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네집에서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 일행은 2차선 확장 공사를 하고 있는 도로를 따라갔다. 한수내 골짜기며 주변의 모습들을 지켜보기 위해 자동차는 두고 걸어서 가기로 했다. 두레네집 바로 뒤편에 몇 가구의 작은 동네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에 신촌으로 표시가 돼 있는 곳이다. 도로변에 자리한 집들의 돌담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두레네집 옆 한수내의 호안공사를 한 직각의 석축과 너무나 대비가 됐다. 사람의 손으로 원시적인 방식으로 쌓은 옛날 돌담의 정취가 새삼스럽게 비교가 되었다.
하지만 신촌마을 그 돌담은 그야말로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한수내 좌우편으로 흘러내린 왕시루봉 지맥들은 꽤나 날카로운 급경사 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파른 산비탈을 거의 남김없이 다랑이 논밭이 첩첩으로 포개져 있는 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논밭 하나하나는 돌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이것은 지리산 다랑이 논밭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아 큰 정자나무들이 서있는 송정리 본동(내한마을) 동구 앞에 닿았다. 20여세대의 집들이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마을의 특징 또한 돌담에서 가장 먼저 드러났다. 큰 바위나 비탈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돌담의 정취와 여유가 은은하게 풍겨났다. 아니, 한수내 양쪽의 석축은 정말 경탄할 만하였다. 큰 돌들을 얼마나 정교하게 쌓았는지, 튼튼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부산이 자랑하는 국내 최대 산성인 '금정산성'의 성곽도 이곳에 비교하면 너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마을 뒤편으로 끝없이 높다랗게 이어진 다랑이 논밭, 그 하나하나마다 장인(匠人)의 혼이 깃든 듯한 석축들이 군대사열을 받듯이 줄지어 서 있었다.
두레네집 이웃인 이곳 주민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그 다랑이 논밭들이 말해주는 듯했다. 지리산의 다른 골짜기의 경우 지난날 개간했던 이런 논밭을 일할 사람이 없어 대부분 묵혀두거나 한다. 하지만 이곳은 벼농사를 과수로 전환만 했을 뿐 그대로 버려둔 논밭이 없다. 심지어 엄청나게 높고 비탈진 곳에 캐리어를 설치, 기계장치로 물건들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이 마을은 집집마다 열심히 일을 하고, 그래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누리는 듯이 보였다. 지리산의 활력이 넘쳐나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한수내를 따라 걸어오르는데 비료 포대를 메고 오르는 한 할머니와 마주쳤다. 남자 일행 한명에게 그 짐을 대신 메드리게 하고 할머니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할머니는 올해 72세라고 했지만, 얼굴이 고와 60대 초반으로 보였다, 할머니는 다만 관절통 때문인지 다리가 불편한 듯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고 있는데, 17세에 결혼하여 29세에 홀몸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자녀들을 잘 키워 대처에서 잘 살고 있는데, 큰아들 가족을 고향으로 불러들여 지금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벼농사를 짓던 논에 밤나무와 두릅나무를 심었는데, 두릅을 한 해에 100석이나 딴다고 말했다. "반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국군이 우리 마을을 죄다 불태워버렸지. 그 뒤에 나라에서 집을 다시 지어준 거야.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집을 팔지 않는다구. 논농사 대신 과수농사를 하지만, 먹고 사는 데 전혀 불편이 없어요. 요즘은 도시로 나갔던 젊은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고 있지." 할머니는 자신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몇 차례나 거푸 말할 만큼 마을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
한수내 상류에서 맑고 아름다운 징담들을 둘러본 우리들은 다시 발길을 돌렸다. 고로쇠 수액을 받을 물통들을 가득 지고 올라오던 마을사람들과 마주쳤다. 주민 모두 밝고 건강한 표정들이고, 인사를 건네자 반갑게 받아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밝은 얼굴이 너무나 좋았다. "두레네는 좋은 이웃들을 두고 있구나!" '두레네 글방'에서 두레네 가족이 이 이웃의 밤 줍는 일을 하며 썼던 글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두레네의 더욱 좋은 이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들은 마을사람들에게 거듭 인사를 올렸다.
두레네집 뒤편 골짜기는 청정 자연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리산중의 가장 부지런한 주민들이 강인한 생활력으로 일하고 있는, 살아있는 '삶의 터전'이어서 또다른 감명을 안겨주었다. 두레네집의 '생태학교'를 찾든, 두레네 가족을 만나려고 찾든, 두레네가 살고 있는 마을의 건강한 '지리산 삶'을 지켜보는 것도 정말 훌륭한 공부가 될 것이다.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방식을 두레네 마을 사람들은 아주 생생하게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2002년 2월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