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 수액을 마시려는 가족들을 따라 목통마을을 처음 찾았던 여수 처녀 손순심은 목통마을 총각 김수만에게 '큐피트의 화살'을 쏘았다. 산골 총각에게 중매를 서겠다고 하고선 한달 뒤에 그녀 혼자 목통마을로 찾아와선 자신이 시집을 오마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미모의 8등신이 지리산골에 시집을 오겠다구? 이 느닷없는 제의가 김수만은 물론, 그의 가족들에게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김수만의 가족들은 그녀의 진실을 알기 위해 몇 가지 시험 과정을 거치게 했다. 도시 처녀를 무논으로 데리고 가서 모내기를 해보라고 시켰다. 또 밭으로 데리고 가서 김매기를 시키기도 했다. "가혹할 정도의 테스트였던 셈예요. 어른들보다 총각님이 더 쌀쌀하게 힘든 일을 시키더군요.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걸 해냈어요. 항구도시에서 자란 때문인지 지리산의 포근한 품이 너무 좋았던 때문이었지요."
그녀는 그 힘든 시험과정을 거쳐 마침내 지리산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하지만 신행을 온 바로 그 다음날 그녀에게 또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7순의 시조모가 신부더러 나무 묘목을 등짐으로 지고 곡괭이를 들고 무조건 따라오라 했다. 칠순 꼬부랑 할머니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지리산 상상봉으로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 오르기만 했다. 신부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구슬땀이 쏟아져 눈물을 흘렸다.
하늘 끝까지 오른 듯한 곳에서 할머니가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곡괭이로 여기 땅을 파고 그 묘목을 심어라!" 신부는 그제야 자신이 묘목 등짐을 지고 무거운 곡괭이를 들고 정신없이 산을 오른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시키는대로 땅을 파고 나무를 심었다. "내려가자!" 일이 끝나자 할머니는 그 말 한 마디만 했다. 왜 묘목을 심어야 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이 집안의 전래풍습인 것으로만 짐작했다.
손순심이 목통마을로 시집을 온지 꼭 한달째 되는 날이었다. 신랑 아버지인 김용수씨가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 앉혀놓고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을 내렸다. "저기 저 앞 대지와 논을 줄 테니, 너희들은 오늘부터 독립해라!" 그 말은 당장 집을 나가서 따로 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집도 방도 없이 나가 살라니! 김수만 손순심 신혼부부는 사실상 집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김수만 손순심 부부는 집을 떠나 달리 갈 곳도 없고 하여 목통계곡 옆에 텐트를 쳐놓고 그곳에서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밥을 지어먹고 잠을 자는 텐트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집을 짓는 '유별난 고통'의 나날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도회지에서 편안하게 자란 그녀는 전깃불이 닿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텐트생활을 하면서 며칠이고 계속 비가 내릴 때는 습기 때문에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기도 했다.
더구나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집 짓는 일을 하게 되자 백옥같이 희고 곱던 살결이 나무껍질처럼 꺼칠꺼칠하고 보기 흉하게 변했다. 그런 속에 젖은 나무로 노천에 걸어놓은 솥에 밥을 지을 때는 매운 연기로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다. 또 캄캄한 밤중에는 야생동물들이 천막 가까이 다가와 울부짖고는 하여 그녀는 공포에 질려 땅속으로라도 파고들고 싶었을 만큼 떨기도 했다.
김수만 가(家)는 목통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터줏대감이나 같았고, 마을에서도 가장 땅이 많은 부잣집이었다. 목통마을의 자랑인 물레방아도 김수만네가 주인이었다. 이 물레방아로 발전을 하여 목통골 주민들이 하동읍보다 먼저 전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87년 당시에도 이 물레방앗간에서 벼의 도정을 했다. 이처럼 잘사는 부잣집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며 갖는 혹독한 '신부 트레이닝' 과정이 주목할 만하다.
어쨌든 여수 새댁은 이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이겨낸 끝에 드디어 새 집 짓는 일을 완수했다. "집을 다 지어 세간을 들여놓고 보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어요. 집 짓는 고생도 해냈으니 이젠 못 할 일이 없다는 자신이 생겼지요. 시부모님이 왜 그런 고생을 시켰는지 비로소 큰 깨달음이 가슴에 닿았어요." 여수 새댁은 이렇게 하여 자신의 손으로 지은 새 보금자리에서 또다른 '지리산 삶의 도약'을 시도하게 된다.
(2001년 12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