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위는 불일평전으로 오르는 오솔길의 나무 다리. 아래는 지난 4월19일 철늦은 벚꽃이 만개한 불일평전 불일오두막(봉명산방) 모습이다.
...........................................................................
지리산 사람들도 세월이 흘러가는 것은 막지 못하는가 보다.
늘 그 자리에 언제까지나 서있을 듯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는 것은 지리산 사람들이라고 하여 예외일 수가 없는가보다.
화개동천에 가면 늘 만나는 이들이 있었다.
영농단체 후계자 모임인 ‘칡넝쿨회’ 소속 청장년들이 술동이를 메고 달려와 푸짐한 화제의 꽃을 피우기도 했다. 화개동천이 녹차의 고향이다보니 녹차 명인들과 녹차를 사랑하는 인사들과 정담을 나누는 것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술잔과 찻잔을 나눌 때는 정겨운 얘기들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던가.
하지만 그들 가운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있다.
괴롭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다.
이 봄, 그들의 빈 자리가 유난히 크게 가슴에 와 닿는다.
화개동천의 달라진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어둡게 한다.
쌍계사 진입도로 뒤편으로 밀려난 쌍계 석문광장이 그러하다.
원래의 도원암(桃遠庵)으로 돌려주고 문을 닫아버린 쌍계별장! 쌍계별장이 문을 닫아 학처럼 살고 있던 윤석천 내외분도 만나보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슴을 뻥 뚫어놓는 이가 있으니 바로 불일평전 불일오두막의 변규화 옹이다.
내가 봉명산방의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12월 하순이었다. 그로부터 27년이 흐른 2007년 6월12일, 그이는 하동 진도 우리들병원 영안실에서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이가 불일평전에 입주한 1978년 10월1일, 30돌이 되는 날을 3개월 앞두고서였다.
‘봉명산방’의 ‘봉명선인’으로 신선처럼 살고 있던 변규화 옹.
그이도 역시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 것일까.
그러리라.
지리산중의 삶이라 하더라도 인간적 삶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지 않겠는가.
1980년 12월, 봉명산방의 변규화 옹을 만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도대체 몇 번이나 불일폭포 불일평전을 찾았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횟수는 셀 수가 없다. 마치 이웃집 마을 가듯이 그곳에 가고 또 갔었다.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냥 가보고는 했고, 그이도 나를 으레 그렇게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지난 4월19일, 나는 남해 금산에 올랐다가 시간이 조금 남자 불현듯 불일폭포 생각을 떠올렸다. 생각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화개동천으로 달려와 불일평전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너무 서둘렀는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봉명산방(鳳鳴山房)’에 닿았다.
불일평전 그득히 변규화 옹의 모습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니, 그곳으로 오르는 오솔길에도 그이의 체취가 생생하게 넘쳐나고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이.
그 아름다운 봉명산방 언제 한번 꼭 가보고 싶군요.
그런데 쌍계사에서 몇분 거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