이 있을 수 없지 않겠어요...에라, 있는 것 죄다 끓이자, 하여 이처럼 큰 주전자에 끓였소. 그러니 실컷 드시오. 실컷 마셔도 군수영감님 드릴 것은 남을 테니까."
필자 일행은 스님의 말이 우습기도 하고,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도 같아 찻사발을 거푸거푸 비웠다.

문수암에서 동쪽으로 건너다 보면 바로 금대산의 유서깊은 금대암이 보인다. 그 금대암 서쪽에 안국암이 있고, 그 높은 곳까지 도로를 개설하느라 산을 어지렵혀 놓은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그 길을 따라 자동차도 올라가고, 시멘트 전주도 올라가고 있다.
"스님, 전기가 없는 이곳에서 건너편 암자의 전깃불이 혹시 눈부시지는 않습니까?"
"허허허, 글쎄올시다.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지요."
스님은 침묵 속에 모든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는 수도하는 곳이오. 공부하는데 필요한 것이 뭐가 있겠소. 그런데 전기는 없어도 전화는 있어요. 산불이나 비상시에 신고하라고 군에서 그저 놓아주었는데, 쓸 일이 거의 없구만요."

스님은 6년째 외롭게 정진하는 수도승의 엄격함이나 어떤 거리감이 없다. 시골 마을의 인자한 이웃처럼 길손에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약수 한 잔이라도 마시고 가는 것을 기뻐한다.
수도승의 길이 어떠한지 필자는 그 깊은 세계를 모른다. 이판(선방)과 사판의 스님 세계도 잘 모른다. 그러나 문수암의 도봉스님은 이미 어떤 경지를 넘어서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얘기밖에 하지 않지만, 숲과 바람과 햇살과 물뿐인 높은 산속의 초라한 암자에서 그 모든 청한을 마음의 깨달음으로 바꿔 넉넉하게 살고 있는 듯하다.

"스님 옷이 몇 차례나 기웠는지 누더기 같아. 옷 한 벌 해 올리고 싶어."
한 여자 등산객이 문수암에서 삼불사로 내려가는 오솔길에서 일행에게 소곤소곤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

위의 글은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제3권 191~195쪽에 실려 있는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서울에 있는 다나출판사에서 초판을 펴낸 것이 1991년 5월20일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보다 1~2년 전에 국제신문에 같은 제목으로 225회에 걸쳐 매일 연재가 됐던 글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1989년 또는 1990년 초에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을 쓴 날로부터 어언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사이 문수암에는 전기가 들어가고, 필자와도 많은 일(사연)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변함이 없는 것도 있으니, 그것은 오직 하나, 도봉 스님이 해발 1,100미터의 빈한한 이 암자에서 청한의 수행정진을 계속하고 있는 사실이다.

엊그제 도봉 스님이 전화를 주셨다. 전화번호를 또 바꿨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문수암에서 가장 잘 바뀌는 것이 바로 이 전화번호이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게 된 이들이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오는가 하면, 친구며 친지들을 떼거리로 데리고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
스님이 전화번호를 변경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능히 짐작하는 필자는 또 한번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 ?
    산천 2008.01.28 17:45
    세속의 한 사람으로 불가에 귀의할 만한 모범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스님이 그저 높게만 보입니다.
    - 좋은 글, 깊이 감사드립니다 -
  • ?
    김현거사 2008.01.30 07:11
    제대로 수행하는 스님 보니 마음이 즐겁습니다.
  • ?
    東窓 2008.02.02 16:40
    수도자라고 하면 속세와는 담을 쌓고
    오직 구도에만 정진하는 것으로 연상이 되는데..
    도봉스님이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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