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송곤이 달궁마을에 정착했던 1980년과 성삼재 종단 관광도로가 개통된 88년은 8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8년 사이에 달궁마을은 천지개벽이라도 한 듯이 거센 개발의 열풍을 맞게 됐다. 산내에서 40여리를 걸어오던 소로가 작전도로를 내느라 길이 넓혀지더니, 왕복 2차선 관광도로로 확장, 포장이 된 것이다. 성삼재가 뚫렸고, 정령치마저 뚫렸다. 길만이 아니라 '달의 궁전' 옛터는 시멘트로 덮여져 주차장으로 탈바꿈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지리산 최고 오지 달궁마을이 교통요지, 피서명당으로 각광을 받게 되면서 차량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이들 손님을 맞기 위해 당장 주택을 고쳐 지어야 했다. 산나물을 뜯고, 약초를 채취하고, 산열매를 줍고, 벌을 치던 주민들은 민박과 음식점으로 생업을 바꾸었다. 언제나 달빛에 잠겨 있던 달궁마을이 이 급속한 변화 과정에 얼마나 요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을 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마을 사람들은 얼떨떨한 가운데 문명의 밀물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전설로 전해오던 '달의 궁전'이 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문명세계에서 재현되는 것으로 기대했을 법하다. 도회지 사람들이 새롭게 불기 시작한 레저붐을 타고 밀물처럼 몰려와 돈을 뿌리고 가니 도깨비 방망이를 움켜쥐게 된 듯한 달콤한 환상이 왜 없었겠는가? 주민들이 이처럼 들뜨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 홍송곤은 짐을 꾸려 도망치듯 달궁마을을 떠나게 된다.
홍송곤은 누구인가? 그는 경남 마산 출신이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지리산을 계속 찾아다녔다. 지리산에 흠뻑 빠진 산악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산을 찾게 됐고, 그러다 산중의 산인 지리산에 빨려들었던 것이다. 그는 20년 동안 지리산에 안겨 있는 사이 자신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지리산 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20년 동안 헤맨 끝에 마침내 정착한 곳이 지리산에서 가장 조용한 달궁마을이었던 것이다.
홍송곤은 80년 총각의 몸으로 단신 달궁마을에 보금자리를 열었다. 하지만 겨우 8년을 넘긴 89년 그는 지리산의 또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성삼재, 정령치 도로가 뚫리면서 그토록 조용하던 달궁마을이 도회지의 번잡을 뺨치는 것에 질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96년 성삼재 종단도로 공사가 시작되자 달궁마을을 떠나야 할 것으로 직감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그는 마음 편하게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다닌 것이었다.
그는 달궁마을로 찾아들었다가 낭패를 겪게 된 전철을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무려 3년 동안에 걸쳐 지리산중을 샅샅이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평생 동안 머물어도 좋을 이상향을 찾아냈다. 그곳이 바로 해발 720미터의 고운동(孤雲洞)이었다. 고운동계곡의 상류 끝, 단 한 가구만 살고 있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중이었다. 홍송곤은 89년 달궁마을을 미련없이 떠나 이 고운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총각으로 혼자 사는 그에게 많은 짐이 있을 턱도 없었다. 그에게 새로 근사하게 집을 지을 돈이 있을 리도 없었다. 오랜 세월 지리산을 누비고 다니는 동안 산속에서 사는 산친구들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가 고운동 언덕배기에 오두막을 짓는 동안 지리산속에서 야생을 하듯 살고 있는 진짜 지리산꾼들이 달려와 힘을 보태주었다. 고운동에서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 새소리 뿐이었다. 홍송곤은 그토록 그리던 이상향에 마침내 안기게 되었다.
"이곳에는 자동차는 커녕, 자전거 한 대도 볼 수 없지요. 어쩌면 이 세상과 완벽하게 차단된 곳이나 같습니다. 몇날 며칠 동안 사람 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답니다. 세상의 어떤 거친 풍파도 이곳 만큼은 밀려들 수가 없지요. 여기는 이 세상에서 잊혀진 블랙홀과 같답니다. 세상만사 아주 잊어버리고 바람처럼, 산새처럼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안성마춤인 곳입니다. 이런 곳에 오두막을 마련하고 보니 나는 '마음의 부자'가 됐지요."
홍송곤은 달궁마을에서 고운동으로 옮기고부터 금세 마음의 부자가 됐다. 그래서 나이 40이 다 되도록 총각으로 살고자 했던 고집을 쉽게 꺾고 바로 다음해인 90년 2월 결혼을 하게 된다. 신부는 같은 마산 출신으로 이미 멋진 산처녀이던 하윤주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그 3년 전이었다. 둘 모두 나이도 40을 바라보는 노총각, 노처녀였지만, 이들 원앙은 오직 서로가 산에 안겨 산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 맞는 것만으로 부부가 됐다.
(2001년 10월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