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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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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馬川)에는 '마천애향회'가 있다. 50여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마천애향회는 첫 사업으로 '마천향토지'를 발간하기로 뜻을 모았다. 87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무려 7년 동안에 걸쳐 온갖 노력과 정성을 쏟은 끝에 94년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됐다. 이 향토지는 전국 최초의 면(面) 단위 순수향토지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마천애향회가 펴년 '마천향토지' 가운데 특히 빨치산과의 투쟁 부분은 실존인물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어떤 기록보다 사실적이다. 그 내용도 여타의 기록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들을 여기에 옮겨본다.

'빨치산이 지리산 주변 마을들을 휩쓸고 다니면서 먹을 것, 입을 것들을 닥치는대로 털어가는 보급투쟁을 벌일 때 마을 사람들이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큰 부락에선 빨치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방책선을 만들고, 특공대를 조직하여 빨치산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곳의 하나가 함양군 마천면사무소 소재지인 당흥리(속칭 땅벌)이다. 주민들은 통나무를 엮어서 봉쇄선을 만들었다. 직경 10센티미터 이상 되는 통나무를 땅속에 묻어 빽빽하게 세우고, 새끼줄이나 칡넝쿨 등으로 꽁꽁 얽어매었다. 이를테면 '통나무성(城)'인 셈이다.

이 통나무 봉쇄선은 3겹으로 만들었는데, 겹과 겹 사이는 2∼3미터의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빨치산에게 의외의 장벽이 되어 쉽게 돌파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봉쇄선 안의 당흥부락은 다른 부락보다 안전하여 인근 마을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당흥부락 통나무 봉쇄선 안에는 마천지서, 면사무소, 영림지소, 마천초등학교 등의 공공기관과 약국, 의원, 여관, 가게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젊은이들은 피난 온 청년들을 포함하여 특공대를 자치적(부분적으로는 타의도 작용했다)으로 결성하여 빨치산과 맞섰다.

이웃 마을 청년들은 농번기 때엔 자기 마을로 돌아가 농사를 지었고, 밤이면 봉쇄선 안으로 들어와 몸을 숨겼다. 봉쇄선 안은 곡식을 저장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추성, 금계, 등구, 양정, 창원, 백무, 뇌전, 강청, 음정, 하정, 외마, 내마, 매암 등 마천면의 여러 부락들이 당흥마을 봉쇄선 안에 곡식을 옮겨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갖다 먹었다. 그런 마을에는 빨치산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소, 돼지, 닭, 개 등의 가축들도 봉쇄선 안에서 키웠다. 다른 마을의 소는 낮 동안 데리고 가서 농사일을 시킨 후 저녁이 되면 다시 봉쇄선 안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당시 마천지서에서는 되도록이면 가축은 키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가축을 키워봤자 빨갱이 배만 부르게 해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통나무 봉쇄선은 마천면사무소 소재지 뿐만 아니라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고지(보루)에도 설치했다. 규모는 당흥마을보다 작았지만, 바람재, 상로봉, 외마, 금대산, 수렁기고지 등에 이 통나무 봉쇄선을 비슷한 형태로 설치했다. 이들 고지에는 심지어 5겹, 6겹으로 만든 봉쇄선도 있었다. 고지들은 모두 마천면사무소 소재지 봉쇄선의 외곽에 위치하여 당흥부락을 감싼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들 고지는 빨치산을 막는 최전방 역할을 해야 했다. 빨치산은 마천면사무소 소재지에 접근하기 이전에 일차적으로 이들 외곽 봉쇄선과 먼저 부닥치게 되어 있었다. 마천의 통나무 봉쇄선은 꽤나 견고하여 막강한 남부군에게도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태의 '남부군'도 마천보루대(고지)의 견고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운봉, 마천, 하동 빙 돌아가며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렀어. 고생들 했지. 서울부대는 마천에서 녹았지, 글쎄. 중기관총을 걸어놓고 휘둘러대는데 토치카에 무턱대고 돌격하라니 남아나겠어? 연대장은 부상하고, 소대장도 그때 죽고, 거기서 단 한번에 반타작해 버렸지."'

이상은 마천애향회가 펴낸 '마천향토지'에 실려 있는 내용을 필자가 다시 정리하여 졸저 '지리산 반세기'에 수록한 것을 옮긴 것이다. 마천의 특공대는 일명 '짚세기 부대'로 불린 민간인들로 이들의 활동이 특히 주목된다. 왜냐면 당시 현지 주민들의 활약은 지금까지 빨치산 관련 여러 저술이나 기록들과 상당히 다르고, 생존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 또한 애틋한 감회를 안겨주는 때문이다. '마천의 통나무 봉쇄선' 얘기는 이 칼럼 다음 호의 '민간 짚세기 부대' 편으로 이어진다. 통나무 봉쇄선과 민간 짚세기 부대는 불가분의 관계로 공동운명체이기도 했다.
(2001년 7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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