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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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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공격으로부터 '통나무 봉쇄선'을 지키기 위해 마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특공대를 조직했다. 당국에서 권유하기도 했지만, 17세 소년으로부터 50대의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특공대에 참여했다. 또 봉쇄선 안으로 피란 온 다른 마을 청장년들도 특공대에 들어왔다. 당시 마천의 민간인 특공대는 120∼130명 가량 되었다. 마천애향회의 '마천향토지'는 '이 특공대가 서남지구전투사령부나 백선엽 야전사령부의 정규군 500명에 필적하는 전투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썼다.

이 특공대는 여순반란 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있었던 '민보단(주민자치단체)'의 후신인 셈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기였다. 여순사건의 폭동군을 상대한 민보단은 대나무를 뾰족하게 만든 죽창을 들었는데, 특공대는 일제식 소총을 휴대했다. 하지만 이 특공대는 민보단과 똑같은 점도 있었다. 그것은 대원의 대부분이 짚신을 신고 있었다는 점이다. 군화 대신 마천 주민들의 평상화인 짚신을 신고 싸웠기 때문에 마천특공대를 일명 '짚세기 부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짚세기 부대'로 불렀던 것은 빈약한 무기와 짚신을 신고도 잘 싸운다는 찬사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짚세기 특공대는 정식 대원이 되기 전에 일주일 내지 10일 정도의 기초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이란 총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과 좌로총, 우로총 하는 정도의 극히 단순하고 초보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괭이로 밭을 일구고, 홀치(쟁기)로 논을 갈던 그들의 손에는 그런 기초훈련도 필요했던 것이다. 마천특공대는 6개 부대로 편성됐고, 대대마다 담당 구역히 할당됐다.

어느 골짜기에 빨치산이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곽인길 대대장이 부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그들을 격퇴시키고는 했다. 그는 총지휘관을 이어 받을 만큼 용감한 사나이로 일화도 많이 남겼다. 한번은 그가 대원들도 없이 실덕마을에 혼자 머물고 있었는데, 십수명의 빨치산이 접근해왔다. 그는 기지를 발휘,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저기 빨갱이가 오고 있다. 1대대는 우로, 2대대는 좌로 배치, 사격 준비!" 그리고 그는 대나무숲에 대고 총을 난사했다. 대나무숲은 여러 명이 총을 쏘는 듯한 효과음을 냈다. 놀란 빨치산들이 도망을 쳤다고 한다.

마천면 경비 총책임자는 마천지서의 경비주임 하만수였다. 그는 원래 함양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경찰들은 빨치산에 시달리는 마천지서 근무를 누구나 기피했다. 그래서 '마천지서 근무를 희망하면 계급을 올려준다'는 기발한 제안이 나왔고, 이 때 하만수 혼자 손을 들어 마천지서 경무주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그의 별명은 '하대포'였다. 포를 잘 쏜다는 뜻이 아니라,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큰소리를 치거나 과장과 허세가 많아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자기가 전화를 해서 "곧 공군 전투기가 지원해 준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는가 하면, 어디어디 골짜기에 파견근무를 다녀오면 "소를 잡아 주겠다"는 말을 곧잘 했다. 그러나 소지역 전투에 공군 전투기가 지원해줄 까닭도 없고, 소는 백번씩이나 잡아준다는 약속 끝에 겨우 한마리를 잡아주는 식이었다. 짚세기 부대가 만들어진 직후 하대포는 그들을 이끌고 노장대로 출동했다. 그는 작전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공격명령을 내리고 이렇게 소리쳤다. "무조건 공격이다. 열심히 싸워라. 조금 있으면 전투기가 올 것이다. 방금 전투기를 보내준다는 전화를 받았다."

짚세기 부대는 소규모 접전을 치르면서 점차 전투경험을 쌓게 되고 용맹성을 떨치게 됐다. 하지만 52년 9월2일 궤멸의 길을 걷던 남부군의 마지막 대공세에 통나무 봉쇄선도 뚫리고 짚세기 부대도 최대의 희생자를 내게 된다. '빨치산 대부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즉사하는 사람, 부상을 입은 사람들의 신음이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을 연출하고 있었다. 모두가 우왕좌왕이었다. 일시에 60여명이 죽음을 당하는 참극이었다. 6.25전쟁 중 마천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마천향토지'의 기록이다. 이는  지리산 자락의 그 수많은 상처들 가운데 작은 하나의 것일 뿐이다.
(2001년 7월4일)

*부기(附記)=마천의 '통나무 봉쇄선'과 '짚세기 부대'의 활약상, 그리고 '하대포'의 일화와 크고 작은 전투 상황 등은 '마천향토지'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을 필자의 졸저 '지리산 반세기'에 발췌, 요약해 놓았다. 이 칼럼에서는 그 내용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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