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의 마애조각상을 찾은 김경렬님은 그 얼굴에 인고와 통한의 비장감이 담겨 있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의 자화상(自畵像) 그대로다!"고 감탄했다.
"마애조각상이 풍기는 뉘앙스는 어쩌면 혹독한 일제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 온갖 핍박과 수모를 견디고, 8.15 이후의 혼란기를 겪고, 6.25 전쟁을 슬프게 치르고, 독재자들의 횡포에 늘 밟히고 한, 우리 현대사를 자신의 얼굴에 새기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얼굴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이는 장군상과 작은 불상들을 구분하여 보았던 것이다.
정령의 불상을 정장군, 또는 황장군의 장군상으로 보고, 그 얼굴은 인고와 통한의 비장감이 서린 우리의 자화상과 같다고 생각한 것은 어째서일까?
김경렬님은 달궁의 '마한 피란도성'에 집착해 있었고, 그 때문에 정령의 역사 기록의 편린들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듯하다.
정령에는 정유재란 때까지 정령성(鄭嶺城)이 남아있었다. 정유재란 때 구례에 이어 남원성이 함락되자 남원과 운봉 사람들은 정령성으로 피란했다. 조선 선조 30년(1597년) 음력 8월16일 남원성 함락 하루 앞날 정령성 상황은 어땠을까?
'...외로운 성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어 위급하다.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고, 밤의 불빛이 낮같이 밝았다. 우리들은 가족 수백명과 함께 바위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가 밤을 황령암에서 지냈다.'
조경남(趙慶男)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기록한 글이다. 그의 음력 9월6일 기록을 보자.
'...왕래하는 왜적이 끊이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렸다. 식량이 바닥났으니 어쩔 수 없이 은신암으로 되돌아왔다. 하루를 지나고 나니 왜병의 형세가 약간 줄어들어 있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은 지리산 사람들이 정령성으로 피란가던 얘기며, 다시 지리산속 암자들을 전전하는 과정의 눈물겨운 얘기들을 쓰고 있다.
'늙은이와 아이들은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걸어서 겨우 정령성에 도착하여 잠깐 쉬었다. 아침에 서운암터에 내려가 숨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거기까지 올라왔던 왜병이 모두 내려갔다. 월운령에서 노숙을 하고, 아침에 처음으로 한 동네 사람을 만났다. 우리 마을에 죽은 사람이 100여명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대로 모두 버렸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남원과 운봉 사람들이 정령성과 지리산속 암자로 도망다닌 얘기가 눈물겹다.
유람이나 등산으로 정령까지 오르는 것도 힘드는데, 왜병들에 쫓기면서 피란 보퉁이를 메고 험준한 정령으로 올랐을 당시 지리산 사람들의 처절한 아픔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피란은 기원 전인 마한시대부터 시작됐지만, 운봉 여원치와 함양 팔령치 사이를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 왔다갔다 할 때, 고려말 아지발도의 왜구가 운봉을 점령했을 때, 그리고 정유재란과 6.25 등등 고난의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됐다.
김경렬님이 정령의 마애조각상을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마애석상군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으로 확인, 보물 제1123호로 지정했다.
마애조각상은 마한 피란도성의 정장군도, 황장군도 아니고,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명월지불(明月智佛), 곧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이이라고 하였다.
정령의 안내판에도 마애석상군으로 접근하는 오솔길 바로 직전의 평퍼짐한 곳을 '개령암지'로 그려놓았다.
부처님이라면 인고와 통한의 우리들 자화상일 수는 없다.
마애불상군에서 발길을 돌리는데 '자이언트' 이광전님이 그 아래 숲속으로 우리 일행을 이끌고 들어갔다.
"무속인들이 이곳에 베트콩 아지트같이 땅굴을 파고 숨어지내며 기도를 한다."
그들의 그 땅굴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정령치의 베트콩? 우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한동안 잣나무 숲속을 살피고 다녔지만, 문제의 땅굴 아지트는 찾지 못했다. 관리공단 직원들이 쫓아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땅굴 대신 둥글레가 밭을 이루다시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우리들이 정녕 찬탄을 금치 못한 것은 야생화들이 온통 정령 일대 능선을 뒤덮고 있는 것이었다.
서북능선 북단의 바래봉 철쭉만 아름다운 화원은 아니었다. 정령 일원의 야생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리산 닷컴'의 김서곤님은 야생화들을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에 담느라 아주 열심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 날 수백 컷의 지리산 야생화들을 담았을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전쟁과 피란의 비극이 점철된 곳, 하지만 지금은 그 아픔 대신 갖가지 야생화들이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고 있다. 세월 무상인가.
(2002년 8월24일)
"마애조각상이 풍기는 뉘앙스는 어쩌면 혹독한 일제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 온갖 핍박과 수모를 견디고, 8.15 이후의 혼란기를 겪고, 6.25 전쟁을 슬프게 치르고, 독재자들의 횡포에 늘 밟히고 한, 우리 현대사를 자신의 얼굴에 새기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얼굴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이는 장군상과 작은 불상들을 구분하여 보았던 것이다.
정령의 불상을 정장군, 또는 황장군의 장군상으로 보고, 그 얼굴은 인고와 통한의 비장감이 서린 우리의 자화상과 같다고 생각한 것은 어째서일까?
김경렬님은 달궁의 '마한 피란도성'에 집착해 있었고, 그 때문에 정령의 역사 기록의 편린들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듯하다.
정령에는 정유재란 때까지 정령성(鄭嶺城)이 남아있었다. 정유재란 때 구례에 이어 남원성이 함락되자 남원과 운봉 사람들은 정령성으로 피란했다. 조선 선조 30년(1597년) 음력 8월16일 남원성 함락 하루 앞날 정령성 상황은 어땠을까?
'...외로운 성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어 위급하다.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고, 밤의 불빛이 낮같이 밝았다. 우리들은 가족 수백명과 함께 바위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가 밤을 황령암에서 지냈다.'
조경남(趙慶男)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기록한 글이다. 그의 음력 9월6일 기록을 보자.
'...왕래하는 왜적이 끊이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렸다. 식량이 바닥났으니 어쩔 수 없이 은신암으로 되돌아왔다. 하루를 지나고 나니 왜병의 형세가 약간 줄어들어 있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은 지리산 사람들이 정령성으로 피란가던 얘기며, 다시 지리산속 암자들을 전전하는 과정의 눈물겨운 얘기들을 쓰고 있다.
'늙은이와 아이들은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걸어서 겨우 정령성에 도착하여 잠깐 쉬었다. 아침에 서운암터에 내려가 숨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거기까지 올라왔던 왜병이 모두 내려갔다. 월운령에서 노숙을 하고, 아침에 처음으로 한 동네 사람을 만났다. 우리 마을에 죽은 사람이 100여명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대로 모두 버렸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남원과 운봉 사람들이 정령성과 지리산속 암자로 도망다닌 얘기가 눈물겹다.
유람이나 등산으로 정령까지 오르는 것도 힘드는데, 왜병들에 쫓기면서 피란 보퉁이를 메고 험준한 정령으로 올랐을 당시 지리산 사람들의 처절한 아픔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피란은 기원 전인 마한시대부터 시작됐지만, 운봉 여원치와 함양 팔령치 사이를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 왔다갔다 할 때, 고려말 아지발도의 왜구가 운봉을 점령했을 때, 그리고 정유재란과 6.25 등등 고난의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됐다.
김경렬님이 정령의 마애조각상을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마애석상군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으로 확인, 보물 제1123호로 지정했다.
마애조각상은 마한 피란도성의 정장군도, 황장군도 아니고,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명월지불(明月智佛), 곧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이이라고 하였다.
정령의 안내판에도 마애석상군으로 접근하는 오솔길 바로 직전의 평퍼짐한 곳을 '개령암지'로 그려놓았다.
부처님이라면 인고와 통한의 우리들 자화상일 수는 없다.
마애불상군에서 발길을 돌리는데 '자이언트' 이광전님이 그 아래 숲속으로 우리 일행을 이끌고 들어갔다.
"무속인들이 이곳에 베트콩 아지트같이 땅굴을 파고 숨어지내며 기도를 한다."
그들의 그 땅굴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정령치의 베트콩? 우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한동안 잣나무 숲속을 살피고 다녔지만, 문제의 땅굴 아지트는 찾지 못했다. 관리공단 직원들이 쫓아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땅굴 대신 둥글레가 밭을 이루다시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우리들이 정녕 찬탄을 금치 못한 것은 야생화들이 온통 정령 일대 능선을 뒤덮고 있는 것이었다.
서북능선 북단의 바래봉 철쭉만 아름다운 화원은 아니었다. 정령 일원의 야생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리산 닷컴'의 김서곤님은 야생화들을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에 담느라 아주 열심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 날 수백 컷의 지리산 야생화들을 담았을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전쟁과 피란의 비극이 점철된 곳, 하지만 지금은 그 아픔 대신 갖가지 야생화들이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고 있다. 세월 무상인가.
(2002년 8월24일)