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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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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 마천 큰애기들은 곶감 깎기로 다 나간다. 심원 달궁 큰애기들은 곤달래 뜯기로 다 나간다.' 이런 지리산 민요가 있다. 시천(矢川)과 마천(馬川)의 곶감은 지금도 지리산의 명산물이다. 하지만 남원군 산내면과 접해 있는 함양군 마천면의 원래 명산물은 종이와 숯이었다. 이곳의 옛이름으로 마천소(馬川所)와 의탄소(義灘所)가 있었다. 소(所)란 고려시대의 특수행정집단이었다. 이를테면 종이를 만드는 지소(紙所), 숯을 굽는 탄소(炭所), 그릇을 만드는 자기소(磁器所), 소금을 생산하는 염소(鹽所) 등을 일컫는다.

마천소와 의탄소는 종이와 숯을 굽는 지소와 탄소였다. 마천소의 위치는 현재의 도마부락(문수암으로 오르는 산길 입구 마을) 일대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지소(紙所)'라 불리는 곳이 있다. 도마부락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외부 유민들이 몰려오기 이전까지는 마천의 '서울'이었다. 도마(都馬)란 마천(馬川) 앞에 도읍 '都'자를 붙인 것으로 옛명칭은 '도마천'이었다. 의탄소는 지금의 칠선계곡 들머리 마을인 금계부락 일대였다. 마천소, 의탄소 당시의 마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농노 또는 예속민에 가까웠다고 한다.

마천이란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이다. 함양편에 '소가 1이니 마천소다'라는 대목이 있다. 마천소를 '馬淺所'라고 적어 내 '川'을 얕을 '淺'으로 쓰고 있다. 1472년 이곳을 찾은 김종직은 다음의 시를 남겼다. '말방울 울리며 내닫는 마천소(馬川所)에 드니 / 빈붕(貧朋)들 또한 급하게 따라오네 / 구름은 신모사(神母祠)를 덮었고 / 우뢰는 용연에 깊이 움츠렸네 / 수목 우거진 사당에 지전이 걸려 있고 / 숯 굽는 골짜기엔 연기가 난다 / 일하는 사람들은 메밀을 베고 / 작은 색시는 목화를 따는구나.'

김종직의 시에서 1400년대의 마천 주민은 메밀과 목화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았고, 마천 일대가 무속의 풍조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중환(1690~1756년)의 '택리지'도 마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곳에는 망하여 온 유민들이 많고, 때때로 도적이 나오기도 한다. 또 온 산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아서 매년 봄 가을이면 사방 이웃 무당들이 구름같이 몰려와서 기도를 드린다. 그럴 때면 남녀가 드러난 곳에서 섞이기도 하고, 술과 고기와 더러운 냄새가 낭자하여 가장 불결한 곳이 된다.'

이중환은 지리산 북쪽, 특히 마천을 '촌거(村居)는 승사(僧寺)와 섞이어 산다. 스님이나 속인이나 대나무 껍질을 깎고, 감과 밤을 주워서 살아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풍족하다'고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이곳도 쑥대밭이 됐다. 당시 주민의 참상이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실려 있다. '명나라 병사 한 명이 지나가다 길가운데서 구토를 했는데, 굶주린 백성 천백명이 일시에 달려가서 머리를 조아 주워먹었는데 약한 자는 달려가지 못하고 물러서서 눈물만 흘리었다. 굶어죽은 송장이 길에 쌓인 것을...(후략)'

문명인(?)으로 마천을 처음 찾았던 인물은 누구일까? 가락국 최후의 왕인 구형왕(仇衡王)이 그 주인공으로 꼽힌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1년(532년)에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었다. 그래서 '양왕(讓王)'으로도 불린다. 그는 세상의 조롱을 피해 별궁이 있는 산청군 금서면 왕산 기슭보다 더 깊은 곳인 지리산 추성동 위의 국골(임금의 계곡)로 들어와 일시 은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추성(湫城)'이라 불리는 이 석성은 백제와의 접경으로 신라가 쌓았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구형왕이 다녀간 수십년 뒤 신라 진평왕이 군자리(마천교 건너편, 도마부락 앞마을)에 들어왔다. 그가 왜 백제와의 접경인 군자리에 와서 머물렀는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아들이 없던 그가 이곳에서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집을 절로 삼게 했고, 그 이름을 '군자사(君子寺)'로 일컬었다. 579년 즉위하여 56년 동안 치세한 진평왕이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접경지역 마천까지 와서 머물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아들을 얻고자 유명한 '마천 무속'에 의탁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는지?

지리산 북쪽 관문 마천은 이처럼 수많은 멱사의 편린들을 안고 있다. 옛날에는 천민으로 소외된 민초들이 종이를 만들고 숯을 구워 관청에 바쳤고, 그 뒤로 몰락한 양민 등 유민들이 몰려와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들은 지리산의 은총에 기대어 '자연인'으로 살았지만, 임진왜란 등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엄청난 희생도 치렀다. 하지만 일찌기 구형왕과 진평왕이 머물다 갔을 만큼 '특별한 고장'이다. 아니, 변강쇠와 옹녀가 최후의 사랑의 도피처로 선택한 곳이기도 하다. 이 모두가 '지리산적인 감회'가 될 법하다.
(2001년 6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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