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송곤이 고운동으로 옮겨간 89년과 90년 필자는 고운동을 여러 차례 찾았다. 지리산의 '블랙홀'인 고운동과 계곡의 매력도 컸고, 덕천서원(덕산)~고운동~청학동~불일폭포~쌍계사를 잇는 산행코스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고운동에서 필자의 흥미를 끈 것은 그곳에 사는 세 가구마다의 특징 한 가지씩이었다. 김부억 일가의 초미니 수력발전소(?), 홍송곤의 '고운산장', 박보살의 '고래등 와가(瓦家)'가 그것이었다.
고운동에는 '고운산장'을 합쳐 세 가구밖에 없어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부억 노인네 집에는 TV와 냉장고가 놓여 있고, 백열등까지 달려 있었다. 그이의 집에선 자가 수력발전을 하고 있었다. 마당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2.5미터 높이의 원통으로 쏟아내려 미니 수력발전을 했다. 원통 입구 개폐 장치를 열면 물이 쏟아져 발전이 되고, 닫으면 발전이 중단됐다. 그래서 김부억 노인 한 집만은 전등불을 켰다.
지리산 산상의 이 초미니 수력발전소(?)는 이곳을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장난감(?)이 되고는 했다. 계곡 옆에 물을 담아두는 작은 무논이 있고, 그 무논 물꼬에 물을 떨어뜨리는 원통을 대놓았다. 원통 입구에 물 유입 개폐 장치가 달려 있고, 그것을 30미터 거리의 김노인 집 마당에서 가느다란 로프로 연결하여 조정했다. 로프를 당기면 열리고, 풀면 닫히게끔 해놓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게 색다른 구경꺼리였다.
김노인 집 마당에는 물레 모양의 나무 기구에 로프를 걸어두는 간단한 장치가 돼 있었다. 방문객들은 호기심과 재미로 그 빗장을 당겨놓기도 하고, 풀어놓기도 했다. 당겨놓으면 김씨집 백열등에 전기가 들어오고, 풀어놓으면 전기가 끄지는 것이었다. 물레방아도 아닌, 지리산 산상에 단 한 가구만 쓰는 초미니 수력발전소, 이것이 너무나 절묘하고 또한 미묘한 느낌을 안겨주지 않겠는가. 그것은 곧 '운명적 상징'이 됐다.
김노인의 초미니 수력발전의 물줄기를 흘러내리고 있는 계곡을 끝까지 거슬러 오르면 도보로 20분 거리에 대궐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이 가와집 뒤쪽과 양 옆은 마치 ㅅ자 형태로 산능선이 둘러싸고 있었고, 집 앞으로는 별도의 드넓은 분지가 열려 있어 절묘한 명당이었다. 이른바 '박보살'이 산다는 박보살집이다. 하지만 대궐같은 집 모양이나 주변을 단장해놓은 모습을 보면 특별한 재력가의 별장처럼 생각되었다.
김부억 노인네 집에서 서쪽으로 10여분 가면 고운재에 닿는데, 바로 그 길 옆 양지바른 곳에 홍송곤의 울도 담도 없는 '고운산장'이 있었다. '고운산장'이란 목조 오두막 이름이다. 홍송곤 부부의 산중 오두막을 뜻했다. 하지만 지리산에 야생(?)하는 산꾼들이 찾아오고, 지나가는 길손이 쉬어가기를 원하면서 간단한 음료도 팔고, 하룻밤 묵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면서 차츰 일반 산장처럼 여겨지게 됐다.
홍송곤은 달궁마을에서 이 고운동으로 옮겨오면서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 오랜 세월 혼자 방황하던 생활을 마감하고 동향의 산처녀 하윤주와 결혼, 따뜻한 가정을 이룬 것이다. 두 사람은 40이 가까운 나이에 늦게 결혼했지만, 오직 지리산의 산중생활에 순응하며 살기로 뜻을 모았다. 그들은 자녀도 갖지 않기로 약속했다. 지리산의 풀과 꽃, 나무와 어울리며 산새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운 자연인이고자 하였다.
홍송곤 부부는 '고운산장' 오두막 '새집'에 사는 산새와 같았다. 맑고 티없이 살아온 이들 부부는 세속 사람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선녀와 나무꾼'처럼 오로지 순수, 진실할 따름이었다. 홍송곤이 말이 없고 내성적인 반면, 아내 하윤주는 상냥하고 활달했다. 더구나 인정이 많아 찾아온 사람에게 이곳 명물인 '쇠무르팍' 약초 등 무엇이든 듬뿍 안겨주고는 했다. 마음을 비우면 맑고 깨끗해짐을 보여주는 거울이나 같았다.
고운동의 오두막 고운산장의 홍송곤, 하윤주 부부는 지리산에 사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임이 틀림없었다. 필자는 이 부부야말로 고운선생처럼 고운동에서 신선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세상 일이란! 선녀와 나무꾼의 보금자리 '고운산장'도, 김부억 노인네의 초미니 수력발전소도 물에 잠기고 만다는 청천벽력 날벼락이 날아들었다. 고운동계곡을 가로막고 산청양수발전소 상부댐이 들어선다고 했다.
지리산의 지능선이기는 하지만, 해발 700여 미터의 높은 산상의 보금자리가 진짜 발전소의 거대한 댐에 잠기게 된다니! 이게 천지개벽이 아니고 무엇인가? 달궁마을의 개발에 질려 지리산의 오지 중의 오지를 찾아 보금자리를 마련한 홍송곤 부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하지만 원망하고 통탄한들 무엇하랴. 94년, 그들은 아름다운 고운동계곡을 파헤치는 기계음이 들리기 전에 다시 고운동을 떠나가게 된다.
(2001년 10월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