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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2744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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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아름다운 집 가운데 하나인 ‘쌍계별장’이 문을 닫았다. 쌍계별장은 원래의 도원암(桃園菴) 암자로 되돌아갔다. 대문에는 ‘쌍계별장’ 현판이 사라지고, ‘桃園菴’이라는 새 문패가 달렸고 ‘사찰 암자로 내부 수리중’이란 안내글도 내걸려 있다.

쌍계별장은 지난 70년대 이래 지리산, 특히 화개동천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겨운 쉼터이자 내집 같은 숙소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고즈넉한 산사분위기와 함께 처음 이 집을 열었던 할머니와 그 아들 내외가 베풀어주던 인정도 특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별장이 아니라 암자로 되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쌍계별장이 왜 암자로 되돌아간 것일까? 거기에는 무슨 사정이 있을까? 요즘 쌍계사 입구의 진입로 등 지도가 달라진 것을 보면 심상치않은 느낌도 없지 않다.

쌍계별장의 전신은 쌍계사의 도원암 암자였다. 그러니 원래의 도원암 암자로 되돌아간 것이 당연할(?) 것도 같다. 하지만 쌍계별장과 정을 쌓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쌍계별장이 그만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움을 넘어 안타깝기만 할 것이다.

쌍계별장과 관련한 추억을 ‘추억의 지리산, 사랑의 지리산’이란 이름으로 썼던 필자의 지난 글 가운데 일부를 아래에 옮겨본다.
........................................................................      

1976년 2월, 신혼여행으로 쌍계별장을 찾았지만 우리는 등산복 차림이었다. 지리산 여로를 소개해준 선배 박 아무개가 등산복 차림을 권했었고, 나 역시 등산복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여행가방 대신 배낭을 메고, 사전에 전화 한 통 없이 무턱대고 찾았는데도 쌍계별장 할머니는 마치 고향집을 찾은 자식을 대하듯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8폭 병풍을 두른 서쪽 별채의 큰 방을 내주었고, 가마솥 가득 물을 데워 얼굴도 씻고 발도 닦으라고 했다. 그리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산해진미로 그득한 밥상을 정성껏 차려주었다. 처음 보는 젊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런 칙사 대접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장작불 군불로 방바닥이 펄펄 끓는데도 구석구석 손을 대보며 따뜻한가를 확인했고, 비단금침을 내주었다. 신혼여행이란 말은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정말 신혼부부의 최고최대 환대를 받았다. 할머니가 어떻게나 말을 곱고 인정 넘치게 하는지 나는 다음날 아침 불일폭포에 오를 계획도 잊어먹고 뜰에서 정겨운 얘기를 나누었다.

당시 쌍계별장에는 고시공부를 하는 듯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은 할머니를 닮아서인지 모두가 처음 대하는 우리에게 친절했다. 신부가 카메라로 나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굳이 자신들이 찍어주겠다며 끝까지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중에 보니 모조리 실패작으로 사진이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박 아무개는 나에게 불일폭포를 찾은 뒤에는 칠불암과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 등을 찾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2박3일이 됐지만, 겨우 쌍계사 한 곳밖에 들리지 못했다. 부산까지 돌아가는 시간이 걱정되어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고 쌍계별장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쌍계사도 쌍계별장과 붙어 있어 겨우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계산을 치르자고 하니 할머니는 뜻밖의 말씀을 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 돈 안 받아도 되니 그냥 가요!" 나는 너무 놀라 그럴 수는 없다고 맞섰다. "저엉 그러면 집에 갈 여비를 빼고 남는 돈이 있다면 줘요." 할머니는 끝까지 숙식비가 얼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건넨 돈의 절반 이상을 기어이 되돌려주는 것이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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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화수 2007.11.12 17:29
    처음으로 사진을 올려보니 무엇이 잘 안 맞는지 바로 나타나지 않는군요.
    죄송하지만 파일을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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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窓 2007.11.12 20:57
    그렇잖아도 명문장가이신 여산 선생님의 따뜻한 글에 사진이 곁들여
    지니까 글이 더욱 빛나고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선생님의 좋은 글들을 접할 수 있음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
    하고 있답니다.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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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7.11.12 22:39
    여산선생님 글을읽고 저곳을 가본다 가본다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쌍계별장이 도원암으로 원위치 되었다니 서운합니다,
    31년전 그 신혼부부가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려,
    여산선생님 건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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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7.12.06 10:59
    여산선생님의 글에 추억의 쌍계별장 사진이 함께 오르니 반갑습니다
    축하드립니다 30 여년 쯤 전에 저희도 쌍계별장에서 이른 봄날의 숙박을 한 적이 있어 추억의 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쌍계사를 들리면 쌍계별장에 여장을 풀던 그 시절, 친정 친척집을 찾은듯이 오순도순 저녁전기불아래 봄나물을 다듬던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아침 세수하는 시간에 방방이 숙박객들이 나오면 아주머니는 낯선이들을 대강 소개 인사시켜 주셨는데 대부분 각처에서 오신 지식층 인사들 가족들이 었습니다 물론 저희는 서울에서 미리 예약을 하고 찾아서 큰 방을 선정받을 수 있었지요.선생님 덕분에 잊고 지내던 쌍계별장 추억이 새롭습니다 고맙습니다 쌍계별장 터 도원암을 새롭게 찾아보고 싶습니다 .오늘 이곳 엘리콧시티는 하루종일 눈이 하얗게 내려 12월의 정취를 느낍니다 6.25 직후 항도 부산에서의 학창시절 매섭던 구덕산 바람이 기억납니다 올해도 선생님의 좋은 글 찾아 오브넷으로 잦은 걸음하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여산 선생님 건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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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슬 2007.12.17 21:43
    어느 지인이 꼭 한 번 데려가고 싶다시던 <쌍계별장> 소식 잘 보고 듣고 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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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연 2009.02.04 12:32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울때면 가끔씩 들리곤 하던 쌍계별장이 없어졌다니 그 아쉬움에 코끝마져 시립니다.... 주인내외분들도 좋으셨는데
    지금은 어디로 가셨는지.....그 사랑채에서 들리던 새벽새소리도 이젠 들을수가 없음에 마음이 아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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